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시대, 생명정치를 열자

[복지국가SOCIETY] '생명정치'와 정치의 전환

한 여름 땡볕 아래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동료 교사들의 눈물이 아프다. 아들과 가족을 잃고 통곡하는 기후재난의 현장이 고통스럽다. 정치문제 이전, 기후문제 이전 우리의 신체가 반응한다. '나'의 몸이 신음한다. 지금은 비상시국이다. 정치적 비상시국 이전에, 생명의 비상시국이다.

'생명' 비상시국

이때 생명이란 무엇보다 '살아있는 몸-마음'이다. 지금 여기 우리의 몸-마음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한계상황에 이르렀다. 우리는 오늘의 현실을 우울감으로, 좌절감으로, 열패감으로, 허기로 체험한다.

생명의 문제감각은 '저쪽'이 아니라 '이쪽'에 있다. '나'로부터 출발한다. 이때 나는 초월적 주체로서의 '자아'가 아니다. '나'로 지칭된 생물학적이고 심리적이면서 또한 사회적인 것의 복합체로서의 인간이다. 이때의 '나'는 무엇보다 살아나고 살아가고 사라지는 '생명의 나'이다. '살아있는 몸-마음'이다. 배고프고,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고, 소멸의 공포를 느끼는 '생명의 나'이다. 기쁨을 나누고 마음을 열고 환대하며, 또한 환희하고 열반하는 '생명의 나'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욕망하고, 포기하고, 또한 저항하는 '생명의 나'이기도 하다.

'생명의 나'를 자각하고 나면 외부가 다르게 느껴진다. '생명의 나'의 외부는 물질세계이기도 하고, 사회세계이기도 하고, 생태계이기도 하지만, 이제 세계는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세계’로 경험된다. 외부는 타자(他者)가 아니라 타아(他我)가 된다. 그/그들은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아니라, 마음을 지닌 또 다른 '생명의 나'가 된다. 고양이의 눈빛이 정겹고, 먼지로 뒤덮인 길가의 화초들이 애처롭다. (감정이입만이 아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웃들과 회사의 동료들이 사회적 역할이나 직책이 아닌 살아있는 생명으로 경험된다. 그의 희로애락의 감정적 변화가 예사롭지 않고, 상처받기 쉽고 늙어가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요컨대, 사회적인 것 아래,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가는 생명세계의 실존이 체험된다.

그렇다.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오늘날 가장 절박한 문제는 생명 문제다. 팬데믹과 기후변화 등으로 인한 생태적 재난은 객관적인 사실에 머물지 않는다. 이미 ‘생명’의 문제가 되었다. 이제 생태문제는 인간을 비롯한 생명공동체(공생체)의 절멸과 죽임과 고통의 문제이다. 그리고 죽임과 고통의 현실은 두려움과 우울의 정동(情動)을 격발한다. 어떤 이는 그것을 '파국시대의 정동'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세계를 대전환기라고 말하는 것은 기존의 질서와 체계(시스템)가 생명의 지속과 번영을 지지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자원수탈 및 생산력의 무한성장에 기반한 기존의 경제시스템은 제로성장과 저성장으로 이미 한계를 드러냈고, 대의민주주의에 기반한 정치시스템도 ‘진영화’된 이해집단과 생명-생태문제 등에 효과적으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 무한 경쟁과 무한 능력주의의 직업시스템과 교육시스템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한 근대적 의미세계 전체가 시스템 종식의 위기에 처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른바 근대문명의 종말이 그것이다. 그리고 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나타내는 한국사회는 근대문명의 반생명성과 시스템적 한계의 치명적인 증거가 되고 있다.

정치의 최종심급은 '생명의 몸-마음'이다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우리는 정치공동체 이전에 생명공동체 안에서 살고 있다. 우리에게 정치의 최종심급은 생명이다. 아파하고, 슬퍼하고, 외로워하는 몸-마음이다. 비상품적 인간관계에 허기지고, 공생체(共生體)를 열망하는 살아있는 몸-마음이다. 정치의 최종심급은 우리가 가끔 영성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아름답고도 거룩한 생명의 마음이다.

