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의 성희롱에 못견뎌 퇴사하니 '업무방해' 고소가 시작됐다

한국여성노동자회, 2022년 직장 내 괴롭힘 상담 결과 발표

직장인 A 씨는 회사 사장으로부터 "네가 여자로 보인다"는 등의 성희롱 발언을 듣고 퇴사했다. 직장 내 성폭력을 피하기 위한 결단이었지만, 괴롭힘은 이후로도 이어졌다. 사장은 '직장을 임의로 그만둔 것은 업무방해'라는 명목으로 A 씨를 경찰에 고소했다. 이어 부정수급을 명목으로 A 씨를 노동청에 신고하기도 했다.

직장인 B 씨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B 씨는 A 씨의 경우처럼 사장의 성희롱을 견디지 못해 퇴직했는데, 사장은 B 씨의 퇴직 직후 B 씨 근무 당시 사장 본인이 직접 결재한 서류를 가지고 '공금횡령이 있었다'라며 B 씨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직장 내 성폭력에 대한 대처 방법을 찾지 못해 퇴사를 결심한 A 씨와 B 씨는, 이후 이어진 보복성 괴롭힘에도 마땅한 대처 방법을 찾지 못했다.

성폭력, 업무차별 등 여성노동자들을 향한 직장 내 괴롭힘이 증가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들을 향한 괴롭힘은 지난 2017년 이래로 꾸준히 늘어온 것으로 나타났다. 외모비하, 성희롱 등 언어폭력에서부터 성차별적 업무 배치, 업무상의 괴롭힘까지 괴롭힘의 양상은 다양했다.

한국여성노동자회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2022년 평등의 전화 직장 내 괴롭힘 상담사례 분석결과'를 12일 발표했다. 전국 11개 지역에 설치된 여성노동전문상담소 ‘평등의 전화’에 지난 한 해 동안 접수된 3714건의 상담 건 중 직장 내 괴롭힘 사례는 370건(9.9%)에 달했다. 특히 전체 상담유형에서 직장 내 괴롭힘 사례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7년(3.3%) 이래로 2018년 3.6%(108건), 2019년 5.5%(196건), 2020년 7.7%(271건), 2021년 10.3%(350건) 등 꾸준한 증가추세를 보였다.

폭언·폭행, 성희롱, 성역할 강요까지 … "노동기본권 취약성이 본질"

'일터의 약자' 계층인 여성노동자들은 비정규직, 저임금 노동자 등과 함께 직장 내 괴롭힘의 주요 피해계층 중 하나로 꼽혀왔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는 지난 6월 직장인 1000명 대상 설문조사 결과를 분석하며 "여성이고, 직급이 낮고, 직장 규모가 작고, 임금수준이 낮고, 고용이 불안정하고, 사무직이 아닌 일터의 약자일수록 더 심각한 괴롭힘을 경험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해당 설문조사에서 여성은 '괴롭힘을 당한 이후 직장을 떠나고 싶었다'는 응답에 있어 남성(37.2%) 응답률보다 현저히 높은 62.1%를 기록했다. 발생 빈도는 물론 사건 대처에 있어서도 이중고를 겪고 있는 셈이다.

특히 여성노동자들이 겪는 직장 내 괴롭힘에는 여성비하 발언과 행동, 고정관념적인 성역할의 강요 등 성차별적인 괴롭힘이 쉽게 포함된다. 통상적으로 생각되는 성희롱 발언을 넘어 △여성의 업무역량을 의심하거나 △여성노동자에게만 업무 내용을 보고하길 요구하거나 △여성들에 대한 반복적인 비하발언을 일삼는 등의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뜻이다. 한국여성노동자회는 12일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분석 자료에서 "직장 내 괴롭힘은 사업장 내 약자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다"라며 "특히 성차별적인 일터의 조직문화와 불안정한 고용형태 속의 여성노동자들은 성차별적 괴롭힘에 노출돼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여성노동자회의 분석결과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상담소엔 △성추행에 대한 거부가 업무상의 괴롭힘으로 이어진 경우 △업무와 관계없는 외모지적이 지속적으로 가해진 경우 △여성이라는 이유로 추가적인 업무보고를 요구하는 경우 △여성이라는 이유로 호객행위 등의 업무 외적 행위를 지시하는 경우 등 다양한 성차별 괴롭힘 사례가 접수됐다.

접수된 사례를 보면 직접적인 폭언·폭행(24.9%)보다도 폭언·폭행을 제외한 괴롭힘(68.8%)이 255건으로 많았다. 연차수당, 휴가사용, 정시퇴근, 부당행위, 업무배제 등 회사에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를 말하거나 업무 중 발생한 고충을 호소했다는 이유로 상사 혹은 대표가 괴롭히는 등 안전한 근무환경이 보장되지 않고, 위계를 이용해 괴롭히는 행위의 반복으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서 상담하는 사례들이 이에 해당됐다.

