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사춘기, 지혜롭게 건너는 법

[격월간 민들레] 사춘기는 '자존감 회복 시기',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중2'가 무서워하는 '초4'

얼마 전까지 중2가 제일 무서운 나이였는데, 요즘 그 중2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초딩 4학년'이라고 합니다. '중2병'이란 말이 유행하더니, 최근에는 '초4병'이라는 말도 생겼습니다. 3학년까진 분명 어린이였는데, 4학년 즈음부터 갑자기 돌변하는 모습에 그런 이름이 붙었겠지요. 교육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으로서 '중2병'이든 '초4병'이든 그 어감이 좋지 않습니다. 사춘기는 '병(病)'이 아니라, 하나의 시기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때가 되면 마주하는 계절과 다를 게 없습니다.

누군가 "아, 나 봄 타는 것 같아. 벚꽃이 휘날리는 걸 보니 마음이 뒤숭숭하네"라고 한다고 "그거 병이야. 빨리 병원 가봐" 하진 않지요. 단지 요즘은 사춘기가 예전보다 훨씬 더 빨리 시작될 뿐입니다. 이런 현상이 마치 문제인 것처럼 여기는 이유는 대부분의 부모들이 아직 초등학생인 자녀의 사춘기가 시작되는 걸 바라지 않기 때문이죠. 아이의 변화를 목격한 부모는 당황합니다. 분명 몇 개월 전만 해도 마냥 어린아이 같았는데, 갑자기 말대꾸를 시작하고, 방문을 잠그고, 심지어 큰소리로 대들기까지 하면 여간 속상한 것이 아닙니다. 부모도 대비하지 못하는 사이 마음속으로 '욱!' 하는 것이 올라오지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바쁜 직장생활 중에도 내 시간과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데…' 등 각자의 환경과 상황에 비추어가며 화가 나고 원망스럽지요.

이때 부모들이 알아야 할 것은 '초등 사춘기가 무엇인가?'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아이에게 왜 사춘기가 빨리 왔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에게 사춘기가 시작되었음을 인정하고 그에 맞는 대우를 해줄 수 있는 것이지요.

사춘기는 '생각 사(思)'에 '봄 춘(春)'을 쓰지요. 춘(春)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봄을 이야기하지만, 비유적으로는 성(性)적인 것을 뜻합니다. 춘정(春亭), 회춘(回春), 춘약(春藥) 등의 단어를 봐도 알 수 있지요. 그런 면에서 사춘기는 '성에 대해 생각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요즘 여자아이들의 신체적 변화를 보면 초경이 빨라졌습니다. 2003년 국립보건원에서 조사한 자료를 보면 70년 전보다 초경이 4.1세 빨라졌습니다. 2003년 당시 초등학교 6학년 때 초경을 하는 학생들이 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당겨졌겠죠. 지방 섭취량이 늘어 여성호르몬 분비가 촉진되고, 인터넷 등 성적인 자극을 주는 각종 영상물에 노출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제가 맡은 학급만 봐도 최근 몇 년 사이 초등학교 3학년 말 혹은 4학년 초부터 생리를 시작한 학생들이 있습니다. 이미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이 중학교 입학 전에 신체적으로 '봄을 생각하는 시기'에 이르는 것이지요.

▲위 사진은 본문 내용과 관계 없습니다. ⓒ연합뉴스

초등 사춘기의 심리적 원인

저는 이 현상을 심리적 측면으로도 접근해보고 싶습니다. 심리적으로 볼 때 사춘기는 '자아정체성' 확립의 시기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시작되는 시기입니다. 살다 보면 해야 할 일들이 정신없이 많고, 스트레스가 쌓여 있을 때 '왜 내가 지금 이걸 하고 있나?' 스치듯 생각하게 되지요. 초등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해야 할 일들이 포화 상태입니다. 아주 어려서부터 빡빡하게 짜인 스케줄대로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왜?’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외부로 표출하기 시작한 거지요.

"왜 문제집을 이렇게 많이 풀어야 돼?"
"왜 영어를 배워야 돼?"
"영어만 하면 되지, 중국어도 해야 돼?"
"왜 책을 많이 읽어야 돼?"

