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살기 위해서 일한다. 그러나 일하기 위해 사는 사람도 많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도 대개 소비자보다는 생산자로서 더 많은 만족을 얻는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국가가 이상적인 국가라 할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그렇지만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이웃과 주민들간 협력을 통해 더 나은 세상, 더 행복한 마을이 만들어진다.
유토피아에서는 하루에 여섯 시간 일한다. 오전에 세 시간 일하고 점심 먹고 두 시간 휴식을 취한 다음 오후에 세 시간 일하고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그들을 여덟 시에 잠자리에 들며 여덟 시간을 잔다.
그 나머지 시간은 기호에 따라 자유롭게 보낼 수 있다. 대부분 사람은 교육을 더 받는 데 여가를 사용한다. 매일 아침 일찍 공개강좌가 열리기 때문이다(토마스 유토피아 2권 중에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출간된 지 오백 년(1516년 출간)이 지났다.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뜻이니, 약간 당황스럽다.
그래서 지레짐작하고 읽지 않는다. 그가 유토피아라는 부재의 공간을 찾은 이유는 너무 현실적이라 그 현실성마저 부정하고 싶은 역설적인 현존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살던 영국에서는 배가 고파서 음식을 훔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사형에 처했다. 모어가 살던 시대에 가난은 흉년과 같은 천재지변 때문이 아니었다. 특정 소수에 의한 특정 소수를 위한 정책 탓이었다.
사람이 만든 가난이었다. 예전에 사람들은 대부분 소작 생활하면서 먹고 살았고, 살림이 어려워지면 너른 공유지에서 방목도 하고 나무도 해 오고 나물도 캐서 그럭저럭 살았다. 팍팍한 삶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누구나 의지할 수 있는 ‘나눔의 공간’이 있었다.
공유지 같은 땅이 널려 있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무역 국가로 영국이 발전하면서 급변했다.
당시 영국은 양모무역으로 돈을 벌던 시절이다. 양모 가격이 오르자 귀족들이 돈 벌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농사짓는 소작인들을 내쫓았다.
그 농지를 초지로 바뀌어 대량 양을 키워 양모산업을 일으켰다. 초지 곳곳에 울타리를 쳤다. 심지어 공유지에도 울타리를 쳤다. 항의라도 해 보려 하면 권력의 칼이 날아왔다. 울타리 경계를 침입하면 도둑질로 간주하여 교수형에 처했다.
무역과 자본주의 발달은 영국을 부유하게 했다. 그렇지만 그 과실을 일부 귀족들이 차지하면서 부익부 빈익빈은 더 심해졌다. 농촌사회가 붕괴하였다.
많은 사람이 부랑자가 됐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갔다. 저항하다가 쓰러진 이도 있었다. 민란도 빈번했다.
<유토피아>에서는 이 장면을 “양이 사람들을 먹어치운다.”라고 묘사했다. 완벽한 디스토피아에서 모어는 완벽한 유토피아를 떠올렸다. 완벽한 디스토피아는 나눔의 공간이 완전히 제거된 ‘울타리 세상’이다.
그 바깥은 암흑의 부랑. 가끔 울타리 안쪽으로 초대받지만 거기서는 또 다른 하층민으로 살아갈 뿐이다. 울타리 안에는 또 다른 울타리가 있었다. 물론 인클로저(enclosure)라 불리는 ‘울타리 치기’는 이제 회한의 역사다. 하지만, 그렇게 끝난 것은 아니다.
신출귀몰하게 변신하기 때문에 우리가 단지 쉽게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우리의 지금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일제강점에 이어 625전쟁 후 외세에 의해 독립되면서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무역과 수출중심으로 불과 70여 년 만에 G7 대우까지 받게 되었다.
짧은 기간 동안 국가 중심 계획경제에 의해 만들어진 기적은 우리 삶을 더 풍족하게 하는데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다. 헌법정신인 국토의 균형발전이 지역 격차와 인구 수도권 집중으로 훼손되고 있다.
수도권 인구가 전체인구의 50%를 지난 2019년에 넘어섰고 올해는 15만을 초과할 것이라고 한다. 15만이면 지방의 중소도시 규모다. 수도권에 신도시가 더 만들어지고 아파트가 고층화되면 될수록 수도권 인구는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자치분권 차원에서 50만 이상 도시를 특례도시로 지정하려는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준비하고 있다. 50만 이상 도시는 수도권에 많다. 지금보다도 더 수도권 특례도시를 위한 예산과 투자가 더 집중되는 환경을 만들 것이 뻔하다.
지역과 계층 간 격차가 커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국가정책에 대한 불신이 더 심화하지 않을까? 그러면 특권층이 생겨나고 그 불신은 점점 강해질 것이다. 격차가 커지면 특권층이 더 많이 생겨날 우려가 있다.
권력과 부가 무법지대를 만들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 특권은 법을 사유화해 남과 다른 대접을 받는 것을 말한다. 법에 의해 벌어진 격차가 다시 줄어들지 않도록 울타리를 치고 있다는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특권층이 만들어지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특권을 없애기 위해 자치가 필요하다. 서민들이 사는 곳에서도 울타리 치기로 서민들 생활을 어렵게 하는 경우도 있다.
