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을 우리 직원으로 키우고 싶었다. 그런데..."

[반복된 학생의 죽음 ②] 투신 학생이 일한 업체의 이야기

특성화고 학생(출신)들의 사망 사고는 우리에게 많은 숙제를 던져주고 있다. 구의역을 시작으로 LG유플러스, 제주 음료회사까지.

지난 3월 28일에는 이마트 다산점에서 무빙워크를 점검하던 이 모씨가 목숨을 잃었다. 일한 지 1년6개월 만의 일이다. 그는 특성화고 현장실습생으로 이곳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마트의 하청업체였다.

그간 특성화고 학생들의 죽음을 두고 여러 지적과 대안이 제기됐다. 가장 화두가 된 것은 조기 취업으로 불리는 현장실습 제도의 존폐였다. 학생들을 착취하는 제도인 현장실습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과 제도는 그대로 두고, 관리·감독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부딪혔다. 결국, 이 제도는 후자에 방점을 찍는 것으로 정리됐다. 그렇다면 이제 특성화고 학생들의 죽음은 사라지게 될까.

아마 누구도 그러리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특성화고 학생의 죽음은 간단한 도식 구조 속에서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에는 복잡한, 그리고 이해관계가 뒤섞여 있다. 어떤 특정 제도를 없애거나 개선하는 식의 단순계산으로는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프레시안>은 특성화고 학생들 사망 사건을 추적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현재 한국의 특성화고 교육구조, 그리고 그와 연계된 산업구조의 문제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현장실습의 사망 문제는 교육과 노동의 교집합에서 발생한다. 이를 들여다보면서 그들 죽음의 이면을 톺아보려 한다.

첫 번째로 작년 11월, 안산 반월공단에서 현장실습 도중 투신한 박 모군의 이야기를 다룬다. 당시 공장 옥상에서 투신한 박 군은 공단 내 중소기업에서 일했다. 박 군은 선임에게 욕설을 듣고 옥상에서 뛰어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업체 사장은 직접적인 욕설이 없었으며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일했다고 설명했다.

누구의 말이 맞는 걸까. 박 군 사건을 둘러싼 이해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는 특성화고 현장실습제도의 속내를 살펴보고자 한다. 박 모군 어머니에 이어 박 모군이 일했던 업체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관련기사 바로가기 ☞ : [반복된 학생의 죽음 ①] 현장실습 도중 투신한 학생의 이야기)

ⓒ연합뉴스

좋은 기술자 키우려 특성화고 학생 받았으나...

김현기(가명) 씨는 공업고등학교 출신이다. 졸업 후 작은 업체에서 일했다. 맡은 일을 묵묵히 해냈다. 회사에서 어느 정도 인정도 받기 시작하면서 반대로 공고 출신이라는 편견을 느껴야 했다. 늦깎이에 전문대에 입학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이후 플라스틱 만드는 업체에서 10년 동안 화학 재료를 조합하는 연구개발 업무를 했다.

일을 하다 보니 자기 일을 하고 싶어졌다. 창업사관학교에 입학해서 2년 동안 다시 공부를 한 뒤, 직접 개발한 기술을 토대로 작은 회사를 차렸다. 주 종목인 화학재료를 배합해 플라스틱 물질을 만드는 업체였다.

2014년 첫해에는 5명의 직원과 일했다. 점차 노하우도 늘어나면서 기업도 확장했다. 2016년에는 5억이었던 매출이 2017년에는 15억으로 올랐다. 2018년 목표 매출은 40억으로 잡았다. 직원들도 5명에서 13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면서 장기적으로 회사가 유지되는 꿈을 꿨다. 자연히 사람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기술로 먹고사는 회사였다. 화학재료를 어떻게 융합하고, 굳게 하느냐에 따라 플라스틱 밀도와 경도가 달라진다. 사람의 기술이 필수라는 이야기다. 김 씨는 자신과 같은 기술을 배울 사람을 찾았다.

자신이 나온 전문대에 연락했지만 올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졸업 시즌이 아니었다. 회사가 있는 안산 지역 공고, 즉 특성화고에 연락한 이유다. 2017년 10월쯤이었다. 그때는 산학협약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몰랐다. 나중에 알았다. 현장실습생을 받으려면 6월부터 학교, 중소기업진흥청 등과 논의해서 삼자협약을 맺어야 했다.