단체는 "최소의 기준인 근로기준법상의 권리조차 현장에서는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괴롭힘 사례가) 발생한다"라며 "직장 내 괴롭힘의 예방을 위해서는 기본적인 노동자들의 권리 보장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업장의 근로기준법 준수에 대한 상시 근로감독을 강화하고, 사업주 및 관리자에 대한 노동관계법 교육 의무화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괴롭힘은 대부분 직장 내 위계관계에서 발생했다. 업무상의 위력이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폭언폭행 제외 괴롭힘이 아닌 직접적인 폭언폭행 피해를 호소하는 상담자들도 대부분 상사나 사장, 법인 대표로부터 해당 피해를 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구체적인 가해자 비율로는 상사가 69.1%를, 사장과 법인대표가 15.7%를 차지했다.

여성노동자회는 "사장, 상사 등의 폭언·폭행은 괴롭힘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직을 압박하거나 부서를 이동시키고, 업무를 배제하는 등 부당행위로 이어지기도 했다"라며 "폭언, 폭행으로 퇴사를 결심하거나 이미 퇴사를 한 사례도 있었으며 피해 사실에 대해 괴롭힘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문의하는 상담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신고해도 "참아라" … 피해자는 오히려 2차 불이익 노출

상담소에 접수된 사례들 중엔 직장 내 괴롭힘 사건 발생 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문의가 특히 많았다. 현행 근로기준법 제76조의 3은 사내에서 괴롭힘 사건이 신고되거나 인지됐을 때 사건 조사 및 피해자 보호 등 사업주의 의무조치를 규정하고 있지만, 이 같은 제도가 현장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단체는 상담사례 분석 결과 "직장 내 괴롭힘을 회사에 신고했지만 아무런 조치가 없거나 증거제시를 요청받거나 증거불충분이라며 조사조차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며, 사직강요·업무배제·부서이동 등 2차 불이익이 발생한 사례도 있었다"라며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내 고충처리 시스템 △고용노동부의 사업장 관리감독 부재 등을 핵심 문제로 꼽았다.

고용노동부는 근로감독청원제도를 통해 '보복성 불이익 등으로 사업장 내의 노동법 위반 사항을 신고하기 어려운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사업장의 법 위반 사항을 관리감독하고 있지만, 실제 사업장에선 이 같은 제도가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돼왔다.

직장갑질119의 지난해 9월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기준 2740건에 달한 근로감독 신청 건수에 비해 실시 건수는 874건으로 30%가량에 불과했다. 노동법률지원단체인 해당 단체가 제보 받은 근로감독 '갑질' 사례에는 △감독관이 회사의 편을 들며 일방적인 화해를 종용한 경우 △회사가 임금대장 등 필요서류를 제출하지 않음에도 이를 문제 삼지 않은 경우 △감독관이 노동자의 근무 태도 등을 지적하며 신청인의 진정을 무시한 경우 등이 사례로 접수되기도 했다.

특히 업체 규모가 작아 대표 등 상급자의 사내 영향력이 강하고 근로기준법의 적용도 받지 않는 5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직장 내 괴롭힘 범죄의 '합법적인 사각'으로 자리하고 있다. 여성노동자회는 "5인 미만 사업장은 직장 내 괴롭힘을 인지하더라도 조사할 의무가 없고 가해자, 피해자 간 접촉이 빈번해 괴롭힘 문제가 더 심각하다"라며 "소규모 사업장일수록 사업주에 의한 괴롭힘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고 피해자가 대처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현재 고용노동부는 근로기준법상의 조치 외에도 '직장 내 괴롭힘 판단 및 예방·대응 매뉴얼'을 통해 각 사업체에 괴롭힘 대응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다만 이 같은 가이드라인은 대부분의 책임을 사업주의 자율징계에 맡겨놓고 있어 피해자 보호효과가 미미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여성노동자회는 "회사에 신고했지만 고충이 처리되지 않거나, 오히려 2차 불이익을 겪어 진정하게 되는 경우 고용노동부는 대부분 회사에 다시 조사할 것을 권고한다. 하지만 피해자는 2차 불이익의 주체인 사업주와 고충처리담당자가 공정하게 피해사실을 조사하고 피해구제를 할 것이라고 신뢰하지 않는다"라며 "사업주가 가해자가 아닌 이상 고용노동부가 가해자를 직접 처벌하지 않으며, 징계의 책임은 사업주에게 있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사업장의 규모, 근무형태, 근무조건, 업종 등에 맞게 적극적으로 취업규칙이 정비되어야만 한다"라며 "변화를 위해서는 사업장에 대한 관리·감독 책임이 있는 고용노동부가 직장 내 괴롭힘 예방을 위한 확실한 관리와 조치를 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사건 발생 시 확고한 조사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당시 서울 대학로 인근에서 ‘세계여성의날 민주노총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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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섭

몰랐던 말들을 듣고 싶어 기자가 됐습니다. 조금이라도 덜 비겁하고, 조금이라도 더 늠름한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현상을 넘어 맥락을 찾겠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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