그런데 생명정치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전에, 먼저 생명과 권력의 관계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이 요구된다. 요점은 이렇다. (일반적인 생명권력이론과 다르게) 생명사상의 관점에서는 권력이 (인간)생명을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생명 스스로 자신을 길들인다는 것이다. 고양이와 같은 반려동물들이 그렇듯이 생명의 훈육은 항상 자기훈육이고, 그것은 생존의 기술인 것이다. 타자복종이 아니라, 자기복종인 것이다. (자율이라고 말해도 좋다.) 복종함으로써 사회적으로 더 잘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 여기서 복종은 인격적 복종이 아니라, 결정에의 복종이다. 코로나 백신도 그렇고, 학교도 그렇고, 주민등록도 그렇다.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국가가 생명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명이 사회적 층위에서 국가를 생성해낸 것이다. 그러나 권력이 생명을 과도하게 길들이려 한다면 저항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권력이 생명을 대상화할 때, 생명은 레지스탕스가 된다."(들뢰즈) 기존의 시스템을 전북하고, 또 다른 자기복종 형식을 발명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모든 정치는 생명정치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다양한 정치적 코드로 표현된다. '경제성장/경제침체'라는 코드, '민주/반민주'라는 코드, '정의/부정의'라는 코드가 그것들이다.

생명정치는 경제성장 정치, 부국강병 정치와 다른 길을 지향한다. 한국경제를 비롯한 자본주의 선진국은 이미 포스트 성장시대에 진입했다. 저성장, 제로성장을 피할 수 없다. 억지 경제성장 드라이브는 지금까지의 성과마저도 무너뜨릴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극단화되는 부국강병의 정치를 목격하고 있다. 한계상황의 돌파구를 기대하고 있겠지만,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그 결과는 전쟁과 파멸일 수밖에 없다.

생명정치는 무엇보다 이념정치와 구별된다. 부연하면, (좌파든 우파든) 정치적 올바름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도덕(선악)정치, 진리정치와 대별(大別)된다. 이념정치, 도덕정치, 진리정치의 입장에서는 자신은 옳고 상대방은 틀렸기 때문에, 상대방의 청산과 척결을 정치의 목표로 삼게 된다. 생명정치는 (적폐)청산정치와 (좌파)척결정치와 같은 배타적 진리정치에 동의할 수 없다. 이들은 국민의 적대감을 양산하면서 자신을 확대 재생산한다. 특히, 한국 진보의 경우, 진리정치 과잉이 역설적으로 진리정치의 이른 종말을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그런 맥락에서 오늘날 목격되는 가짜/진짜 정쟁은 진리정치가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징후로 읽힌다.)

또한, 생명정치는 환경정치 및 생태정치와 비교될 수 있다. 환경정치와 생태정치가 인간과 사회의 조건으로써 객관적 생태계에 주목한다면, 생명정치는 인간생명을 비롯한 생명의 내면과 마음의 흐름에 주목한다. 예컨대, 기후변화는 인류의 종말을 위협하는 생태학적 사실이 분명하지만, 그에 대한 대응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기후우울이 시사하듯은 기후문제는 이미 생명의 마음의 문제이다.

이런 맥락에서 생명정치는 기존의 구별 도식을 뛰어넘는 도약적 차원변화를 기대한다. 초월적 돌파를 고대한다. 생명운동의 핵심 논리 중 하나인 이변비중(離邊非中)의 차원변화가 그것이다. 이변비중은 원효의 말로, 직역하면 "양 끝을 떠나되 중간도 아니다"라는 뜻이다. 핵심은 중간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중간(中間)과 중도(中道)는 구별되어야 한다. 진보/보수의 중간, 좌/우의 중간이 아니라, 좌/우, 진보/보수의 구도 자체를 점프해 새로운 구도를 발명해야 하는 것이다.

구공존이(求空存異), 생명정치의 원리

생명정치의 원리는 구공존이(求空存異)다. 그것은 구동존이(求同存異)와 구별된다. 구공존이의 관점에서는 세계의 원초적 공허함이 강조된다. 진영들의 척도는 일시적이고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공(空)을 구하고 차이(異)를 인정한다는 것은 현재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차이의 생성 가능성을 의미한다. 공허의 지대는 비구별의 상태로 생기(生氣)적 사건의 장이며 정동적 사건의 장이다. 생성과 창조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공을 구하되 차이를 생산하지 않으면 생명체는 살 수가 없고, 사회는 자기생산을 할 수 없다. 구별하고 비교하지 않으면 문명사회는 불가능하다.