시기는 늦었지만 학교 담당자가 기업을 직접 방문해 관련 내용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몇몇 학생을 추천했다. 그러나 회사가 원하는 학생은 없었다. 김 씨는 회사 업무를 생각해서 화공 계열 학생을 원했지만 학교에서는 디자인학과, 컴퓨터학과 등을 전공한 학생들을 소개해줬다. 화공 계열 전공 학생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제품 박스 포장 등 단순 업무를 한다면 모를까 그쪽 전공 학생을 뽑기는 어려웠다. 특성화고 학생을 뽑으려는 이유는 전문 기술자를 키우는 목적이었다. 학교의 제안을 거절하고 내년인 2018년부터 협약을 맺고 현장실습생을 받기로 했다.

그런 결정을 한 지, 2주가 지났을까.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화공 계열 학생이 한 명 돌아왔는데요. 다니던 회사가 어려워져서 돌아왔다고 해요. 혹시 받으실 생각 있으신가요?"

면접을 봤다. 아이가 담임선생과 함께 회사에 찾아왔다. 체구가 작은 아이였다. 기술직이라 하더라도 배합이나 생산품 운반 등 현장에서 힘을 써야 하는 일이 많았다. 잘 버틸 수 있을까 걱정됐다. 하지만 망설임도 잠시였다. 김 씨 회사는 이전에 병역특례업체를 신청했으나 평균 인력 부족으로 떨어졌다. 현장실습생을 받으면 병역특례업체가 곧바로 될 수 있었다. 받은 학생이 그대로 그 업체에서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는 식이다. 시스템이 그렇게 짜여 있었다.

아이가 병역의무를 자신의 회사에서 이행하면, 최소 3년간은 이 아이가 일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자신이 잘해주면 3년 이후, 재계약을 해서 다시 회사에 남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잘 키운 기술직이 이직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했다. 김 씨가 이 아이를 채용한 이유다.

노동조건은 최대한 아이를 배려했다. 한 달 월급은 회사 신입과 똑같은 180만 원을 줬다. 아이를 신입 사원과 똑같이 대우한 것은 신입 사원과 똑같이 키워야겠다고 생각해서였다.

반면, 아직 학생 신분이기에 여러 부분에서 배려했다. 잔업, 주말근무도 시키지 않았다. 공장이 24시간 돌아가야 하기에 다른 직원들은 주야간 교대근무를 했지만 아이에게는 야간근무를 시키지 않았다. 작은 체구가 걱정돼 힘든 일은 시키지도 않았다. 재료배합을 어떻게 하는지 등 기술을 가르치려 노력했다. 아이도 이전에 다닌 회사보다 좋다며 좋아했다.

아이가 투신 하기 전, 무슨 일이?

그렇게 일을 시작했지만 아이는 직장생활, 즉 사회생활을 잘 몰랐다. 일하다가도 은어, 비속어를 자주 사용했다. 사장인 김 씨에게 삼촌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회사 선임을 형이라고 불렀다. 고등학교를 채 졸업하지 않고 곧바로 사회에 들어와서 그런 듯했다. 아이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선임이 아이를 불러 지적했다. "여기는 회사이지 고등학교가 아니야. 학교에서는 네가 선배일지 몰라도 여기서는 막내다. 사장에겐 사장으로, 과장에겐 과장으로 대우해줘야 한다. 그래야 귀여움을 받는다."

아이는 그런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 친구처럼 지내면 좋은 게 아니냐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문제가 터졌다. 아이가 회사에 온 지 8일째 되는 날이었다. 선임이 아이가 함께 원료 통 닦는 일을 했다. 하지만 아이는 이 원료 통을 닦지 않았다. 하기 싫어하는 눈치였다. 선임이 또다시 한마디 했다. "하기 싫어? 그런데 너 이거 배워야 해. 나중에는 혼자서도 해야 하는 일이야"

아이는 사장인 김 씨가 하기 싫은 일 있으면 형들, 즉 선임들에게 시키라고 했다며 계속 일을 안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선임은 그게 말이 되느냐며 아이에게 재차 싫은 소리를 했다. "사장이 형들 시켜 먹으라고 말했다고? 그게 말이 되느냐. 네가 일을 못 할 수 있고, 못 하게는 당연하다. 하지만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하다"
아이가 툴툴거렸다. 계속 아이에게 싫은 소리를 했던 선임도 그 순간 화가 났다.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서 육두문자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후 선임은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계속 이야기를 했다. "형 말이 이해가 안 돼? 열심히 하라고. 그래야 사장도 과장도 너를 좋게 평가해"

아이는 재차 '사장도 다 친구처럼 지낼 수 있다'고 말했다. 답답한 선임이 "그건 학교에서나 가능한 일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퇴근 시간인 오후 5시를 넘겼다. 선임은 아이에게 퇴근하라고 한 뒤,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아이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학교 담임선생과 약 15분간 통화를 했다. 그러고는 퇴근 대신 4층 건물 옥상으로 올라간 뒤, 뛰어내렸다.

