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다수당에 맞선 '정치 9단' 룰라의 지구정치 구상

[장석준 칼럼] 브라질·콩고·인도네시아 주축 '열대우림연합'으로 남반구 연대 꾀해

룰라는 10월 30일 실시된 브라질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승리했지만, 아직 브라질 대통령은 아니다. 새해 첫날 비로소 브라질 제39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하지만 취임하기 전부터 벌써 룰라는 세계 언론의 이목을 끌었다. 11월 이집트에서 열린 UN 기후변화회의에서 가장 많은 뉴스거리를 몰고 다닌 인물은 다른 어떤 현직 대통령, 총리도 아닌 룰라 당선자였다.

이 자리에서 룰라는 브라질, 인도네시아, 콩고를 주축으로 한 열대우림연합을 결성하겠다는 비전을 다시 한 번 천명했다. 브라질을 비롯한 이 세 나라에는 '지구의 허파'라 불리는 거대 열대 우림이 있다. 룰라는 기후재앙을 막기 위해 세 나라가 열대 우림 파괴를 막는 데 앞장서는 대신 미국 등 북반구 국가들이 그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미 선거운동 중에 내세운 공약이었지만, 당선되고 나서 재확인하니 새삼 세계인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룰라의 구상대로 열대우림연합이 결성된다면, 그 협상력은 가히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견줄만할 것이다. 아니, 기후위기 시대에 OPEC이 지는 해라면, 열대우림연합은 그 자리를 대신할 남반구 내 주도 세력이 될 것이다.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룰라는 지구정치를 뒤흔들고 있다.

미-중 대립 시대에 제3의 흐름을 만들겠다는 룰라식 지구정치

룰라 당선 직후에 쓴 칼럼(☞관련기사 : "룰라의 승리 앞에 닥친 더 큰 난관…'유사 파시스트'의 준동")에서 나는 차기 룰라 정부가 얼마나 녹록지 않은 조건에서 임기를 시작해야 하는지 강조했다. 여당 노동자당은 상원, 하원 모두에서 소수당이고, 게다가 하원의 최대 다수당은 전 대통령 자이르 보우소나루가 속한 극우 성향의 자유당이다.

정치권 바깥도 조건은 좋지 못하다. 2010년대 내내 룰라와 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 노동자당을 '부패' 세력으로 몰며 극우 포퓰리즘을 지지해온 중산층 시위대는 여전히 거리에서 노란색 축구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국기를 흔들며 새 정부를 반대하는 구호를 외친다. 남부 대도시 빈민가로 파고 든 개신교 근본주의 교파들은 노동조합, 여성, 성소수자, 아마존 선주민 등에 대한 혐오를 부채질하며 극우 정당 지지를 호소한다.

이런 조건에서라면 앞으로 4년 동안 룰라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타협, 그것도 야당에 끝없이 양보하는 타협뿐인 것 같다. 가령 룰라의 핵심 공약 중 하나였던 부자 증세는 꿈도 꿀 수 없을 것이다. 하원이든 상원이든 논의도 제대로 못해보고 부결될 게 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룰라는 역시 룰라다. 과연 전 세계 공인 '정치 9단'답다. 누가 봐도 외통수에 몰린 상황에서 자꾸 나라 안만 쳐다봐서는 답이 있을 리 없다. 시작부터 상대편에게 기운 이 판에만 갇혀서는 출구를 찾을 수 없다. 이 형국에서 룰라가 찾은 해법의 실마리는 더 큰 판을 내다보는 것인 듯하다. 대결 무대를 국내가 아닌 지구정치로 넓힘으로써 외통수에서 벗어나 대국을 새로 시작하려는 것이다.

사실 룰라와 노동자당 정부는 이미 지난 두 차례 대통령 임기 동안 이 방면에서 탁월한 혜안과 실력을 보여준 바 있다. 2000년대 1, 2기 룰라 정부 시절에도 원내 의석 분포나 국내 세력 균형은 정부, 여당에 결코 유리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룰라 대통령과 셀수 아모링 외교부장관(이번에도 외교부장관을 맡을 것이 확실시된다)은 공세적인 대외 정책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라틴아메리카-카리브 국가 공동체'(CELAC)와 '남미국가연합(UNASUR)' 같은 기구를 출범시키며 중남미 국가들의 통합을 추진했다. 세계무역기구(WTO) 안에서는 남반구 국가들을 '주요 20개국 그룹(G20)'으로 단결시켜 미국 등 북반구 국가들에 대한 협상력을 제고했다. 또한 앙골라, 모잠비크 같은 아프리카 내 포르투갈어 사용국들을 시작으로 아프리카 대륙과 교류, 연계를 강화했다.

가장 야심찬 시도는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함께 브릭스(BRICS)를 결성한 것이었다. 브라질과 이 네 나라의 알파벳 첫 문자를 딴 '브릭스'는 오늘날 미국 중심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에 대항하는 남반구 주요국을 상징하는 말로 널리 퍼져 있다. 물론 여기에서 핵심 국가는 중국과 인도다. 하지만 2000년대에 이들이 한데 뭉치도록 만드는 접착제 역할을 한 것은 룰라의 브라질이었다.