구공존이를 생명정치에 적용하면, 두 가지 측면이 강조된다. 하나는 무지(無知)의 정치다. 이를테면, 확실성의 정치에서 무지의 정치로서의 전환이다. 이때 무지란, 물론 무지의 지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맹점의 자각이다. 볼 수 없다는 것을 볼 수 없는 삶-사회의 조건에 대한 깨달음이다. 진영 역시 마찬가지이다. 진영의 맹점을 인정하면서, 연찬(硏鑽)과 향연(饗宴)을 통해 풍요로운 협력/경합의 세계로 가자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도 접근할 수 있다. 생명정치의 관점에서는 후쿠시마 오염수의 방류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 잘 모르기 때문이다. 문제가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 아니라, 문제가 없음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전 지구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지질학적 훼손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본 어민들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당신들은 바다를 모른다." (이는 기후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무지의 기후-생태학'이 요구된다.)

그러나 구공존이의 공은 인지적인 것에 머물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것은 존재론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궁한 잠재력으로서의 공(空)의 역능에 유의한다. 공의 생성능력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완화시킨다. '공'이라는 미지의 지대이자 비구별의 지대는 허무의 끝이 아니라, 풍요의 원천이다. 영점장(零點場)과 같은 무한에너지의 현장인 것이다.

구공존이의 존이(存異)는 다(多)맥락적 사회, 다(多)세계적 세계를 의미한다. 정치적으로 말하면, 다진영적 정치, 다당제적 정치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예컨대, 생명정치는 생명문제에 관해서는 나름대로 알고 있지만, 디지털기술 문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해법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존이는 타자로 인식된 진영들과의 협력을 강제한다.

구공존이의 생명명치는 두 가지 차원에서 정치의 전환을 실험할 수 있다. 정치체계를 포함해 사회적 체계의 핵심이 소통(communication)이라는 전제하에서, 첫째, 정치적 소통의 주제를 투기 경제에서 삶-생명으로 전환하는 것, 둘째, 정치적 소통의 방법을 이성적 판단에서 생명의 마음으로 전환하는 것이 그것이다.

커먼즈 라이선스.

정치적 소통 주제의 전환: 투기경제에서 삶-생명으로

지금까지의 정치적 소통의 핵심 주제는 경제였다. 정확히 말하면, (살림살이경제와 구별되는) 투기경제, 혹은 부자되기경제였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경제적 자본으로써 '능력'이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에게 그것은 삶-생명을 갈아 넣어야만 가능한 악마적 거래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생명의 관점에서, 이제 우리의 정치적 소통의 주제는 주식이나 부동산, 코인이 아니다. 투기 능력이 아니다. 삶-생명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고, '생명으로서의 나'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때 삶이란, 더 나은 삶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이다. 지난 생애의 삶이 투기적 삶이었다면, 이번 생애는 아름다운 삶, 건강한 삶, 멋진 삶이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 정치적 소통 주제가 된다. 자신의 환상을 어떻게 현실로 만들 것인가?, 노년의 자신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 영국 정부에 있다는 '외로움 장관'만이 아니다. 저녁이 있는 삶 장관, 존엄한 죽음 장관, 꿈을 또 하나의 현실로 만들어주는 장관을 둘 수도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영역으로 자유경쟁에 방치되는 편의점을 호혜적 시장경제의 생활-거점으로 지원하고, 생물지역주의(bio-regionalism)에 기반한 공생체(共生體)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또 다른 지방세계의 탄생을 돕는 지방소멸/지방재생 프로젝트를 만들 수도 있다. 생기있는 도시공간 만들기, 15분 도시, 스마트폰 프리의 날, 사회적 깨달음 학교, (직업학교가 아닌) 생업학교를 설치할 수도 있다.

김대중 전(前) 대통령이 이야기했다는 정치는 생물이란 말이 떠오른다. 이때 생물은 예측할 수 없는 정치적 변화무쌍함을 가리키고 있지만, 생명 정치의 주제는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하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생태정치: 기후변화, 생물종 절멸 등 생태적 문제들에 대처하는 정치

-생활정치: 식의주학(食醫住學) 등 생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치. 예컨대,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핵심인 주택문제의 경우 주택 사회주의에 버금가는 파격적인 정책을 펼 수도 있을 것이다.

-생업정치: 직업이 아닌 생업(生業). 일자리에 대한 다른 접근.

