무지와 순진으로 용감하게 무장한 역사 괴수 드라마 <경성크리처>

[영화, 시대를 넘다] <경성크리처>

뒤늦은 얘기지만 넷플릭스 드라마 <경성크리처>는 다소 위험한 역사관을 지녔다는 점에서 요즘 국내 극우주의자들의 환호를 받는다는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의 노선을 닮아 있다. 그래서라도 늦게나마 다루고 언급할 필요를 느낀다. 물론 <건국전쟁>마냥 그렇게까지 노골적이지는 않다.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려는 심사보다는 공부가 게을리 된 까닭에, 자신들이 역사를 비뚜로 다루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치기로 가득하다. 그래서 오히려 안타까워진다. 그러나 그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더욱 더 교묘한 면이 있다고도 느껴진다. 안 그런 척, 독립운동가들을 우회적으로 '까고' 민중의 힘이나 의지보다는 한 개인의 활약이 커뮤니티와 더 나아가 대중과 나라를 구한다는 미몽을 보여 주려 애쓴다. 무엇보다 역사란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데에만 골몰해 역사적 사실을 선택적으로만 나열하면서 한낱 유희의 도구로 전락시킨다는 느낌을 준다. 긴 러닝타임의 10부작을 보고 있으면 드라마 속 크리처의 탄생이 갖는 개연성에 자꾸 의구심이 생긴다. 웬 괴물일까? 그것도 알고 보면 일본의 괴수 영화 '고지라' 에서 가져 온 것 아닐까.

시간대 배경도 그렇다. 1945년 벚꽃이 피기 시작하기 직전에 시작해 벚꽃이 질 때까지이다. 주인공 장태상(박서준)과 윤채옥(한서희)은 극 중간중간 이렇게 중얼거린다. "사쿠라가 후루마데." 벚꽃은 3말4초에 잠깐 확 폈다가 금방 떨어지는 나무 꽃이다. 일주일 정도밖에 가지 못한다. 그러니 '사쿠라가 후루마데'라면 시간이 없다는 메타포이다.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이야기라는 것을 암시한다. 벚꽃이 피고 질 때이니까 드라마 속의 정확한 시간대는 1945년 3월말이 된다.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는 애기가 된다. 독일은 5월에 항복했으니 이제 세계 전쟁은 거의 끝으로 가고 있는 시점이다. 그런데도 경성 바닥에 괴수가 등장해 사람들을 죽인다? 일본 제국주의가 보여주는 단말마의 비명이라 해도 너무 황당한 설정이다. 차라리 1937년 즈음이 더 설득력이 있었을 법 해 보인다. 생체 실험을 위해 관동군이 설립한 731부대는 1936년에 만들어졌고 이듬 해인 1937년에 중일전쟁이 터졌으니까. 그러니 1945년의 일본이 조선에서 생체실험을 한다는 건 고증을 통한 상상력이 나가도 너무 나간 셈이 된다.

장태상은 일본 경무국에 끌려가 고문 당한 후 경무대장 이시카와(김도현)로부터 춘월관 기생 명자(지우)를 찾아 내라는 지시를 받는다. 명자는 이시카와의 애첩이고 그의 아이를 가진 상태로 실종됐다. 장태상은 경성 최고의 전당포이자 금은방인 금옥당의 주인이다. 그는 모르는 사람이 없고 그를 모르는 사람도 없다. 그를 통하면 못 찾는 물건이 없으니 못 찾을 사람도 없다. 그는 오로지 돈의 이익으로만, 생존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사람이다. 이시카와는 장태상이 명자를 찾아 내지 않으면 그의 금옥당을 몰수하겠다고 협박한다. 여러 일이 귀찮아질 것 같다는 예감 때문에라도 장태상은 명자를 찾아 나선다. 그의 수하에는 손발 격인 나월댁(김해숙)과 구갑평(박지환)이 있다.