실제로 룰라-호세프 정부의 브라질이라는 요소가 사라진 2010년대에 브릭스는 형해화됐다. 중국은 남반구 연대의 맏형보다는 G2 혹은 미래의 G1을 꿈꾸며 대항 제국주의(혹은 유사 제국주의) 전략을 펼치다가 오히려 고립을 자초했다. 러시아는 지역 패권국 지위를 지키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침략해 인류에게 새로운 어둠의 시대를 열어주었다. 인도는 중국, 러시아에 대한 미국, 유럽연합의 봉쇄 전략을 기회 삼아 몸값을 높이는 데만 부심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룰라의 브라질이 돌아왔다. 룰라는 당선 직후 노동조합총연맹(CUT), '땅 없는 농민들의 운동(MST)' 동지들 앞에서 한 연설에서 "미국과 중국의 이른바 신냉전을 받아들이지 않겠다. 모든 나라와 친교를 맺겠다"고 천명했다. 논평가들은 이를 브라질발 21세기 비동맹 노선의 선언으로 해석했다. 마치 미국과 소련이 맞붙던 진짜 냉전 시대에 반둥회의를 통해 시작된 비동맹운동 같은 제3의 흐름이 대두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3기 룰라 정부의 등장은 확실히 지구정치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보우소나루 정부가 제동을 걸었던 중남미 통합이 다시 속도를 낼 것이다. 무려 70여 년 전 전후 질서의 유산인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구조를 현 상황에 맞게 개혁해야 한다는 2기 룰라 정부 시절 요구도 다시 제기될 것이다.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남반구 국가 연대라는 새로운 대의와 구체적인 이해관계가 브라질 정부의 이런 노력에 전에 없던 무기가 되어줄 것이다.

무엇보다도 룰라의 브라질은 중국, 러시아의 유사 제국주의적 선택 탓에 왜곡, 교란된 남반구 국가 연대에 지적-도덕적 권위를 회복시켜줄 것이다. 3기 룰라 정부의 대외 정책이 1, 2기 시절만큼 빛을 발한다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나 대만해협 위기 등의 틈을 비집고 전 지구적 불평등 해소, 기후위기 대응, 달러 독재 극복 등의 쟁점이 국제정치의 주된 의제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다. 아마도 이른바 '신냉전'을 극복할 길은 더 많은 핵무기나 항공모함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제3의 지구정치 흐름을 만들어내는 데 있을 것이다.

▲ 브라질 대선 결선투표에서 승리한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시우바 전 대통령(가운데)이 지난 10월 30일(현지시간) 상파울루에서 축하를 받고 있다. 이날 치러진 결선투표에서 룰라 후보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현 대통령에 신승을 거뒀다. 룰라 당선인은 2003∼2010년 대통령직을 연임한 데 이어 이번에 또 당선돼 브라질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3선에 성공했다. ⓒ(상파울루 AP=연합뉴스)

그런데 한국은?

물론 섣부른 기대는 금물이다. 3기 룰라 정부는 아직 출범하기 1주일 전이다. 영어권 언론이 "새로운 비동맹 노선", "반둥의 부활" 등등 거창한 예상이나 전망을 쏟아내고 있지만, 새 브라질 정부가 실제 어떤 대외 정책을 펼칠지는 더 두고 봐야 한다.

게다가 호들갑스러운 논평들의 밑바닥에는 상당한 정도로 미국 정부의 우려와 적의가 깔려 있다는 분석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 정부는 2기 룰라 정부 시절부터 룰라의 공세적인 대외 정책을 의혹과 견제의 눈길로 바라봤다. 한때는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급진 좌파' 노선에 대비해 룰라의 '존중할만한 좌파' 노선을 띄워주기도 했지만, 룰라가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국경 문제에 개입하고 달러 패권 등을 문제 삼자 태도가 돌변했다. 3기 룰라 정부가 이런 공세적 입장을 반복할 경우에 미국 정부의 대응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논하기 전에 먼저 돌아봐야 할 게 있다. 그것은 브라질 룰라 정부의 전략적 선택이라는 거울에 비쳐본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지구정치 무대에서 브라질 정부가 선택해온 과감한 시도는 역대 한국 정부가 절대 손대지 않은 선택지다. 과거든 현재든 한국 정부에게 결코 기대할 수 없는 모습이다.

브라질은 한 대륙을 주도하는 대국이고 대한민국은 강대국들 사이에 낀 소국이기에 애초에 서로 비교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일까? 그렇지 않다. 굳이 따지면, 브라질과 한국은 지구정치 무대에서 비슷한 지위와 행위 역량을 지닌 중견국가들이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세계는 가장 활발한 제조업 수출국 세 나라가 어떤 선택을 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독일, 일본, 한국이 그 나라들이다. 사회민주당이 이끄는 현 독일 정부는 실제로 이런 관심에 부응하는 복잡한 행보를 펼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이런 관심을 받고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며 그저 미-중 대립 구도의 한 쪽에 매달려 생존 방도를 구하는 소극적 자세로 일관한다.

브라질 룰라 정부는 한 가지 사례일 뿐이며, 한국이 이를 그대로 참고하기에는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적어도 지구정치 무대에서 다자를 향해 적극적이며 다채로운 교류-연대 전략을 구사해야만 보다 좁은 범위(국내 정치 차원이든, 동북아 긴장 같은 권역 차원이든)에서 한 국가가 처한 난감한 교착 상태를 조금이나마 이완시켜갈 수 있다는 진실만큼은 만국 공통이다. 기후위기, 핵무기 확산 등의 급박한 쟁점을 통해 지구정치 무대의 잠재적 중요성이 커질수록 더욱 그러하다.

사실 윤석열 정부 시대에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허무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겠다. 이 시대에 우리가 정말 무엇에 실패하고 있는지 직시하기 위해서도 우선 'K-외교'라는 이 거대한 공백의 존재를 확인해야 하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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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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