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의 뿌리' 찾아 3만5천km 달린 정치학자의 기행

[프레시안 books] <키워드 한국 현대사 기행 1>

지난해 <프레시안>에 연재된 '손호철의 발자국'(☞연재 목록 보기)이 책으로 엮여 나왔다. <키워드 한국 현대사 기행 1>(이매진 펴냄).

제목만 보고 저명한 교수가 가볍게 풀어낸 '여행자용 현대사 꿀팁'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지난 6일 청중들과 만난 북토크 자리에 걸린 제목, '한국 좌파의 흔적을 찾아서'에 보다 솔직한 저자의 진심이 담겨있다.

스스로를 '비주류의 비주류의 비주류'로 규정하는 손 교수는 말과 글에 '좌파'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포괄적 범주인 '진보'보다 자신의 사상적 지향을 명징하게 담은 표현일 것이다.

이 '좌파'의 한국적 뿌리를 찾아 손 교수는 1년 3개월 동안 전국 방방곡곡으로 3만5000km를 달려 150곳을 탐사했다. 찾아가기 쉽거나 유명한 곳은 처음부터 솎아내고 짐을 꾸렸다고 한다.

1권은 제주를 시작으로, 호남, 영남 지역을 다니며 역사가 밟고 지나간 희생자들과 비극의 흔적들을 기록했다. 충청, 강원, 경기, 서울 지역은 곧 출간될 2권에 나누어 담을 예정이다.

사실성과 현장성을 원칙으로 삼는 손 교수가 진보적 시각에서 써내려간 역사 기행 기획은 꾸준하다. 앞서 그는 라틴아메리카 횡단기인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 아메리카를 보다>, 쿠바혁명 루트 일주기인 <카미노 데 쿠바>, 이탈리아 사상 기행기인 <물속에 쓴 이름들>, 마오쩌둥의 대장정 루트를 따라 걸은 <레드 로드>를 펴냈다.

▲ <키워드 한국 현대사 기행 1> ⓒ이매진

제주와 영호남을 무대로 근현대사를 풀어낸 1권에서 손 교수는 한국 근대 좌파의 뿌리를 동학에서 찾는다.

특히 동학혁명의 대명사로 알려진 전봉준보다 김개남의 희미한 자취를 쫒은 전북 정읍 답사가 인상적이다. 체포 이틀 만에 잔혹하게 처형돼 공초 기록조차 없는 김개남이 어찌 보면 반왕정, 반봉건 지향을 선명히 내건 진정한 동학 혁명가라는 게 손 교수의 해석이다.

또한 동학에 관한 사회적 재평가를 반기면서도, 충분한 고증 없이 웅장한 기념비와 조형물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현실에는 동학정신을 훼손하는 "역사의 토건화, 금전화"라고 일침을 놓았다.

손 교수에 따르면, 좌파의 계보는 동학 지도자 김개남에서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으로 이어진다. 전남북과 경남을 아우르는 지리산을 그는 '쫒겨난 자들의 땅', '가장 넓은 해방구'라고 표현했다.

손 교수는 '굶어죽고, 맞아죽고, 얼어죽은' 빨치산들의 자취를 쫓고, 남북에서 모두 버림받은 이현상이 사살된 장소인 '이현상 바위'를 카메라에 담아 소개하며 이렇게 기록했다.

'지리산은, 빨치산과 토벌대의 죽음과 죽임의 역사는, 우리에게 보수와 진보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영남에선 유림들이 실천한 '노블리스 오블레주'를 평가하면서도, 일제 말 무장투쟁을 추구했던 '보광당', '결심대' 등 기록조차 거의 남아있지 않은 자생적 항일투쟁 조직에 주목했다. 이들의 항일 전력이 해방 이후 남로당으로 좌파의 명맥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손 교수는 또 미군정에 저항한 10월 항쟁(1946년), 4.19 혁명보다 먼저 발생한 2.28 민주화운동(1960년)을 '한국 민주혁명의 출발'로 평가하며, 이 사건이 발생한 대구에 덧씌워진 '보수의 도시' 꼬리표를 떼어낸다.

부마항쟁이 발생한 부산과 창원(마산)에서도 저항의 역사를 끄집어내며 야성이 강했던 영남이 '보수의 성지'가 된 연원을 추적한다. 김대중·김영삼 후보 분열로 지역주의가 전면화 돼 치러진 1987년 대선이 실질적인 기점이며, 이후 영남의 야성 상실은 보수화라기보다 정치구조에서 비롯된 지역주의의 부수적 효과라는 게 정치학자로서의 시각이다.

근현대사의 복잡한 이면을 무거운 주제로 들여다본 기행이지만, 손 교수 특유의 친숙한 화법이 글에 녹아있어 책장 넘기기에 부담은 없다. 사진에도 일가견이 있는 정치학자의 유려한 해설과 함께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준 역사의 희생자들을 되돌아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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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구

2001년에 입사한 첫 직장 프레시안에 뼈를 묻는 중입니다. 국회와 청와대를 전전하며 정치팀을 주로 담당했습니다. 잠시 편집국장도 했습니다. 2015년 협동조합팀에서 일했고 현재 국제한반도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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