-돌봄정치: 요양원 수용의 공포에서 자유로운 돌봄체계

-모성청치: 탄생과 양육의 어머니 마음의 정치

-존엄정치: 존엄하고도 평온한, 아름다운 죽음의 조건을 만드는 정치

-재난정치: 기후재난시대의 생명선(life line)을 예비하는 정치

-풍류정치: 생명친화적이면서 미학적인, 우리 전통문화의 흥과 멋을 살린 정치.

-사물정치: 사물들의 의회와 코스모폴리틱스(라투르), 경물사상(최시형)과 인물균론(人物均論)(홍대용)의 제도화.

-마음정치: 심금을 울리는 정치, 생명의 마음과 감응하는 정치

-해방정치: 억눌린 생명들의 자기해방을 돕는 정치

-공성(空性)정치/영성(靈性)정치: 숭고지향을 드높이는 정치. 구공존이(求空存異)의 정치

-등등

그 외에도 생명정치의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하다. 생명정치는 개인의 욕구를 탐욕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생명정치는 (기업과 국가의 약탈적 자원사용을 외면한 채) 생태문제를 개인과 가정에 전가하는 개인컵 사용 캠페인에 유의한다. 생명정치는 산업문명과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이분법적 사고 등 개인의 성찰로 환원하지 않는다. 생명정치는 화폐 만능으로 귀결될 개연성이 큰 기본소득에 찬성하지 않는다. 생활주택, 생활임금 등 생활보장을 적극 검토한다. 생명정치는 이념적 성격이 강한 탈성장 체제전환론, 혹은 기후정의론보다, 포스트 성장시대에 걸맞은 다양하고 새로운 경제사회 시스템을 지금여기서 실험하도록 지원한다. 생명정치는 성적(性的) 미결정성과 자기선택을 존중한다. 등등.

그리고 또 한 가지, 생명정치는 공간정치와 비교되는 시간정치를 강조한다. 살아있는 것은 무엇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있다. 생명정치는 공간보다 시간에 주목한다. 근대 산업문명에서 공간은 무엇보다 채굴과 개발의 대상이었다. 생명정치는 생장소멸하고 생로병사하는 우리의 실존적 생애주기와 생태계의 생명시간에 유의한다. 진보/보수의 선형적 시간과 구별되는 확산적 회귀의 시간을 탐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작에서 종말을 향해 가는 시종(始終)의 시간과 구별되는, 종말에서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하는 종시(終始)의 시간에 주목한다. 다시개벽의 시간에 주목한다.

생명정치는 제국 일본이 아니라, 잃어버린 30년의 일본에 주목한다.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일본은 실패한 국가일지는 모르지만, 실패한 사회만은 아니다. 재난시대의 라이프 라인(life line)을 제도화하는 일본. 재난 경험을 통해 이념 과잉과 의미 과잉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일본(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참조). 탈이념과 탈의미화 속에서 동시에 허무주의를 경계하는 일본. 신체와 정동을 새로운 삶의 준거점으로 제시하는 일본. 재난 이후 폐허 위에서 새로운 삶의 형식을 실험하는 일본사회에 주목한다.

그리고 생명경제가 있다. 생태경제만이 아니다. 30여전 년 접했던 일본의 지역자립의 경제학과 생명의 경제론이 떠오른다(<공생의 사회 생명의 경제>). 19세기 유럽에 사회사상가 존 러스킨의 생명경제론이 있었고, 21세기에는 자크 아탈리의 <생명경제로의 전환>이 있다. 그리고 심지어 전북특별자치도는 이른바 생명경제를 비전으로 제시한다(구체적인 프로그램에는 의문이 있다. 예리한 관찰이 요구된다.).

정치적 소통 방법의 전환: 시비를 기리는 정치에서 심금을 울리는 정치로

'심금(心琴)을 울린다'라는 말이 있다. 이때 심금은 "외부의 자극을 받아 미묘하게 움직이는 마음"이다. 생명정치가 생명의 마음의 정치라면, 다시 말하면 심금을 울리는 정치 아닐까.

