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가 다수가 되는 3가지 조건

[노동하는 자유인의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 ④]

행동하라, 그러면 알게 된다

사람은 언어로 생각하고 언어로 소통하는 사회성 동물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어머니 젖을 먹고 성장하면서 눈귀코입살갗 등의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져보는 행동으로 세상을 체험하고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함'을 통해 '앎'이 생겨납니다.(움베르또 마뚜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 <앎의 나무>, 갈무리, 2007.)

그리고 맨 먼저 배우는 것이 말입니다. 사람은 언어를 통해 세상을 이름으로 분별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 나갑니다. 그래야만 환경에 적응해 생존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유전자가 98%나 같은 침팬지의 외침도, 새들의 지저귐도 의사소통 수단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언어는 아닙니다. 개미는 페로몬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벌은 벌춤으로 의사소통을 하지만 그것 또한 언어는 아닙니다.

언어는 엄지와 검지 끝을 둥글게 해서 만나게 해 "오케이!"를 표시하는 몸짓 그림, 온도계가 온도를 가리키는 지시(indexical)를 넘어서서 그것이 가리키는 사물이나 사실과 분리된 기호와 상징, 개념들로 이루어집니다. 이 과정은 언어 사용 구성원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자본', '이윤', '사회운동', '국가'라는 말을 침팬지와 호랑지빠귀는 아마도 인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위르겐 카우베, <모든 시작의 역사>, 김영사, 2019.)

사람만의 특성이라고 여겨졌던 감정과 의식, 행위 등은 이제 거의 모두 다른 생명체가 동일하게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식물의 뿌리에도 일종의 뇌가 있고 소리를 감지하는 기능이 있습니다.(스테파노 만쿠소·알렉산드라 비올라, 양병찬 옮김, <매혹하는 식물의 뇌>, 행성B이오스, 2018.)

해달은 조개를 배 위에 놓고 돌을 도구로 사용해 깨서 먹습니다. 까마귀도 생각을 하고 눈 비탈에서 스키를 타듯이 미끄러져 내려오는 놀이를 즐깁니다.(베른트 하인리히, <까마귀의 마음>, 에코리브르, 2005.) 개미는 식물의 잎을 잘라 개미집에 넣고 곰팡이 농사를 짓습니다.(최재천, <개미제국의 발견>, 사이언스북스, 1999.)

공존과 공유의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수단, 언어와 행동

오직 언어만이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구별하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특성입니다. 인류는 언어를 통한 지식-정보의 집적과 공동체 생활을 통해 문화와 문명을 발달시켜왔습니다.

사람은 언어를 통해 소통하는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체에 속하지 못하면 세계를 인식할 수도 없고 세상을 살아갈 능력도 상실합니다. 1920년 인도에서 발견된 늑대 소녀 자매의 예가 극명하게 보여주듯 사람은 유아기에 늑대 사회에서 양육되면 늑대로 성장합니다. 늑대소녀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코 사람의 언어를 학습하지 못했습니다.

외부에 객관으로 존재하는 그런 세계란 없습니다. 눈이 나쁜 개는 이원색의 눈으로는 흐릿한 세계를 볼 수 있을 뿐이지만 2억~3억 개 이상의 코 감각 수용체가 맡은 냄새로 아주 세세하게 세계를 인식합니다. 뱀은 귀가 없지만 혀가 맡는 냄새와 눈, 피부가 감지하는 진동으로 세계를 인식합니다. 장거리 여행 새는 자외선과 지구 자장까지 눈으로 봅니다. 박쥐는 초음파로 세계를 인식합니다. 개가 보는 세계와 뱀과 박쥐와 새가 인식하는 세계, 사람이 보고 실감하는 세계 가운데 그 어느 것도 객관으로 존재하는 세계라고 확언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세계관이란 언어로 지어진 마음의 건축물입니다. 국가도 정당도 노동조합도 하나의 개념일 뿐입니다. 때문에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도 현실에 대한 모든 착시도 언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공자가 바른 이름(정명 正名)을 강조한 것도, 붓다가 명색(名色, 이름붙인 물질과 개념 namarupa)과 식(識, 분별심 vinnana)을 깨달음의 핵심 대상으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감각기관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만들어 내 자신의 세상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지구상에는 80억 명이나 됩니다. 말하자면 이 지구상에는 사람의 세계가 80억 개나 됩니다.

사회성 동물인 인간은 언어를 통해 소통하면서 이런 80억 개의 세계를 더불어 살아가는 공통의 세계, 공존과 공유의 세상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이 80억 개의 세상을 인간 본성에 어긋나게 제각각 칸막이 감옥에 가두고 인간과 자연을 착취해 왔습니다. 그 결과가 기후위기와 자본가 자신을 포함한 인간 세상의 종말입니다.