▲<경성크리처> ⓒ넷플릭스

당시 경성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는데 부녀자들이 납치돼 살해당한 후 버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장태상은 명자를 찾아 돌고 돌아 그녀가 이치카와의 부인마에다 유키코(수현)의 부름을 받고 옹성병원의 원장 이치로(현봉식)에게 진료를 받으러 갔다가 돌아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장태상은 옹성병원을 뒤질 생각을 한다. 한편 경성 바닥에 웬 이상한 남녀가 거리를 기웃대고 다니기 시작한다. 윤중원(조한철)과 윤채옥 부녀인데 만주에서 내려 온 토두꾼들이다. 일종의 바운티 헌터(현상금 사냥꾼)를 말하는 것으로 부녀라는 설정이 특이해 보인다. 아버지가 너무 젊고 모던하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것도 1940년대가 아니라 2020년대 식이다. 부녀는 아무도, 그리고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아나키스트들로 보인다. 이들은 10년 전부터 사라진 아내이자 엄마인 최성심(강말금)의 흔적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니는 중이다. 이들의 귀착지 역시 옹성병원이다. 장태상과 윤채옥은 운명적으로 만나, 운명적으로 사건을 해결하고 다니며, 운명적으로 사랑하게 되지만 결과는 운명적으로 그리 순탄하지 못하다.

얘기의 시작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드라마 내내 인물들의 행동 동기가 불분명한 것을 넘어 억지 춘향 격으로 꿰어 맞추기 시작하기가 다반사다. 무엇보다 행동의 이념적 근거가 매우 비역사적이거나 심지어 반역사적이다. 예컨대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 속 등장인물인 첸(陳)은 국공(國共)간 합작(合作)하라는 코민테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국민당 지도부를 향한 테러를 멈추지 않는다. 그가 믿는 것은 '행동'이고, 행동을 통한 실존의 입증이며, 인간의 (생의) 조건을 만들어 나가는 실천이다. 첸은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라기 보다는 무정부주의자에 가깝다. 그는 특정한 집단이나 민중 스스로가 역사를 바꾼다고 믿지 않는다. 첸이 갖고 있는 역사적 허무주의는 숱하게 봐 온 비극적인 사건으로 다져진 것이다. 그는 역사의 동인을 개인의 행동에서 찾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테러리스트이지만 철학적이다.

<경성 크리처>의 주인공 장태상에게 첸과 같은 철학적 역사관을 기대하기란 요즘 세태를 놓고 볼 때 비난과 비아냥을 '바가지로' 들을 일이다. 그러나 장태상이 왜 배금주의에 빠져 있는(척 하는)지, 그가 목도한 독립운동이나 저항운동의 이중성 그 위선은 무엇인지 드라마 내내 속 시원하게 밝혀지는 적이 없다. 그냥 저런 저항, 이런 투쟁은 사실 다 개인의 이기와 권력에의 욕망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는 식의 무작정한 혐오 만을 노출한다. 친구 준택(위하준)은 독립운동을 한다며 껍죽대기 일쑤이고 이북에서 온 무장투쟁가 이인혁(연제욱)은 옹성병원 감옥에서 저 혼자 먼저 살겠다고 나대다가 장태상의 도움으로 살아 남는다. 이후 이인혁은 장태상의 생각과 행동에 존경을 표한다. 거사를 위해 숨겨 놓은 다이너마이트를 기꺼이 그에게 양도할 정도다. 옹성병원을 폭파하기 위해 떠나는 장태상에게 이인혁은 존경심과 애정이 가득한 표정을 짓는다. 드라마는 훨씬 이전부터 기꺼이 손발을 오그라뜨리는 방향으로 노선을 잡는다. 그럼에도 대부분 이 대목에 이르러서야 진정으로 시청을 중단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만든다.

ⓒ넷플릭스

독립운동이랍시고 하는 사람들은 기껏해야 위스키 하우스인 월광 바에 모여 마담 나영춘(옥자연)의 서빙을 받으면서 희희낙락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전부이다. 이들은 명분만을 내세우며 매명 욕구에 가득 차 있다. 독립은 무슨 독립. 독립은 운동이 아니라 놀이일 뿐이다. 광복단이라는 표시로 안중근의 단지(斷指) 시늉을 하는 것도 그냥 멋부리기 정도로 보일 뿐 감흥을 주지 못한다. 도무지 긴장감이 없다.

