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브란스 '노조 파괴' 앞에 청소노동자들은 존엄을 지키려 했다

[세브란스 노조파괴 연속기고 ③] 세브란스 청소노동자들에게 노조란 무엇일까

지난 3월 검찰이 세브란스병원과 청소용역업체 관계자들을 부당노동행위 혐의로 기소했다. 노조파괴 피해를 입은 청소노동자들이 병원과 업체를 고소한지 4년 8개월 만이었다. 지난 4월 열린 첫 재판에서는 병원 직원이 부당노동행위 공모 혐의를 인정하기도 했다.

지난 5월 청소노동자들은 연세대학교와 세브란스병원에 진정성 있는 사과와 관련자 징계, 피해회복 조치를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후 세브란스병원 로비 등에서 같은 내용의 피켓 선전전을 하고 있다. 학교와 병원은 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다.

세브란스병원 청소노동자들이 가입한 노동조합인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는 "노동3권이 가장 절실했던 밑바닥 노동자들의 노조를 파괴하는데 불과 한 달이 걸렸다"며 "그러나 법정에서 진실을 밝히는 절차가 시작되는데만 5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고 여전히 피해회복은 멀기만 하다"고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이에 서울지부가 <프레시안>에 5년 전 세브란스병원에서 일어난 노조파괴, 재발과 피해 회복을 막기 위해 필요한 일 등을 주제로 한 다섯 편의 연속기고를 보내왔다.

어느 대학 교수의 사설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명절에 만난 친척이 무례한 질문을 던지면 이렇게 반문하라. 얼버무리지 말고 명확하게. "너 언제 취직할 거니?" "취업이란 무엇인가?", "너 대체 결혼은 언제 할 거니?" "결혼이란 무엇인가?" 의도가 다분한 질문에 근원을 향한 재질문을 던지는 것은 상대로 하여금 다시 생각해보게 할 수 있습니다만 이 경우 친지로부터 조금 소외될 듯합니다. 이렇게 조금은 우스운 대처 방법을 사용할 일이 생겼습니다. 대관절 설도 추석도 아닌데도 세브란스 병원이 5년 동안이나 무례한 질문을 꾸준히 던지고 있습니다. "너 대체 언제 노조 그만둘 거니?" 그래서 허탈한 마음에 반문해봅니다. "노조란 무엇인가?"

질문에 대한 답을 저의 작은 연구에서 도출하려 합니다. 지난 학기 노조 활동이 삶의 의미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노조라는 큰 덩어리가 아니라 그 속의 조합원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에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저 임금이 오르고 노동조건이 개선되는 것 이외에 개개인의 삶 속의 노조를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조합원 인터뷰를 모으고 전사(轉寫)하고 또 분석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저는 한 명 한 명의 뛰는 가슴을 느꼈습니다. 투쟁 전의 요동치는 마음들, 승리했을 때의 벅찬 마음들, 갈등 속에서도 서로를 위하는 마음들. 자존감, 당당함, 동지애와 같은 모호한 단어들이 조합원의 구술 속에서 새롭게 정의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또 역동하는 노조 속에서 자신의 존엄을 찾아가는 것을 또한 지켜보았습니다. 요컨대 노조는 자신의 감정을 재정의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가고 사회로부터 수탈된 자신의 존엄을 되찾아가는 곳이었습니다.

연구 결과를 다르게 해석한다면, 조합원의 '성원권'을 얻어가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문학과지성사)를 빌어 말하자면, 사람은 자궁으로부터 나와 최초의 울음을 터뜨릴 때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원권'을 얻을 때 즉, 사회의 '절대적 환대'가 가능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한 사람의 탄생을 목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노조는 사회의 '절대적 환대'를 통한 자리를 갖기 위해, 또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일련의 노력입니다.

정리해볼까요. 노조란 무엇이냐? 노조는 빼앗긴 존엄, 환대의 자리를 되찾아오는 곳입니다. 누구에게 빼앗겼냐? 민주노조 탈퇴를 종용하고 협박하는 병원의 모습은 누가 탄압과 폭력의 주체인지 명백히 보여줍니다. 무엇을 빼앗겼냐? 건강하게 일할 권리, 노조할 권리를 빼앗겼습니다. 세브란스 노조의 요구는 그래서 정당합니다. 날 때부터 받아 마땅한 것을 다시 내어놓으라는 외침이니까요.

우리가 생각했을 때의 마땅한 일, 즉 삶의 의미를 찾고, 성원으로서의 자리 위에 존엄하게 살아가는 것이 점점 더 요원한 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주지하듯 불평등과 차별은 인류와 함께 오래도록 진화해왔고, '신종' 모욕은 나날이 창의적으로 변모하는 중입니다. 누군가는 사람이길 포기하고, 그 여파로 다른 누군가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노조도 당연한 것을 이루고자 많은 도전을 받으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케르테스는 <운명>(민음사)에서 존엄이 흔들리는 곳에서 사람됨을 지키는 방법을 일러줍니다. '자포자기하지 않는 것', '고집'부릴 것. 그래서 "너 대체 언제 노조 그만둘 거니?" 라는 세브란스 병원의 질문에, 저는 끈질기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노조란 무엇인가?" 당신들이 포기하라는 노조가 과연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하고 말이죠. 그들은 답하지 못할 테니, 답하겠습니다. 노조는 존엄과 사람의 자리를 되찾아 지키는 곳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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