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 한일회담 반대 운동인 6.3항쟁(또는 6.3사태) 중 희생된 고(故) 김중배 열사 추모글 및 당시 기사를 소개한다.
열사는 1964년 6.3항쟁으로 답보 상태였던 한일회담이 이듬해 재개되자, 모교인 동국대학교 교정에서 "제2의 을사조약 즉각 철회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 경찰에 체포돼 연행되는 과정에서 희생됐다. 당시 열사는 스무 살 꽃다운 청춘이었다.
한편, '굴욕적' 한일협정과 6·3항쟁 개막식이 오는 3일 경기도 이천에 있는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서 열린다. 해당 전시는 내년 3월 말까지 관람 가능하다.
또 6.3항쟁 전후 박정희와 일본 관계를 다룬 <박정희와 일본1> 출판기념회가 오는 22일 오후 5시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진행된다. 편집자.
□ 김중배 열사 동지 영령께 올립니다
열사 영전에 말씀 올리기에 앞서 삼가 용서를 구합니다.
저는 생전 열사와 만나 인사 나눌 기회가 없었습니다. 1965년 4월, 우리가 한참 한일협정 체결의 마지막 단계에서 협정의 문제점을 성토하던 무렵, 열사의 놀라운 참변 소식을 듣고 망연하고 통분해 하면서도 슬픔과 의미를 새기기에, 우리 또한 고된 투쟁의 와중에 있었고, 그 뒤 우리 세대 특히 6.3학생운동 참여자들이 겪은 박해와 고된 일상에 쫓기느라 변변한 추모행사를 갖추지도 못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6.3동지인 박동인 등 동국대 출신들로부터 동국대 구내에 열사의 흉상을 마련했다는 소식을 듣고 작은 위로를 삼았을 뿐입니다.
열사께서 호국의 혼이 되신지 어언 57년이 지나 많은 동지들이 유명을 달리하기도 하고 이제는 70을 훨씬 넘었습니다. 그동안 나름대로 많은 성취를 이룬 동지도 있고 열심히 나라와 세상에 기여한 많은 동지들이 있습니다만, 열사의 고귀한 희생에 값하는 추모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용서를 빕니다.
열사께서 앞장서신 우리의 투쟁은 한일굴욕협정을 막는 데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투쟁은 일본 정부와 국민에게 성찰의 기회를 갖게 했고, 우리 정부는 한일협상에서 한국의 입지를 강화하는데 이용했습니다. 이후 청구권 자금의 운용 등에 긴장과 경각심을 가지도록 했습니다. 오늘날 생각 짧은 이들이 포항제철 등의 건설에 청구권자금이 종잣돈이 되었다고 합니다만, 열사께서 앞장서신 거국적 항의가 있었기에 당시의 문란한 정치자금 운용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감시 속에서 정부 또한 긴장하여 청구권 자금을 운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한일협정의 많은 문제점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하여 오늘날까지 정상적 한일관계의 장애로 남아있습니다. 기본조약 2조의 한일 과거 조약의 무효에 대하여 명쾌히 정의하지 못하여 일본침략의 불법성에 대하여 일본 정부는 지금도 애매한 주장과 모호한 반성의 둔사(遁辭)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종군위안부, 강제징용자 문제 등 많은 문제의 근원이 우리가 바로잡고자 했던 바를 성취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양식 있는 여론은 우리들이 주장했던 바, 한일합방의 원천적 불법 무효에 동의하고 일본 정부도 한국 측 해석에 따라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미래의 건강한 한일관계를 위하여는 우리 주장의 정당성이 관철되어야 함을 지금도 확인합니다.
열사가 앞장서신 우리 6.3 세대의 1964, 1965년 투쟁은 국내 정치에서도 정권의 독재화를 막는 소금이 되었고, 민주화운동의 원천이 되어 민주주의 위기 때마다 국민과 청년 학생을 궐기시키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우리는 믿습니다. 법률로도 6.3운동은 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열사이시어, 우리 대한민국은 경제적 선진국반열에 진입하고, 정치적 민주화는 아직도 많은 과제를 안고 있지만 한중일 3국 가운데 제도적으로는 가장 앞섰다고 볼 수 있고 여기에는 열사의 고귀한 희생이 바탕으로 기여했습니다.
열사이시어, 하늘에서라도 위안 삼으시기를 빕니다. 우리 동지들도 내세에 곧 해후할 것입니다. 멀지 않아 다시 조국과 후손을 위한 우리의 기도를 모을 것을 기약합시다.
2022년 6월 3일
동지들을 대표하여 김도현 올림
□ "누가 그를 죽였나", 동국대생 김중배 사망을 보도한 <동아일보> 1965년 4월 16일 자
1965년 4월 13일 시위 도중 경찰봉에 맞아 머리를 다친 동국대생 김중배(金仲培. 농학과 3)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64년 건국대생 이윤식이 사망한 데 이은 두 번째의 학생 사망 사건이었다. 기록을 통해 이 사건을 되돌아보기로 하자, 동국대생들은 4월 13일 성토대회를 열고 오후 1시 40분경 거리로 나왔다. (중략) 이때 쌍림동 부근 골목길에 숨어 있던 경찰이 기습작전으로 학생들을 구타하여 20여 명이 땅바닥에 쓰러졌고 70여 명이 중부서로 연행당했다. 한편 쌍림동 골목으로 도주하던 김중배 외 5명은 골목이 막혀 다시 허겁지겁 달아나다 뒤쫓던 경찰 곤봉에 김중배가 두부를 맞고 인근 집으로 피신했다. 동료 학생들은 김 군을 응급치료한 후 약 30분간 안정시켰다.
그러나 의식불명 상태가 계속되어 숙소로 갔다가 이비인후과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한 후, 중부시립병원과 수도의대병원에 "데모하다 다쳤다"며 입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4월 14일 새벽 2시 "장난하다 몽둥이로 맞았다"고 속여 서울대학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나 김중배는 4월 15일 오후 8시 15분 절명했다.
김중배의 사망 소식을 들은 동국대생 2000여 명은 4월 16일 위령제를 올리고 "오늘 우리 벗을 잃었다. 평화선을 잃은 백만 학도의 울부짖음을 저지하는 이유는 어디 있느냐. 전 동국 건아의 슬픔을 김 군은 아느냐"는 내용의 추도사를 한 후 "김중배를 누가 죽였나"는 등의 내용이 적힌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에 나섰다.
* 참고 자료
1) <박정희와 일본1>(송철호 지음, 도서출판 현기연 펴냄) 525∼526쪽
2) <6·3학생운동사>(6.3동지회, 역사비평사 펴냄) 223∼224쪽
3) <동아일보> 1965년 4월 16일 자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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