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은 선거 패배 충격에 휩싸인 더불어민주당이 3일 당 쇄신 방안, 임시 지도부 구성 방안 등에 대한 무제한 토론에 돌입했다. 다수 의원이 선거 직후 SNS 등을 통해 격정적으로 책임론을 쏟아낸 것과 달리, 이날 토론은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 속에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친이재명계에서는 이재명 의원 책임론이 제기되는 데 대한 불편한 반응도 나왔다.
민주당은 이날 오후 국회 본청에서 국회의원·당무위원회 연석회의를 열고 선거 패배 이후 수습 방안을 논의했다. 전날 비대위가 전원 사퇴함에 따라, 당 대표 대행을 맡은 박홍근 원내대표가 긴급하게 소집을 요구해 마련된 자리다.
대선 과정에서부터 논의 과제가 켜켜이 쌓인 만큼 이날 회의에서 하루 만에 모든 결론을 도출하지는 못했다. 다만 차기 지도부 구성 문제와 관련해선 조기 전당대회를 여는 대신 전당대회까지 임시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이는 형국이다.
오영환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회의 결과 브리핑에서 "임시비대위를 또다시 꾸려야 하는 상황"이라며 "(차기 비대위는) 전당대회를 공정하게 관리할 수 있되 지도부 구성 과정에서도 당이 철저하게 쇄신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회의의 결론이라고 전했다다.
오 대변인은 "당의 가치와 노선을 분명히 하는 동시에 국민의 마음, 민생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혁신형 비대위를 꾸리자는 결론이 있었다"며 "그 부분은 빠른 시일 내 다시 의총을 열어서 의원들의 총의를 모아나갈 예정"이라고 했다.
비대위 구성 방안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결론이 나오지 않았으나, 당 원로들이 중심을 잡고 세대별, 국회의원 선수(選數)별 및 원내외 인사를 두루 아우르는 방식으로 구성한다는 게 다수 의견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비대위원장을 내부 인사로 할 것인지에 대해선 의견이 갈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현영 당 대변인은 "오늘은 인물에 대한 논의는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날 회의에서 발언한 의원은 총 30명 안팎이었다고 오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전했다. 당초 토론이 예고되자, 당 안팎에선 온라인상에서처럼 회의에서도 계파별로 날카로운 공방이 오갈 것이란 우려가 제기됐다. 그러나 다수의 회의 참석자에 의하면, 토론은 굉장히 차분한 상태에서 질서 정연하게 이어졌다.
회의를 주재한 박 원내대표는 본격적 토론에 앞서 모두발언을 통해 "어떠한 핑계도 변명도 여지도 없다. 진심으로 죄송하다"면서 "오늘 이 자리는 국민이 내린 평가의 의미를 제대로 헤아리고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당을 만드는 첫 시작"이라고 말했다.
박 원내대표 발언 후 회의는 비공개로 전환됐고, 곧바로 자유 토론이 시작됐다. 당 관계자는 "주제 상관 없이 모든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다 해보자는 식"이라고 전했다. 이날이 첫 토론인 만큼 각론보다는 쇄신 방향과 같은 큰 틀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뤘고, 상당수가 '남 탓'보단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고 한다. "내가 먼저 물러나겠다"며 "이런 각오로 쇄신해야 한다"고 밝힌 의원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신현영 대변인은 회의가 끝난 후 기자들과 만나 "우선 지난 대선에 대한 평가가 안 이뤄진 데 대한 문제의식이 강했다"면서 "지난 5년 문재인 정부를 포함해서 이번에 철저히, 냉정히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했다.
현재 책임론 중심에 선 이재명 의원에 대한 비판적 발언도 나왔으나, 무차별적 공격을 자제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당 관계자는 "토론 초반에 격한 발언도 있긴 했지만, 그 뒤에 '그렇게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있어서 그 다음부터 비난 발언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격한 발언'을 한 회의 참석자는 2명 내외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신 대변인도 "특정 개인에 대한 책임론이나 누구를 탓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잘못한 절차와 과정을 되돌아보자거나 개인에 대한 책임보다 공천 절차·과정에 대한 문제 인식 등을 말씀해주신 부분이 많았다"고 전했다.
다만 친(親)이재명계 정성호 의원은 이날 회의 분위기에 대해 기자들과 만나 "일방적인 한 쪽의 주장만 있었다"면서 "토론을 할 분위기여야 토론을 하지 않겠느냐"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토론은 세 시간 반 가까이 이어졌다. 특정 안건 없이 자유롭게 의견이 개진된 만큼 이 자리에선 이렇다 할 결론은 나지 않았다. 참석자 가운데선 "최대한 자주 만나자", "주 1회 의원총회를 개최하자"는 요구가 나왔다. 더 많은 대화와 토론을 거쳐야만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쇄신 방안을 도출할 수 있다는 얘기다.