칸막이 감옥 탈출하기

이 감옥을 부수고 다시 80억 개의 세상을 공존과 공유의 세상으로 바꿔야 그나마 생존이 가능해집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개줄처럼 우리 목에 채워진 서구의 기계론과 극단의 개인주의 세계관을 과감하게 칸막이 감옥에 버리고 감옥에서 탈출하는 세계관의 대전환입니다. 마음 바꾸기 혁명입니다.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기괴한 말을 만들어낸 성장 지상주의와 과학기술 만능주의의 색안경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는 일입니다.

성찰과 반성을 통해 마음을 바꾸고 세계관을 바꾸지 않으면 기후위기와 불평등의 체제 전환은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뇌과학의 발달은 고전물리학의 기계론이 잘못된 세계관임을 명확하게 밝혀내고 있습니다.

기계론적 세계관의 핵심은 독립적인 입자, 즉 전체를 이루는 부분들을 본질적인 것으로 본다는 데 있다... 양자역학은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 세계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사유의 단위가 '입자'나 '실체'가 아니라 '사건'이나 '과정'이 돼야 한다... 우주의 본래 모습은 전체적인 하나의 과정임에도 인간의 추상화, 개념화, 언어화가 구성요소로서의 '부분'과 고정된 실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 김주환, <내면소통>, 286~288쪽, 인플루엔셜, 2023.

지금 대다수 사람들은 자연을 성장과 개발의 도구로 얼마든지 파내고 뒤집어엎고, 까부수고 훼손해도 되는 대상, 기계 유기체로 보고 있습니다. 사유재산은 자기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극단의 개인주의가 숲을 파괴하고 독성 화학물질로 땅을 오염시키고 수많은 종을 멸종시키고 있습니다.

전통 농업공동체를 해체시킨 자본주의는 극단의 개인주의를 조장해 가족까지 해체시켰고, 이제는 사람 자체를 해체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특히 디지털 미디어의 급속한 확대와 함께 가짜뉴스와 알고리즘에 의해 고착되는 밀폐된 세계관의 범람은 확장된 극단의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관을 바꾸지 않으면 개인도 해방될 수 없고 사회운동도 노동운동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세계관을 바꾸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십 년 동안 익숙하게 지켜 온 자신만의 세상을 버리고 낯선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을 사람들은 본능에서부터 두려워합니다. 특히 나이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견해와 주장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또한 마음을 바꾸는 것은 단 한 순간에도 가능한 일입니다. 익숙한 감옥 문을 열고 신선한 푸른 공기를 들이마시는 혁명은 단 한 번의 호흡만으로도 가능합니다. 지금이 바로 절실하게 그럴 때입니다. 한국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운동은 마음을 바꿔 푸른 숲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낡은 세계관을 버려야만 해방과 생존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소수가 다수가 되는 3가지 조건

21세기 들어 뇌과학과 진화생물학, 네트워크 이론의 발전은 사회성 동물인 호모 사피엔스의 집단행동에 대해 몇 가지 특징을 정리해서 알려줍니다. 그 중에서 소수가 다수가 되기 위해 필요한 3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도원결의와 던바의 수, 그리고 3.5%의 법칙이 그것입니다.

어떤 사회운동과 체제전환 운동도 초동 주체의 결의가 있어야 시작될 수 있습니다. 삼국지의 도원결의는 예수의 12제자, 붓다의 초전법륜 수행자 5명과 같은 맥락에서 모든 사회운동과 전환혁명의 출발점입니다. 자신의 삶부터 먼저 바꾼 도원결의의 초동 주체가 사회와 국가, 세상을 바꾸는 시작점입니다.

한 사람이 터놓고 신뢰하는 사람의 숫자는 150여명 안팎입니다. 이들 150여명이 다름 아닌 사회의 기초 단위입니다. 가족을 넘어선 사회의 기본 단위, 기초사회입니다. 씨족사회, 부족사회, 지역사회, 시민사회, 국가 등 더 큰 규모의 사회는 이들 수많은 기초사회의 연대와 연합으로 이루어집니다.

