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에 짓밟힌 KTX 승무원들 이야기

양승태 '재판 거래' 의혹, 나락으로 떨어진 승무원들

일명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으로 시작된 대법원 특별조사 후폭풍이 거세다. 작년부터 시작된 1차, 2차에 이어 3차 조사 결과를 지난 25일 발표했는데, 그 내용이 심상치 않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숙원사업인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박근혜 정권과 재판을 거래 수단으로 삼았다는 게 골자다. 특별조사단은 이른바 재판 거래를 했다는 정황이 담긴 문건을 찾아냈다.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이 직접 작성한 '상고법원의 성공적 입법 추진을 위한 BH와의 효과적 협상추진 전략'이라는 문건에는 '국가적, 사회적 파급력이 큰 사건이나 민감한 정치적 사건 등에 BH와 사전 교감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물밑에서 예측 불허의 돌출 판결이 선고되지 않도록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우선, 그동안 사법부가 VIP(박근혜 대통령)와 BH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권한과 재량 범위 내에서 최대한 협조해온 사례를 상세히 설명' 등이 서술돼 있었다.

그러면서 그간 대법원이 정권 입맛에 맞게 재판을 해왔던 것으로 추정되는 사례들이 나열됐다.

'①합리적 범위 내에서의 과거사 정립(국가배상 제한 등) ②자유민주주의 수호와 사회적 안정을 고려한 판결(이석기, 원세훈, 김기종 사건 등) ③국가경제발전을 최우선적으로 염두에 둔 판결(통상임금, 국공립대학 기성회비 반환, 키코 사건 등) ④노동개혁에 기여할 수 있는 판결(KTX 승무원, 정리해고, 철도노조 파업 사건 등) ⑤교육 개혁에 초석이 될 수 있는 판결(전교조 시국선언 사건 등) 등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VIP와 BH에 힘을 보태 옴

이중 가장 이목이 집중되는 사례는 'KTX승무원'이다. 당시에도 대법원 판결을 두고 상당한 비판이 쏟아졌었다. 판결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바로미터로 평가됐다.

ⓒ연합뉴스

지난 12년 동안 무슨 일이?

이야기는 12년 전인 2006년 3월 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요구하며 '선로 위의 스튜어디스'라 불리던 승무원 280명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함께 파업했던 철도공사노조는 단 4일 만에 파업을 끝내고 현장으로 돌아갔지만 이들은 복귀하지 않았다.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철도공사는 전원 여성으로 구성된 KTX승무원의 정규직 전환을 거부했다.

결국, 철도공사에서는 절충안으로 자회사 채용을 제안했고 일부는 KTX관광레저로 입사했다. 하지만 나머지 180명은 이를 거부하고 철도공사의 직접 고용을 요구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이들 180명은 모두 해고됐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싸움이 부당해고 복직 싸움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싸움의 무대도 길바닥에서 법정으로 옮겨졌다.

다행히 법원은 승무원 손을 들어주었다. 2008년 4월 8일 서울고등법원은 "승무원 채용, 승무인력의 업무 조정, 작업시간 결정, 임금수준 결정, 인사관리 등의 시행주체는 철도공사"라며 철도공사의 KTX 승무원 자회사 위장도급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면서 그간 지급하지 않았던 월급도 승무원들에게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승무원들은 다시 회사에 돌아갈 꿈을 꾸게 됐다. 하지만 그 꿈은 일장춘몽에 그치고 말았다. 박근혜 정부 당시인 2015년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의 대법원은 승무원 복직이 정당하다는 하급심, 즉 고등법원의 판결을 뒤집었다.

당시 대법원은 "(승무원을 감독하는) 코레일 소속 열차팀장 업무와 철도유통 소속 KTX 여승무원 업무가 구분됐고, 철도유통이 승객 서비스업을 경영하면서 직접 고용한 승무원을 관리하고 인사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했다"며 "코레일과 승무원 사이에 직접 근로관계가 성립했다고 단정할 수 없고, 근로자 파견계약 관계에도 해당되지 않는다"고 사유를 밝혔다.

그러면서 이미 지급한 월급도 반환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해고 승무원들은 개인당 1억 원이 넘는 돈을 회사에 물게 됐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판결로 10년 넘게 복직 싸움을 벌인 승무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참사로 벌어졌다. 슬하에는 세 살된 자녀가 있었다.

누가 이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나

법조계에서는 당시 대법원 판결이 법리에 맞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실제 대법원은 1심, 2심 판결의 쟁점이 됐던 부분은 언급조차 하지 않으며 패소 판결만을 내렸다. 대법원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판결이었다. 실제 이 판결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선정한 2015년 최악의 판결로 남았다.

그런 그들 입장에서는 이번 조사단의 발표는 충격일 수밖에 없다. '설마'라는 의혹이 '역시'라는 확증으로 변환되기 충분했다. KTX승무원들은 29일 대법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그간의 설움과 고통을 호소했다.

"양승태가 책임자로 있던 대법원은 고등법원까지 계속 승소해온 KTX 승무원 관련 판결을 이유없이 뒤집어 10년 넘게 길거리를 헤매어 온 해고 승무원들을 절망의 나락에 빠뜨렸습니다. 그로인해 승무원 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까지 벌어졌으니 누가 이 억울한 목숨과 승무원들의 불행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

이들은 기자회견 이후 김명수 대법원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대법정으로 진입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를 막는 법정 경위와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이들은 30일 대법원장 비서실장과의 면담을 약속 받고나서야 물러났다.

이들은 24일부터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서울 서부역에서 천막농성을 진행하고 있었다. 첫 파업을 시작할 때는 280명이었던 승무원들이 12년이 지난 지금은 33명만 남았다. 이들이 겪은 지난 12년을 누가 보상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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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환주

2009년 프레시안에 입사한 이후, 사람에 관심을 두고 여러 기사를 썼다. 2012년에는 제1회 온라인저널리즘 '탐사 기획보도 부문' 최우수상을, 2015년에는 한국기자협회에서 '이달의 기자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기획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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