다만 전당대회 개최 문제와 관련해선 일각에서 제기된 '조기 전대' 방안은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다수의 공감을 얻었다. 앞서 이날 오전 박 원내대표와 4선 이상 중진 의원들 간의 간담회에서도 동일한 의견이 나왔다고 참석자들이 밝혔다.
오전 간담회에 참석했던 홍영표 의원은 기자들과 만나 "시간이 충분하지 않으니깐 (8월 전당대회를) 그대로 하는 게 좋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라면서 "전당대회는 원래 넉 달이 걸린다. 전준위(전당대회준비위원회) 만들고 지역위원회 조직도 개편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박 원내대표는 오는 6일 현충일까지 계속되는 연휴 동안 당 원로들과 시도당위원장 등 각 그룹을 면담하고 당의 쇄신 방향 등에 대한 의견을 경청할 계획이다.
NY·SK계 모임 해체 선언, 당 쇄신 불 댕길까
이날 토론회에 앞서서는 민주당 내 계파들의 '해체 선언'이 줄을 이었다. 계파 모임이 당 쇄신 작업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용단이지만, 특정 계파 해체를 촉구하기 위한 압력 행사 아니냐는 의구심 섞인 시선도 나왔다.
이낙연계로 분류되는 이병훈 의원은 3일 오전 자신의 SNS에 "계파로 오해될 수 있는 의원 친목 모임을 해체하기로 했다"며 "이번 결정이 당내 남아있는 분란의 싹을 도려내고 당이 새로 태어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같은날 정세균계 모임인 '광화문 포럼'도 해체를 선언했다. 김영주 의원과 이원욱 의원은 이날 오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민주당의 재건은 책임 정치에서 출발하고, 당내 모든 계파 정치의 자발적 해체만이 (재건을) 이룰 수 있다"며 "민주당 당원으로서,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서 민주당의 승리에 족적을 반드시 남기겠다"고 밝혔다.
이같은 계파 해체 움직임에 대해 당에서는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가 나온다. 한 당직자는 "정치인들이 서로 정치적 소신과 철학을 공유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모임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면서도 "선거 상황에서 정략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역효과를 차단하자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이어 "선거 패배 책임론을 제기하거나 혹은 차기 전당대회에서 누군가를 지지할 때 '배경이 어느 계파이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사전에 피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면서 "당을 새로 재편해야 하는 시점에서 각자가 다 내려놓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자는 차원으로 보인다"고 했다.
반면 이들이 "당내 남아있는 분란의 싹", "훌리건 정치"를 언급한 것을 두고 사실상 지난 대선 이후 당 전면에 등장한 이재명계를 겨냥한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또한 정치인들끼리 같은 정견이나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것이 당내 의견그룹이나 정파, 계파가 존재하는 배경이라는 점에서, 정파적 시각이나 이해관계는 그대로 남아있는데 단지 친목모임 활동을 중단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이겠냐는 회의적 관측 역시 있다.
한편 전날부터 이재명계와 친문계가 선거 2연패 책임을 놓고 공개 설전을 벌이자, 박수현 전 청와대 대변인과 박지원 전 국정원장 등 문재인 정부에서 봉직했지만 상대적으로 계파색이 덜한 인사들로부터 자중을 당부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반면 소신파 중진 이상민 의원은 "차라리 내놓고 격하게 싸워 보자"며 "끈적끈적하게 고착화된 계파주의에 찌들어 있는데 겉으로는 쇼윈도 부부처럼 행세하고 있다. 모든 잘잘못, 모순, 이해관계 등을 펼쳐놓고 철저히 따져보자"고 정반대의 제안을 했다. 특히 이 의원은 "더 이상 어느 특정인 때문에 당 전체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는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하지 말자"고 해 눈길을 끌었다.
실제로 이날도 설전은 이어졌다. 신동근 의원은 이틀째 SNS에 글을 올려, 대선 책임론과 관련해 "문재인 정부에 대한 회고적 책임보다는 이를 뛰어넘을 수 있는 미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당과 후보에게 직접적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신 의원은 86 사퇴론에 대해서는 "586 정치인이 문제가 없지 않으나 지금 민주당의 난맥상 원인이 온통 586에게 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오히려 민주당의 문제는 젊은 초재선 의원들에게 큰 기대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재명계도 전날 문진석 의원이 "대통령 취임 23일 만에 치르는 선거에서 좋은 성적을 내겠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오만한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살아오셔서 총괄선대위원장을 하셨다 한들 결과는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는 등 이 의원 엄호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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