진화인류학자 로빈 던바는 무수한 역사 사실과 국가, 그리고 최근의 트위터 등 SNS까지 조사 연구한 뒤 인류가 출현한 이래 이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인간의 뇌가 그 이상은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마존 원시부족 공동체의 평균 구성원도 약 150여 명입니다. 공동체의 구성원 수가 200명을 넘어서면 일부가 따로 다른 지역으로 떨어져 나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듭니다. 조선 시대 리, 동 단위 노동공동체였던 두레의 규모도 평균 150여명이었습니다.(주강현, <두레>, 들녘, 2006.) 고어텍스를 비롯한 수많은 글로벌 대기업들도 사업부를 대략 150여명으로 구성합니다. 인류의 전쟁사를 살펴보아도 전우애로 똘똘 뭉친 전투 핵심부대는 150명 안팎의 중대 단위입니다. 이것이 던바의 수입니다.(로빈 던바, <던바의 수>, 아르테, 2018.)

사람의 감각 가운데 촉각은 친밀감을 전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감각입니다. 단 한 번의 접촉이 천 마디 말보다 더 많은 느낌과 정보를 전달합니다. 디지털미디어의 얕고 약한 네트워크가 할 수 없는 영역이 바로 이런 접촉의 친밀감을 통한 강한 결속입니다.

어떤 사회운동이든지, 그 이름이 활동가든 촉진자든 전위든 그 무엇이든 150여명의 핵심 부대원을 결집시켜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확산의 조직 활동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그래야 핵심 부대 내의 연결자-촉진자들이 다시 다단계 방식으로 다른 핵심 부대와 네트워크를 조직하고, 네트워크를 통해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들을 결집시킬 수 있습니다.

미국 덴버대 정치학과 교수인 에리카 체노웨스는 국제 비폭력 갈등 센터(ICNC)의 연구원 마리아 스티븐과 함께 1900년부터 2006년까지 총 323개의 전세계 인민 저항행동 사례를 문헌 조사를 통해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국가 차원이건 단체 차원이건 구성원 가운데 3.5%가 행동에 나서면 그 행동은 성공한다는 공식을 발표했습니다.(에리카 체노웨스, 마리아 J. 스티븐, <바폭력 시민운동은 왜 성공을 거두나>, 두레, 2019.) 2016/2017 촛불시위가 대표 사례입니다. 체노웨스의 3.5% 법칙은 사회성 동물인 인간이 지역공동체와 사회, 국가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매우 유용한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우리는 모두 연대 연합해야 생존할 수 있는 네트워크 인간들

남북의 적대적 공존에 더해 남한 내 보수-진보의 적대적 공존이라는 이중의 굴레 아래 한국의 노동운동은 연대와 연합을 모색하지 않으면 고립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세 중소자본가를 비롯해서 자영업자와 농민 등 다양한 계급과 계층이 중첩되어 있고, 노동자 내부도 다종다양하게 나뉘어 저마다 서로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본도 국내자본만 상대해야 하는 게 아닙니다. 미국의 군산복합체와 금융자본가들을 비롯한 국제 투기자본의 엄중한 착취망이 교차해 촘촘하게 한국 노동자들을 옥죄고 있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과연 한국 노동운동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연대와 연합 운동을 통한 노동자 해방과 자유를 추구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연대 연합이란 그저 나 또는 우리 조직을 중심에 놓고 나 또는 우리 조직의 이해관계를 위해 다른 사람이나 조직을 끌어들이는 이른바 포섭과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상대방을 상호 동등한 ‘다른 나’, ‘다른 우리’로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으면 연대와 연합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특히 한국에서 연대와 연합은 민주주의 그 자체나 다름없습니다.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인 다른 주권자의 견해와 주장에 대한 인정과 경청이야말로 연대와 연합의 핵심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나치의 망령이 어른거리는 이른바 팬덤정치의 '개딸'이나 '태극기'가 정말로 한국의 헌법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행동에 나선 부대들인지 의심스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이 민주주의자들이라면 '개딸'은 '태극기'를 '태극기'는 '개딸'을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라 한국의 헌법과 민주주의를 지키는 동반자로 상호 존중해야 합니다.

새로운 권력 카르텔 대신 새로운 체제를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일부터 9월 8일 미군이 진주하고 9월 9일 광화문 총독부 청사에 미군 성조기가 게양되기까지 26일 동안 조선반도는 사실상 총독부 권력이 무력화된 '공백' 기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권력의 공백 기간이란 앞으로 어떤 체제와 질서 또는 권력이 형성될지 결정되는 모색과 탐색의 시공간이자 매 순간순간이 미래를 결정하는 결단의 선택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미군이 진주하기 직전인 9월 6일 당시 조선 인민들 대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던 조선공산당과 박헌영은 여운형을 앞세워 인민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헌법도 제정하지 않고 몇백 명이 모여 국가를 만들다니, 그야말로 뜬금없고 어리석고 심하게 말하면 웃기는 해프닝이었습니다.