다행히 아이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이후 사태는 악화됐다. 아이가 선임에게 욕설을 들은 뒤, 투신했다는 게 기정사실화됐다. 회사가 아이에게 힘든 일을 시켰다고 덧붙여졌다. 여섯 군데 방송사에서 회사를 찾아왔다. 왜소한 체구인지라 힘든 일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회사에서 온갖 어려운 일을 시켰다고 했다.

고용노동부에서 특별감독을 실시했고, 안산경찰서에서 아이의 투신 사건을 조사했다. 회사 차장은 조사만 네 번 받았다. 선임도 경찰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회사에 있던 총 14대의 CCTV 녹화본도 모두 가져갔다. 아이와 선임이 대화를 나눌 때, 주변에 있었던 직원들도 모두 조사를 받았다.

그렇게 조사를 받았으나 노동부는 아이의 건강검진 내용과 일일 근무일지가 없다는 이유로 각각 5만 원의 과태료만을 부과했다. 경찰 조사에서도 이렇다 할 문제를 찾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아직 수사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의식을 회복한 아이가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렸기 때문이다. 사건 당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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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 하자고 뽑았는데, 크게 튀었구나 싶다"

이 과정에서 학교가 여러 차례 자기들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일례로 아이는 이전 업체가 경영이 어려워져 학교로 돌아온 게 아니었다. 아이의 태도가 문제여서 돌려보내진 게 경찰 조사에서 드러났다. 그때야 든 생각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 회사에서도 우리 회사처럼 사장에게 삼촌이라고 하고, 일을 시켜도 제대로 안 했다면 업체에서 돌려보내지 않았겠나?'

또한, 학교에서는 아이에게 뇌전증(간질)을 앓은 병력이 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약을 먹고 있다는 것과는 별개로 업체에서 아이의 지병을 알고 있어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는데, 그것마저도 원천봉쇄한 셈이었다. 학교에 당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머니는 애를 얼마나 잡았길래 투신했느냐고 한다. 우리는 좋은 일 하자고 아이를 뽑았는데, 정말 크게 튀었구나 싶다."

김 씨는 앞으로 다시는 특성화고 학생은 뽑지 않을 생각이다. 군대는 다녀온 사람을 채용한다는 생각이다. 그동안 손해도 막심하다. 경찰 조사받느라 공장 설비를 중단해야 했다. 노동부 현장 점검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매출 하락으로 연결됐다. 김 씨는 여전히 그때 꼬인 자금 유통 문제로 고생하고 있다.

아이가 투신한 이유를 단순히 업체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이 아이의 부모 입장은 이미 전편(관련기사 바로가기 ☞ : [반복된 학생의 죽음 ①] 현장실습 도중 투신한 학생의 이야기)에서 다뤘다. 아이의 부모는 업체와 학교의 무책임한 태도에 문제 의식을 느끼고 있다. 평소 회사 관련해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던 아들이었다. 엄마는 아들이 왜 뛰어내렸는지 의문이다. 아들을 그렇게 만든 업체, 그리고 아들이 그렇게 되기까지 내버려 둔 학교를 생각할 때면 영애 씨는 견딜 수 없이 화가 치민다.

업체에서는 학교에서 보낸 아이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업체 역시 할 말이 많다. 그렇다면 학교 입장은 어떠할까. 이 얽히고설킨 시스템 안에서 특성화고 현장실습생 아이들은 방황하고 있다. 시스템의 틈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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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환주

2009년 프레시안에 입사한 이후, 사람에 관심을 두고 여러 기사를 썼다. 2012년에는 제1회 온라인저널리즘 '탐사 기획보도 부문' 최우수상을, 2015년에는 한국기자협회에서 '이달의 기자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기획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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