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노동자가 맞다고? 그럼 우린 사용자 아냐"...무적의 논리

[인사이드 경제] 카카오가 베낀 이재갑 장관 워딩

1000일 정성을 다했는데 이걸로도 부족하단 말인가? 노동조합 설립신고부터 필증을 받기까지 무려 1000일 걸린 대리운전 기사들의 노조 할 권리가 또다시 장애물을 만났다. (관련 기사 : 노조 설립신고에만 1000일 걸리는 나라)

이번 장애물은 노동부가 아니라 플랫폼 자본의 대표 격인 카카오 모빌리티였다. 대리운전노조는 설립필증을 받은지 한 달 만인 8월 14일, 카카오모빌리티를 상대로 단체교섭을 요구했다. 당시 면담 자리에서 "고민해 보겠다"고 얘기했던 카카오 측은, 2주 만인 8월 27일 아래와 같은 공문을 통해 사실상 교섭 거부 의사를 밝혔다. (붉은 밑줄은 필자가 강조를 위해 그은 것)

▲ 카카오모빌리티가 대리운전노조에 교섭을 거부하며 8월 27일 보낸 공문.

필증 없을 땐 "너희는 노동자가 아니다" 필증 나오자 "우리는 사용자가 아니다"

이게 바로 한국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 하기 힘든 이유이다. 특히 특수고용을 비롯해 최근 급증하는 플랫폼 노동자들은 우선 자신들이 '노동자'임을 입증해야 한다. 천신만고 끝에 노동자임을 입증한다 해도 사용자들이 "우리는 너희와 근로계약서 체결한 적이 없거든? 그러니 우린 사용자가 아니다"라고 버티면 노조 할 권리가 송두리째 날아가고 만다.

이런 난센스 같은 상황을 해결하려면 2가지 방법이 있다. 정부가 적극적인 행정 조치를 통해서 정상적인 노사 교섭이 이뤄지도록 만들어주던가, 아니면 노동조합법 2조를 개정해 협소한 '근로자'와 '사용자' 개념을 확장해줘야 한다. 다만 입법의 경우 국회 통과에 시간이 걸릴 수 있기 때문에 가장 빠른 방법은 정부의 행정적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마침 지난 7월 29일에 이재갑 노동부장관이 국회 환경노동위에서 업무보고를 하던 도중 정확히 이 쟁점에 대한 질의 응답이 벌어진 바 있다. CJ대한통운이 택배 노동자들의 교섭 요구를 거부하며 소송에 들어간 사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 양이원영 의원이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할 생각이 없느냐고 질문한 것.

카카오가 베낀 이재갑 장관 워딩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이재갑 장관의 답변 내용이 정말 기가 막힌다. 이건 두고두고 꺼내읽어야 할 답변이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홈페이지에 떠있는 회의록에서 직접 갈무리를 해왔다. (붉은 밑줄은 강조를 위해 필자가 그은 것임)

▲ 7월 29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양이원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던진 'CJ대한통운이 택배 노동자 교섭 요구를 거부하며 소송에 들어간 사건에 대해 정부가 적극적인 역할을 할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에 대한 이재갑 고용노동부장관의 답. ⓒ오민규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앞서 카카오모빌리티가 대리운전노조의 교섭 요청에 대해 했던 답변을 완전히 빼다 박지 않았는가? 노조 설립필증이 나왔다고 해서 곧바로 사업주가 결정되진 않으며, 누가 단체교섭 상대방인지는 법률 검토를 해봐야 한다는 이재갑 장관의 답변이 나온지 꼭 한 달 뒤에 카카오모빌리티 역시 자신이 단체교섭 상대방인지 법률 검토 필요성을 언급하며 교섭을 거부한 것이다.

▲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과 카카오모빌리티의 '특수고용노동자 교섭 요구'에 대한 입장. ⓒ오민규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노조 인가(?)에만 1000일 걸린 문재인 정부

카카오모빌리티가 단체교섭 상대방인지 불분명하다는 법률 검토를 이재갑 장관이 해준 것인지, 아니면 장관의 워딩을 커닝 페이퍼 삼아 답변 공문을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재갑 장관의 답변은 ILO(국제노동기구)에서 들으면 목 잡고 쓰러질 만한 수준이다. 이를테면 ILO 협약 중 가장 중요한 협약이라 할 제87호 결사의 자유 협약의 맨 첫머리는 이렇게 규정되어 있다.

"노동자 및 사용자는 어떠한 차별도 없이 사전 인가를 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여 단체를 설립하고 그 단체의 규약에 따를 것만을 조건으로 하여 그 단체에 가입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그런데 ILO 이사국이기도 한 한국 정부의 고용노동 행정 최고책임자가 노동조합 설립'인가'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게다가 대리운전노조의 경우 그놈의 설립'인가'증을 내주는 데에만 꼭 1000일이 걸렸으니,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문재인 정부는 ILO의 가장 중요한 협약을 정면으로 위배했음을 자백한 것이다.

노동자성 넘고 사용자성 넘다가 허리 휘어진다

게다가 그놈의 설립'인가'증을 받더라도 누가 사용자인지 법률 검토를 해봐야 안다는 장관의 말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노조 할 권리'는 그야말로 평생을 걸어야 하는 허들 경기란 말에 다름 아니다.

우선 노동자성부터 인정받아 설립'인가'증을 받아야 하고,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를 법률 검토를 거쳐 사용자가 누구인지 알아내야 한다. 그 과정으로 모두 거친 뒤에나 단체교섭을 성사시킬 수 있다는 말 아닌가.

▲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노조할 권리'는 끝을 알 수 없는 허들 경기다. ⓒ오민규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양이원영 의원의 질의는 사용자가 교섭을 거부하고 소송에 들어가면 노동부가 손 놓고 재판 결과만 기다릴 것이냐는 질책의 성격도 담겨 있었다. 그런데 이재갑 장관 답변을 보면 사용자가 소송을 들어간 상태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끝맺고 있다.

장관의 워딩과 똑같은 문구를 공문에 활용할 줄 아는 사용자들 아닌가. 한 나라의 고용노동 행정을 책임지는 장관이 답변을 저렇게 끝내면, 사용자들은 이걸 분명한 신호로 해석한다. "아하. 그러니까 장관님 말씀은 교섭을 거부하고 소송 들어가면 노동부가 손 놓고 가만히 있겠다는 거구나. 그럼 무조건 소송 걸어!"

고용노동 행정을 이런 식으로 진행하면서 ILO 기본협약을 비준하겠다는 얘기를 과연 누가 믿어줄까? 오늘도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대리운전 기사들을 비롯한 특수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재인 정부 규탄이 이어지고 있다. 노조 할 권리를 가로막고 있는 기막힌 현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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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입니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주로 자동차산업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뤘습니다. 지금은 [인사이드경제]로 정부 통계와 기업 회계자료의 숨은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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