교육학에서 '왜'는 동기를 유발하는 좋은 단어라고 보지만, 심리학에선 그 질문의 무의식에 '노(NO)'가 있다고 가정합니다. 아이가 지친 얼굴로 왜 학원에 다녀야 하는지 물으면 부모들은 차근차근 그 이유를 설명해주죠. 그러나 아이가 그걸 몰라서 물었을까요? '왜?'라고 묻는 건 '가기 싫다'라는 뜻입니다. 그럴 땐 "아, 우리 딸 학원 가기 싫구나" 하고 공감해주시면 됩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엄마가 내 마음을 전혀 몰라주는 건 아니네'라고 여길 테니까요. 그렇게 하면 적어도 아이에게 미움받는 시기를 늦출 수는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 뭐라도 눈에 보이도록 해놓지 않으면 미래가 불안하다고 여기는 부모의 심리는 그대로 아이들에게 전이되고, 그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부담감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러한 부담감 때문에 아이들은 자기 방어기제를 펼치고, 어린 나이에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작은 반항을 시작하지요. '하기 싫은 건 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일종의 독립 선포입니다.

수업시간에 3~6학년 아이들에게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 줄로 쓰라고 해보면 세 가지 정도로 정리가 되는데요. "그렇게 좋은 학원 엄마가 다니세요", "휴대폰 좀 바꿔주세요", 그리고 "제발 짜증 나게 하지 말아주세요"입니다. 그중 아이들이 박수를 치며 격하게 공감한 발표가 있어요. 이 대목에서 아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했습니다.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나예요. 내 맘대로 할 거야!"

"엄만 엄마고 나는 나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아닌가요? 성철스님이 하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와 같은 말이지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큰스님이 하신 말씀을 아이들은 어떻게 스스로 하고 있을까요? 이런 수준의 사춘기 아이들을 섣불리 논리로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아직 그들을 모르는 겁니다.

정리해보자면, 환경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성에 대해 관심을 갖는 시기가 빨라졌습니다. 또한 초등학생들이 감당하기 힘든 요구들이 주입되는 현실에서 자아정체성을 찾기 위한 방어기제를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더불어 자신 본연의 내적 욕망을 바라보는 사춘기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입니다. 이럴 때 부모의 역할은 아직 사춘기가 아닐 거라고 회피하거나 시기를 늦추려고 애쓰는 데 초점을 맞추지 말고, 사춘기가 도래했음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것입니다.

▲ 2012년 '강북청소년문화축제'에 설치된 사춘기 청소년들과 부모들의 소통 부재를 표현한 조형물. ⓒ연합뉴스

청소년과 어린이 사이, 초등 사춘기

사실 사춘기 자체를 초등 사춘기, 청소년 사춘기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사춘기는 사춘기일 뿐입니다. 물론 초등 시기에 겪는 사춘기만의 특징이 있긴 합니다. 한 예로 자신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 사춘기를 무기로 꺼내 들다가, 불리할 때면 '어린이'라는 이름 속으로 숨어드는 것이 그렇습니다.

제가 6학년 담임을 맡은 학기 초에 '초등 6학년을 청소년으로 대우해주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어린아이로 바라봐주는 게 좋은지' 토론을 했습니다. 자신들이 청소년인지 어린이인지, 나름 설득력 있는 주장이 오갔습니다. 결론은 '자신들을 청소년으로 대우해주고 자율성을 좀 더 많이 보장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의 토론을 보다가 제가 짓궂은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여러분들이 청소년으로 대우해주길 바란다고 하니,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곧 있을 어린이날에 선생님이 초코파이를 하나씩 선물로 주려고 했는데, 이제 어린이가 아니라고 하니, 선물은 없던 것으로 하는 게 좋겠죠?"

조금 전까지 자신들을 청소년으로 인정해달라고 버럭버럭 주장하던 아이들이 갑작스레 태도를 바꿉니다.

"선생님, 그래도 초등학생은 아직 어린이지요. 어린이날 초코파이는 주시는 게 맞지요."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기꺼이 요구하고 주장하는 사춘기 청소년처럼 행동하다가도 어린이로서 더 유리한 상황에는 어린이처럼 굽니다. 부모로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지요. 이런 경우 어느 한 관점으로 일관성 있게 다가가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습니다. '아직 어린아이다운 면이 남아 있는 사춘기 청소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린이로 다가올 때는 어린이처럼 대해주시고 청소년 대우를 요구할 때는 청소년처럼 대하며, 그때그때 유연한 생각으로 바라봐주셔야 합니다.