그러나 정치의 최종심급은 생명의 마음이지만, 정치엔 정치 나름의 문법과 작동원리가 있다. 정치와 마음은 정치/마음의 형식으로 연동되고 있지만, 마음을 정치체계로 직접 배달할 수는 없다. 정치와 마음 사이에는 경계가 있다. 유권자의 마음은 (여론조사와) 투표를 통해서만 정치화될 수 있다. 정치적 메커니즘을 통해 번역되고, 정치적 문법으로만 작동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민주/반민주나 국가/반국가라는 정치적 코드는 사람들 마음에 직통(直通)할 수 없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 경험과 몸 상태에 따라 다르게 반응한다. 대부분의 경우, 이미 반응하도록 준비되어 있다.

거꾸로 열망과 염원의 마음 역시 정치적 코드화되어야 한다. (이때 코드화는 잠정적이다. 그러므로 시간이 흐르면서 해체될 수밖에 없다.) 정치적 성공은 정치적 코드화를 필수적인 조건으로 한다. 대표적인 것이 민주/반민주 코드이다. 생명의 관점에서 민주화운동은 무엇보다 생명을 능욕하고 파괴하는 권력에 대한 생명의 저항이었다. 그러나 저항의 정치적 형식은 민주/반민주의 민주화투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민주적인 것과 반민주적인 것의 다양한 기준, 조건, 사례가 만들어지면서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장착된다. 정강정책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생명정치는 정강정책으로부터 시작될 수 없다.) 이제 코드는 서사와 연결된다. 그리하여, 민주주의의 신화가 만들어지고, 1987년 6월 극적인 민주항쟁의 승리로 귀결된다.

생명정치의 코드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생명/반생명이다. 그러나 생명정치적 사건은 코드만으로 촉발되지 않는다. 코드를 감싸고 있는, 코드에 들러붙어 있는 정동, 감응, 유령, 귀신으로 이름붙여진, 다시 말하면 신령한 힘에 의해 격발된다. 생명정치의 본령은 여기에 있다. 심금을 울려야 하는 것이다. 심금을 우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개인의 심금을 울리는 방법과 집단의 심금을 울리는 방법이 그것이다. 이때 집단이란 생명세계 전체를 가리킨다. 예컨대, 큐피드의 화살과 만파식적의 피리소리가 그것이다. 이것들로부터 생명정치의 원형적 기예(技藝)를 배운다. (기존 정당들 역시 이미 생명정치, 정동정치의 기술을 구사해왔다. 경조사를 챙기며 슬픔과 기쁨을 같이하고, 식사자리와 술자리를 통해 가족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해 관계를 확인한다. 그리고 대규모 정치집회에 관광버스를 동원해 스킨십을 넓히고 정동적 감응을 강제한다.)

큐피드의 화살 되기: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큐피드의 화살의 타깃은 그/그녀의 심장이다. 두뇌가 아니다. 사랑은 생각을 통해 격발되지 않는다. 사랑의 마음 역시 원천적으로 신체적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동시에 형태가 없는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정동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큐피드의 화살은 정(情)이 들고 정(情)이 쌓이는 마음을 조준한다. 그리고 거기에 정치적 판단이 연결되면서 감정이 격발된다. 그간 정치적 사건으로서 화살쏘기는 늘상 있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진보파의 화살은 주로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이념, 가치, 의미, 정책과 같은 이성적인 것들이었다. 특히 정치적 올바름의 화살을 쏘았고, 어느 정도 성공한 듯 보인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이념을 살짝 걷어내면, 그때의 화살 역시,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국민들의 가슴을 격발한 것으로 보인다. 신체적 억압, 억눌린 마음과 자유의 염원이 폭발된 것이다.

만파식적(萬波息笛) 되기: 만파식적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의 영험한 피리로써, 직역하면 '일 만개의 파도를 쉬게 하는 피리'이다. 큐피드의 화살쏘기가 호감이든 비호감이든 직접적인 개인의 감정의 격발을 목표로 한 것이라면, 만파식적의 소리는 비-개체적이고 비-가시적으로 세상 전체를 조율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만파식적은 소리의 힘으로 질병을 물리칠 수도 있고, 전쟁을 막을 수도 있다. 산천초목을 편안케 할 수도 있다. 특히 만파식적은 듣지 못한 이들에게도 감응되는 우주적 울림이다. 그리고, 만파식적의 영험한 소리는 아름답고 담대한 이야기와 연결된다. 만파식적은 기후재난과 팬데믹 시대, 전 지구적 생명공동체를 평안케 하는 지구적 생명정치의 기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큐피드의 화살이 개인의 마음을 향한다면, 만파식적의 피리소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 생명과 생명 사이에서 공명한다. 큐피드의 화살이 감성정치라면, 만파식적은 이를테면, 신명정치다. 영성정치다. 신명정치는 이를테면 특정한 감정을 격발하기보다 공(空)의 에너지가 촉발되기를 기대한다. 기존의 도식과 구별과 프레임을 해체하는 초월적 돌파의 에너지를 소망한다.

