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적십자사는 지난 4월 26일 불공정 의혹이 제기된 면역시스템 도입과 관련하여 재입찰 공고를 내기로 하고 그날 오후 곧바로 재입찰을 공고했다. 그러나 나는 적십자사가 주도하는 이번 재입찰도 여러 문제들이 불거질 것이라 판단하고 있다.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일단 왜 적십자사는 재입찰공고를 하기도 한 당일 오후에 바로 재입찰공고를 냈을까? 이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이미 재입찰공고 준비가 다 된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전 입찰에 참여한 업체들에게 모두 '부적격 처리되었다'라는 짧은 통지 문자를 보낸 것을 생각하면 서류심사에서 탈락시킨 국내업체만 제외하고는 입찰에 참여한 업체들의 장비 성능 평가도 모두 마쳤다는 것을 반증한다. 적십자사는 왜 이들 업체가 부적격 처리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딱히 설명하고 있지 않다.
둘째, 적십자사는 계속 장비선정의 헤게모니를 쥐고 가고 싶은 것이다. 나는 그간 3번의 프레시안 기고에서 계속 장비선정 주체가 복지부로 이관돼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적십자사가 구성한 규격평가위원회를 공개하라고 해도 공개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적십자사가 해봐야 또다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최근에도 채혈용 혈액백 입찰과 관련해 입찰에서 탈락한 업체가 자신들이 떨어진 사유를 도저히 인정이나 납득을 하지 못하자 적십자사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적십자사의 이런 심각한 행태들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시스템 선정에서 보여준 적십자사의 '갑질'은 어떤 의미일까?
적십자사는 그간 입찰과정에서 갑의 위치에서 유감없이 갑질을 자행해왔다. 이 상황을 다시 반추해보면 앞으로의 재입찰과정이 어떻게 될지 상상이 가능해진다.
2017년 3월 기관 경고 처분을 내린 보건복지부 감사 결과 보고서에도 나와 있듯이 적십자사는 외국기업에게 각종 특혜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입찰 전에 미리 업체들을 불러 회의를 갖는 것은 그냥 의례적인 일 정도이고, 이미 이전의 기고문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국내업체에게는 검체를 제공하지 않고 외국업체에게는 많은 양의 음성 검체를 제공한 것과 아울러 지멘스사의 장비는 입찰과 관련하여 새로운 장비를 따로 반입하지 않고도 이미 적십자사에서 쓰고 있는 장비를 활용하여 시약만 바꿔서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그렇다면 장비가 노후화되어서 장비교체를 해야 한다는 취지가 무색한 것이다. 새 장비를 설치하려면 적십자사의 서류심사를 통과하고 공간을 따로 확보하여 업체가 큰 장비를 운반하여 설치해야 한다. 이 비용만 해도 수천만 원이 든다. 그러나 지멘스는 장비를 반입하지도 않고 그 전 장비를 그대로 사용하게 함으로써 이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손쉽게 평가를 마쳤다. 그럼 지멘스는 만약 시스템이 선정된다면 이전의 모델로 장비를 공급할 것인가? 신모델로 공급한다는 것인가? 신모델로 공급을 하면 거기에 맞는 평가를 해야 하는데 그때 다시 평가한다는 것인가? 그냥 구모델로 납품한다면 노후화된 장비로 평가한 것은 적정한가?
이렇게 외국 기업에게 각종 편의를 봐주는 적십자사가 재입찰공고를 한 그날 특정 국내 기업에게는 이전 1차 입찰공고 때 반입한 장비의 철수를 요구했다. 이 업체는 애초에 입찰서류에 문제가 없다고 해서 장비를 반입하였는데 그 이후 트집을 잡고 서류심사에서 업체를 탈락시켜버렸다. 수천만 원을 들여 장비를 설치하게 해놓고는 다시 서류심사에서 탈락시킨 다음 장비평가도 하지 않은 채 철수를 하라고 했다. 업체 입장에서 보면 미칠 노릇이다. 이 업체는 이번에 다시 재입찰에 참여할 예정이란다. 만약 그때도 떨어지면 그때 철수하면 될 것을 재입찰 마감을 며칠 남겨놓고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한마디로 적십자사에게 업체가 밉보인 것이다. 그야말로 갑질이다.
적십자사만 보고 기술이나 시약을 개발하다가는 회사 망한다?
그럼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 가능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현재 재입찰에 참여할 수 있는 업체는 모두 다섯 곳이다. 이번에 참여한 업체가 네 곳(로슈진단, 엘지 콘소시엄, 녹십자 컨소시엄, 한국피시엘) 그리고 이번 입찰에 참여하지 않은 에보트까지 생각한다면 모두 다섯 곳이다. 이 중 로슈진단과 엘지, 녹십자는 모두 장비성능평가를 마치고 부적격으로 통보 받았으니 그 장비와 시약을 가지고 재입찰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면 이제 남은 업체는 한국피시엘과 에보트 뿐이다.
예상하건데 국내업체인 한국피시엘은 선정되는 것이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장비 평가를 위해 적십자사에 반입해 놓은 장비를 철수하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 업체는 장비성능평가 자체도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수많은 돈을 들여 시스템을 개발해도 갑에게 밉보인 업체가 한국에서 살아남은 일은 거의 없다. 복수입찰의 요건을 갖추기 위해 들러리로 국내업체를 세울지언정 승자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설령 서류심사에서 통과가 되더라도 장비성능평가에서 업체를 떨어뜨릴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런 것들을 모두 제거하고 이후에도 뒷말이 없게 하려면 외부에 선정 주체를 이관하고 공개적이고 투명한 위원회를 구성하라고 한 것인데, 전문성이 없는 복지부는 적십자사의 보고만 받고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적십자사가 재입찰공고를 냈더라도 위원회 구성과 시스템 평가는 적십자사에게 맡기면 안 된다.
이 국내 업체는 혈액원 장비만 염두에 두고 십년간 수백억을 들여 국내 처음으로 장비와 시약을 국내 기술만으로 일원화시킨 국내 유일의 업체다. 국책사업이었던 이 프로젝트 개발에는 국고도 상당 액수가 투자되었다. 외국계 업체가 적십자사에서 제공한 국민의 혈액 검체를 손쉽게 쓰고 있을 때, 이 국내 업체는 달라 해도 주지 않는 적십자사 때문에 외국에서 검체를 수입해서 쓰면서까지 각종 어려움을 무릅쓰고 시스템을 개발하였다. 그러나 적십자사는 이런 업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제 국내 업체인 한국피시엘은 짐을 싸고 외국에 당신들이 개발한 기술과 특허를 파는 것이 현명해 보인다. 혹시라도 다른 국내기업들도 적십자사를 대상으로 하는 기술이나 시약을 개발하지 말기를 권고한다. 회사 망할 수 있다. 적십자사가 자신들의 적폐를 도려내는 개혁을 단행하지 않는 한, 당신들이 개발한 제품들이 낙찰될 가능성이 희박해보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의지가 있고 생각이 있다는 세력들이 정권을 잡고 한국 사회를 개혁한다고 목청을 높이지만 아래로부터의 사회 변화가 잘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적폐 세력'에게 총론에서 이길지 모르지만 매번 각론에서는 지고 있다. 각종 팩트와 전문성의 디테일에 숨어 있는 '악마'를 잡아내지 못하면 '사회 정의'는 교과서에나 나오는 말에 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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