이 때 조선반도 대부분의 시군에서는 주민들의 전폭 지지 아래 식민지 민족해방투쟁에 앞장섰던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의 인민위원회가 결성돼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인민위원회는 일제가 물러난 공백 기간의 치안유지와 행정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식민시 시대 신간회에서 이미 그 위력과 효과가 입증된 좌우합작의 연대와 연합은 이 시점부터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시되던 친일 세력 청산도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미군정은 오히려 친일세력을 부활시켰습니다. 그리고 한때 미군정도 지원했던 김구와 김규식의 좌우합작 운동도 결국 실패하고 조선은 전쟁으로 치달아갔습니다.

조선과 비슷한 처지였던 오스트리아가 반나치 투쟁에 앞장섰던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끈질긴 협상과 대화를 통해 좌우합작의 연대연합을 성공시켜 연합국의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고 영세중립국으로서 동서 냉전의 틈바구니에서도 번영을 구가한 사실과 너무도 선명하게 비교가 됩니다.(황의서, <좌우합작의 실패와 성공: 한국과 오스트리아의 사례>, <윤리연구> 59, 2005.)

19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노태우의 6.29선언이 나왔습니다. 이에 따라 10월 12일 직선제 개헌이 통과되고 12월 16일 대선이 치러졌습니다. 이 때 5개월 반의 기간도 사실상 권력의 공백 기간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널리 알져져 있듯이 당시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선봉에 섰던 정당 지도자 김대중과 김영삼은 연대와 연합을 외면하고 각자도생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6월항쟁의 승리로 가장 큰 반독재 사회운동 세력이었던 학생운동과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도 이른바 비판적지지, 후보단일화, 독자후보 등으로 갈라져 현실 정당정치에 줄서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기득권 독재 세력의 뿌리를 잘라낼 절호의 기회는 그렇게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기득권 독재세력은 쿠데타가 아니라 선거를 통해 다시 부활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2016년 시작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 ⓒ프레시안

죽 쒀서 개 준 촛불혁명

2016/2017년 겨울의 촛불항쟁으로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 여야 의원 234명의 찬성으로 탄핵이 가결되었습니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 탄핵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5월 9일 대선이 치러졌습니다. 234명의 여야 연대로 탄핵이 가결되고 대선이 치러지기까지 5개월의 기간도 사실상 권력의 공백 기간이었습니다.

3.5%의 대한민국 주권자가 광장에 모여 가장 크게 부르짖었던 구호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외침이었습니다.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가치였습니다. 당연히 촛불 시위를 혁명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핵심 과제는 헌법과 법률을 주권자가 제개정할 수 있는 국민발의권을 포함해서 국민주권이 실현되는 개헌을 통해 7공화국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새누리당 의원을 포함해서 탄핵에 찬성했던 국회의원 234명이 연대연합하면 가능하고도 남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치는 곧바로 정당간의 권력 쟁투 무대인 선거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습니다. 촛불을 주도한 인민들과 사회운동 세력 또한 국민주권 실현의 연대연합 전략에 대해서는 청사진도 없었고 준비도 없었습니다. 3.5% 주권자들이 거리로 나서서 권력을 무너뜨리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기득권 엘리트들에게 권력을 되돌려주는, 이른바 죽 쒀서 개 주는 일이 되풀이 되고 만 것입니다. 국민주권 실현의 7공화국을 준비하는 도원결의와 연대연합의 기초 결사체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4~5년마다의 권력 공백 기간, 준비가 있어야

대의정 체제 아래에서 우리는 4~5년마다 한 번씩 몇 달 간 사실상의 권력 공백기간을 맞이합니다. 검찰과 경찰 등 기존의 행정 권력이 여전히 힘을 행사하긴 하지만, 선거 이후의 체제와 질서, 권력 재편에 좌고우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때야말로 사회운동 세력이 쪽수의 힘과 연대연합 전략으로 기존 체제를 허물고 현상 타파를 꾀할 수 있는 절호의 정치투쟁 시기입니다. 물론 4~5년간의 끈질긴 준비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한국 노동운동이 어떻게 하면 이런 도원결의와 결사를 통해 자본의 독재 체제를 밑에서부터 허물 수 있을까. 그리하여 노동자들과 인민을 해방된 자유인으로 변화시켜 체제 바깥의 세상으로 나오게 할 수 있을까. 어디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끝.

(이 글은 한국ILO협회의 <국제노동> 255호[2023년 여름호]에 발표한 것을 수정 보완했음을 밝힙니다.)

* 이 글은 웹진 <나비>의 '기후@나비'에 동시 게재됩니다.(☞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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