강원도 동해안에 공유공간이 해변과 송림이 자치단체가 전액 출자출연한 공사가 송림내 캠핑장을 운영하면서 마을 주민들은 휴식공간을 박탈당했다.
이 송림 땅은 마을에 공동묘지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푸른 소나무숲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군부대까지 철수하면서 캠핑장 사업이 가능하게 되었다. 지방자치시대를 열면서 이런 공유지는 자치단체 소유로 확정되었다.
농사짓다가 송림에서 해변을 바라보며 휴식을 했던 주민들은 소유권을 이용해 캠핑사업이라는 울타리를 치면서 이제는 주민 금지구역이 되었다. 또 하나의 울타리가 생긴 셈이다.
마을에도 책임 없는 것은 아니다. 자치역량이 부족하여 주민들이 한 목소리를 못 냈기 때문이다. 자치역량이 약하면 울타리친 벽을 넘을 수 없게 되고 주민들은 불편하게 된다.
반면 도시지역에서는 뭉치자 싸우자는 현수막을 내걸고 싸우는 곳이 있습니다. 개포동 달터주민자치회다. 현수막에는 “이곳은 평생 살아온 터전이다! 달터마을 지켜내자! 달터마을 주민자치회/철거대책위원회” 이렇게 적혀 있다.
달터 마을의 사정은 정확히 모른다. 주소를 얻기 위해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고 한다. 불법판자촌이기 때문에 수도공급도 비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1970년대부터 공원부지에 250여 가구 무허가 건물에 주민들이 모여 살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강남에서 자치권을 지키며 사는 주민들이 대견해 보인다. 주소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주민들이 거주하면서 자치권을 주장하고 있다.
강제가 적법한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 마을에 사는 일이 그렇다. 사는 곳은 태어나면서 정해진다. 마을에 사는 것은 천부인권인지도 모른다. 어느 가문에 태어나느냐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기도 한다. 어느 나라에 어느 마을에 태어나느냐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기도 한다.
사는 곳을 결정하는 일은 강제되는 경우가 많다. 거주권은 적법한 것으로 강제된다.
이 마을은 우리가 어떻게 만드냐에 따라 천국일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다. 마을자치가 잘 되는 마을이 천국이다. 싸움이 일어나고 갈등이 극에 달하여 사랑과 친절한 이웃이 없는 마을이 지옥이다.
대부분 이웃과의 싸움은 재산과 관련된 이해관계의 문제다. 어떤 이웃의 참여를 배제하려는 데서 출발한다. 이런 경우 대개 마을은 잘 정돈되어 있지 않고 뭔가 어수선하다.
마을자치는 대개 두 가지를 잘 결정해야 한다. 자치는 마을공동체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을 결정하기와 할 수 없거나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 결정이 이루어지면 마을 내에서 일정한 강제가 이루어진다. 더 잘 살기 위해 가능성을 더 확장하는 동시에 경계를 설정해야 한다.
그 경계는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계획을 만드는 일에서 시작되고 더 구체적인 것은 법인형태의 조직이 만들어지면서 더 구체화된다.
계획과 전략을 만드는 일은 선택과 강제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다. 강제를 최소화하고 합의를 극대화해야 한다. 마을은 무엇을 위해 존재해 왔는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다를 것이다.
마을에는 고유한 문화가 있었다. 과거에는 조금씩 지역별로 특색이 있는 마을 문화가 있었다.
루소는 진정한 미덕을 고취할 목적으로 새로운 차지모델을 구상했다. 그는 아메리카에서 받은 인상을 고향 제네바에 있던 소박한 민회의 장밋빛 추억과 접목했다.
루소는 올바른 세상에서는 모두가 보편 의지, 즉 공동체의 총의에 참여하고 결과적으로 자치라는 완벽한 자유를 통해 완벽한 평등이 발현된다고 믿었다.
이대 주권자는 왕이 아닌 백성이었고 그들의 자유는 강제가 아닌 호혜를 통해 발현했다(에스타라 테일러, 2020:70).
자치는 자기 자신의 권리 찾기다. 내 재산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때로는 가족과 이웃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다. 자치를 통해 우리의 권리를 찾는 일이다.
강릉에 해안마을에서 1.2킬로의 백사장과 송림을 관광사업하는 출자 출연 기관에 빼앗기고도 저항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땅값과 아파트값이 비싼 강남에서 주소도 없이 거주민으로 저항하며 사는 경우도 있다.
이제 풀뿌리 민주주의는 수도권과 비수도권, 도시와 농촌을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 유토피아는 마을자치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법인, 기업, 조직이 중심이 되어 발전되면서 법제도로 그 보호막이 만들어지고 있다. 울타리 치기가 합법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마을에서도 자치를 통해 더 조직화하여 기업, 법인을 만들어 공동체를 강화해야 우리의 주권을 지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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