생명정치란 이를테면, 큐피드의 화살의 정치이며, 만파식적의 정치이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화살들과 피리들이 있다. 모토, 구호, 슬로건, 몸짓, 심벌, 아이콘, 이미지, 그림, 노래, 의례 등등이 그것들이다. 이것들은 모두 유권자의 마음을 향한다. 한 번이 아니다. 수없는 화살이 반복적으로 날아가고, 그것은 친근한 이야기로, 담대한 서사로, 대서사시(詩)로 종합된다. 큐피드의 화살이나 만파식적도 하나의 이야기거니와, 산업화와 민주화 역시 하나의 서사였던 것이다.

생명정치, 2024년 총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사건의 과정에서 생명정치의 무리(黨)가 형성된다. 150여년 전 수십년 간의 개접/파접(開接/罷接)의 감응체험과 수많은 조직사건 등을 통해 형성된 동학의 무리(東學黨)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무리와 주체는 구별된다. '주체'가 영속적이고 초월적이라면, '무리'는 일시적이고 경험적이다. 반복적이고 재귀적인 무리 경험이 또 다른 무리를 형성한다.

그리고 무리는 세력이 된다. 생명정치 세력 역시 깊은 산속에 숨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날 수 없다. 한 번의 사건 만들기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무리가 형성되고, 생명정치 사건이 거듭되면서 세력은 확대 강화된다. 다시 말하면, 사건을 통해 출현하고 반복을 통해 구성된다. 노동자계급이 노동투쟁을 통해 형성되고, 태극기부대가 태극기시위를 통해서 형성되듯이. 생명평화 탁발순례 5년을 통해 생명평화결사가 만들어지고, 생명평화 진영이 생겨났듯이. 그렇다면, 또 다른 사회적 무리와 세력으로 거듭난 '새로운 우리'를 우리는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2024년 총선은 하나의 기회이다. 한국정치가 추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정치가 노동정치, 젠더정치, 생태정치처럼 정치적 시민권을 얻게 될 수도 있고, 혹 '초월적 돌파'의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 '삶-생명이냐, 아니냐?'의 새로운 정치적 구도, 새로운 정치적 진영이 형성될 수도 있다. 정치적 전환 가능성은 역설적으로 한계상황의 강도(强度)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다시 물어야 한다. "한국정치는 바닥을 찍었는가?" "바닥을 뚫고 올라올 힘이 있는가?"

그렇게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추락을 떠받치고 있는 낡은, 그러나 단단한 기둥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단단하지만 낡은 기둥일 수도 있다. 그런데, 결정적인 것은 아직은 가시화되지 않은, 새로운 무리와 세력의 부재이다. '숲의 천이(遷移)'에서 볼 수 있듯이, 전환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떡갈나무의 발아와 성장과 확산만이 숲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다(多)세계적 세계관으로 볼 때, 전환이란 단일한 세계의 변혁이 아니다. 또 다른 세계의 태동을 통해 세계들을 재배치하는 일이다. 세계가 세계들이고 사회가 사회들이라면, 새로운 사회의 태동을 통하지 않고서는 전체사회의 배치를 재배치할 수 없다. 더 많은 민주주의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협력/경합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제도의 발명이 요구되는 것이다. 새로운 정치적 이념, 새로운 정치의 주제와 방법이 요구된다. 우리에게 그 이름은 생명정치이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정치적 변이의 태동과 전염과 확산을 격발할 정동정치적 사건의 현장이다. 정동정치적 축제들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발발은 그 1년 전 보은취회에서의 수만명 동학당들의 공생체(共生體) 식사와 시천주(侍天主) 주문과 풍물굿으로 고양된 정동적 힘, 공명의 힘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올가을, 수많은 큐피드의 화살들과 만파식적들이 공명하는, 전라도 고부 들녘에서의 '생명정치 페스티벌'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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