장태상은 그런 그들에게 스스로를 의도적으로 희화화하면서 그들과 그들 자체를 폄하한다. 장태상에게는 조선이니 일본이니가 없다. 그 구분이 중요하지가 않다. 없거나 중요하지 않은 건 좋은데, 그리고 그건 장태상의 마음이지만, 당시 조선이니 일본이니가 중요했던 사람들 전체를 마치 역사적 위선자였던 것처럼 묘사하는 건 선을 넘었다. '윤색의 윤리학'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작금에 유행하고 있는 이른바 '운동권 청산론'과 이론적 바탕을 같이 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게 된다. 장태상이 투쟁 아닌 투쟁에 뛰어 들게 된 것은 오로지 윤채옥을 향한 사랑 때문일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그 과정에서 그의 행동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도록 김원봉 같은 캐릭터, 의열단의 항거같은 모멘텀이 있었어야 했다. 인간은 돈만 좇는 이기적 존재에 불과하다고 철석같이 믿으며 고문으로 죽은 생모가 남긴 유언, "살아라, 살아 내야만 한다"를 신조어로 삼고 있는 남자가 아무리 사랑에 눈이 먼다 한들 강고한 투쟁가로 변신하기까지는 그 과정에서도 몇 번을 망설이고 몇 번을 배신하든지 아니면 누군 가에게 큰 감화와 지도를 받는 인간적 행태가 뒷받침돼야 했었다.

그럼에도 장태상은 갑자기, 그리고 단호하게 싸우기 시작한다. 역사의 사명을 믿지 않던 자가 단호하고 용감해지며 희생적이 되어 간다. 이건 거꾸로 역사의 정의를 내세우지 않는 사람들, 거기서 비껴 서 있었던 비운동권 사람들이 오히려 더 용감하고 더 희생적일 수 있다는 논리를 지니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럴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그것이야 말로 역사의 진정한 이중성이다. 드라마는 그 양면을 다 보여 줄 수 있을 때 풍부해진다. 그러지 못하면 드라마의 서사는 급격하게 경박해진다. 바로 <경성 크리처>가 천박함과 경박함의 줄기를 탄다.

ⓒ넷플릭스

장태상의 주변 인물은 일경의 잔혹한 고문에 못 이겨 모두가 그를 배신하는 것으로 나온다. 나월댁은 장태상의 생모 심순덕(우정원)을 불어 죽게 한 장본인이었고 구갑평 역시 고문을 못 이겨 장태상이 애국단의 핵심 멤버라고 허위 자백한다. 친구 준택은 약간의 고문에도 벌벌 떨며 장태상이 독립운동의 라인이라고 진술한다. 장태상은 모두가 고문 때문에 자신을 배신했다는 걸 알며 모두가 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 들인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배신'이 아니라 '모두'라는 것에 있다. 우리들 중에 누군 가는 배신할 수 있다. 모두가 다 그럴 수도 있지만 모두가 아닐 수도 있다. 모두가 다 그렇다는 체념론에 근거하게 되면 역사청산이나 반민특위는 불필요한 일이 된다. 이광수의 배신이나 최남선의 배신도 친일인명사전에 기록할 필요가 없는 일이 된다. 결국 '우리 모두'는 다 배신하게 되는 존재이니까. 이런 체념론을 두고 흔히들 뉴라이트 역사관이라 부른다.

<경성 크리처>의 작가 강은경이 의도적으로 이런 극본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연출을 맡은 정동윤 감독도 그렇게까지 못돼 보이지는 않는다. 배우들 박서준 한소희 등도 이 드라마 전체가 풍기는 이상한 냄새를 맡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여진다. 어쩌면 그냥 무지와 순진함의 소산일 수 있다. 사회가 비판의 예각이 둔해졌을 때 만들어질 수 있는 이야기일 뿐일 것이다. 그러나 무지가 사람을 죽인다. 순진한 척 사회를 망가뜨린다. 그걸 다 떠나서 주변의 사랑하고 애정하는 사람들을 해치게 한다. 사람이 역사적으로 무식하면 안되는 이유이다. 순진 무식이 <경성 크리처> 스스로를 괴수로 만든 요인이다. 이 드라마의 시즌2를 걱정 어린 시선으로 기다리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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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

오동진은 신문,통신,방송사 문화부 기자로 경력을 시작했다.영화전문지 FILM2.0과 씨네버스의 창간멤버와 편집장을 지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과 부산국제영화제 마켓 운영위원장이었다. 현재 영화 글만 쓰고 산다. 들꽃영화상 운영위원장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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