초등 사춘기의 두 번째 특징은 청소년 사춘기보다 직관(直觀)이 살아 있다는 겁니다. 초등학생 때까지는 유아적 인식 능력이 상당 부분 남아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직관력입니다. 어떤 말을 들었을 때 정확한 뜻은 몰라도 말하는 이의 표정, 말투, 손짓 등을 통해 직관적으로 알아듣죠. 부모가 대화하자고 부르는 순간, 정말 대화를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학원 가라고 다그치는 것인지 표정만 보고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부모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짜증을 내며 방으로 들어가 버리지요. 부모로서는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러나…' 싶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미 직관을 통해 부모에게서 압력을 받았다고 느껴버린 거예요.

그래서 초등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는 아이에게 다가가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합니다. 대화를 하자고 했지만 자신의 내면에 다른 의도가 없었는지, 아무리 그래도 부모인 내 생각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단정 지은 채 시작하진 않았는지 말이지요. 사춘기를 맞은 아이들에게 무언가 의도를 품고 다가가면, 그 순간 어떤 형태로든 저항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고학년 담임이 되면 아이들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않고 처음 두어 달 동안은 거의 바라만 봅니다. 아이들의 직관적 판단은 성인이 감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직관적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도록 한동안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 '아, 선생님이 나에게 무언가를 강요할 생각이 없구나' 하는 일종의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졌다고 생각되면, 그때 천천히 다가갑니다. 그럼에도 만만치 않은 저항에 마주할 때가 많지만 말입니다.

저는 학급 아이들에게 1년에 두 번 쪽지를 내주고 점심시간에 면담을 할 테니 고민이 있으면 하나씩 쓰라고 합니다. 면담을 점심시간에 하는 이유는 면담이 꼭 필요한 아이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대부분은 빨리 나가 놀고 싶어서 '고민 없음'이라고 휘갈겨 쓰거나 그마저도 쓸 시간이 없어 '고민 X'라고 써서 던져버리고는 뛰쳐나가거든요. 그 와중에 고민을 써내는 친구는 노는 시간을 포기할 만큼 큰 고민이 있는 겁니다. 그런 아이는 꼭 기억했다가 대화를 해야 합니다.

하루는 일과를 마치고 아이들이 던지고 나간 쪽지를 주워서 한 장씩 보는데, 이런 글이 나왔어요.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안절부절 고민하다가 그 아이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죠.

"지금 아이 학원으로 가세요. 수업 중에라도 데리고 나와서 뭐 먹고 싶은지 물어보시고 갖고 싶은 것도 무조건 사주세요."

그냥 '죽고 싶다'가 아니라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구체적인 장소와 행동이 언급된 것이 불안했어요. 물론 장난삼아 썼을 수도 있지만, 자기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싶다고 했는데 세상이 아무 흔들림 없이 평소대로 돌아가면 아이는 극도의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아이 입장에서, 이런 표현을 했을 때는 세상이 흔들려야 해요. 그래야 스스로 존재감이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없으면 안 되는구나' 하는 구체적인 변화를 느껴야 하는 것이지요.

전화를 끊고도 너무 불안했는데, 밤 11시쯤 아이 어머니에게서 문자가 왔어요. '선생님 말씀대로 맛있는 거 사주고 운동화도 사주었다'고요. '정말 잘하셨다'고 말씀드리고, 다음 날 학교에서 도서관에 전화를 걸어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제가 오늘 너무 중요한 일이 있어서 수업을 할 수가 없어요. 오늘 도서관에서 우리 반 아이들 좀 봐주세요."

전화하는 걸 듣고는 애들이 박수를 치면서 좋아해요. 저는 필요도 없는 서류를 보란 듯이 잔뜩 챙겨서 아이들과 도서관으로 갔습니다. 의도적으로 서류를 떨어뜨리면서 어제 쪽지를 써낸 그 아이에게 좀 도와달라고 했죠. 서류를 같이 들고 상담실에 가서 그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선생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너밖에 없어. 다른 아이들, 수업 같은 거 하나도 안 중요해."

이렇게 정성을 다해 이야기를 꺼냈지만, 아이는 한마디만 내뱉습니다.

"그냥요."

밤새 마음 졸인 걸 생각하니 '욱' 하고 화가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잠시 망설이다 "그래, 그럴 수 있지" 하고 토닥여 도서관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제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저를 감추기 위해서였어요. 이때 제가 뭐라도 된 듯이 아이에게 질문하고, 설명하고, 분석한다면 그 아이는 '선생님은 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라고 느낄 겁니다. 사실입니다. 저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른들은 그런 자신을 인정하고 더불어 감출 필요가 있습니다. 뭐라도 아는 듯 자꾸 묻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들 내면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사춘기를 견뎌낼 힘을 줄 수는 있습니다. 바로 그들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것이지요.

사춘기 시절에는 자존감을 높여줘야 스스로를 지켜내고 견딜 수 있습니다.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표현인데, 흔히 사춘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부르잖아요. 그러나 사춘기는 일탈을 저지르거나 음흉한 행동을 하는 시기가 아니라, 무너졌던 자존감을 스스로 일으켜 세우려고 발버둥 치는 '자존감 회복의 시기'입니다. 그런 시기를 놓치면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아이로 살아가게 되죠. 어쩌다 보니 결혼하고 아이 낳고 부모가 되어 준비도 없이 아이를 키웠는데, 아이가 사춘기를 앞당겨서라도 스스로 어른이 되고자 합니다. 이는 질풍노도가 아닌, 참으로 고마운 시기입니다.

사춘기 아이를 둔 부모의 역할

▲ <엄마를 이기는 아이가 세상을 이긴다>(김선호 지음, 길벗 펴냄). ⓒ길벗
<엄마를 이기는 아이가 세상을 이긴다>(길벗 펴냄)라는 책을 출간하고 주변 선생님들께 나눠드렸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둔 한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제목이 너무 싫어요. 그냥 엄마가 이기면 안 될까요? 저도 이기고 싶어요."

사실 엄마도 힘들고,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죠. '힘든 와중에 자녀 교육을 위해 책도 읽고 강의도 들으면서 노력하는데 대놓고 자신을 이기는 아이로 만들라니, 너무한 거 아니냐?'라는 불만 섞인 이야기를 꺼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학기 초에 있는 학부모 총회 때 꼭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학부모님보다 아이들을 먼저 생각할 겁니다.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 하나하나 신경 쓰고 몰두하는 것만으로도 제 에너지가 모자랍니다. 양해바랍니다"라고 말이지요. 부모님들이 사춘기 자녀 때문에 힘들다고 말씀하시지만, 담임 입장에서 보면 당사자인 아이들이 훨씬 더 힘겨워 보입니다. 사춘기 아이들은 '엄마가 지구에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라고 교과서 모퉁이에 낙서하며 혼자 묵묵히 마음을 달랩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제가 누구 편을 들어줘야 할까요? 저는 무조건 사춘기를 맞은 아이 편입니다. 심지어 저는 학급에서 심하게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면 그 아이를 편애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힘든 시기에는 자신을 바라봐주고 인정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곁에 있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녀에게 '자기 대상'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정신분석에서 '자기 대상'이란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고 지원해주는 든든한 사람이나 사물'을 뜻합니다. 자아정체성을 다시 확립하는 사춘기에 이러한 자기 대상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이 어떤 질문을 해도, 혹은 그간 익히고 배워온 것에 대해 부정해도 자신을 온전히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자아존중감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지요. '아,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구나', '불만으로 가득 찬 상태에서도 나는 존중받을 수 있구나'를 느끼는 순간 아이의 자존감은 튼튼해집니다. 자기 대상의 사물이 컴퓨터나 휴대폰 같은 것으로 가면 중독으로도 빠질 수 있지만, 창조적 결과물을 낼 수 있는 긍정적 자기 대상 사물도 있습니다. 예술가들이 고독하고 힘든 시기에 자기 작품으로 그 시기를 견뎌내는 것과 같죠. 창조적 행위를 통해 만들어진 사물은 힘든 시기를 지나는 자녀의 자존감을 세워줍니다. 왜냐하면 바로 자신이 창조한 것만으로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니까요. 하다못해 요즘 초등학생들 사이에 유행하는 '액체 괴물' 같은 장난감도 긍정적인 자기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계속 새로운 '액괴'를 만들어내거든요.

덧붙여서 말씀드릴 초등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의 역할은 '바라보기'입니다. 자존감에는 '자아 존중감'과 더불어 '자아 존재감'이 있습니다. 인간은 타인이 나를 바라봐줄 때 자신이 존재한다는 걸 느낍니다. 사춘기 자녀와 소통하고 싶다면 어설프게 몇 마디 던지는 것보다는 먼저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보통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고 표현을 하는데요. 예를 들어 집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를 하다가도 문득문득 아이를 그냥 바라보세요. 혹여 바라볼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면, 잠시 눈을 감고 아이가 내는 소리를 들어보세요. 그런 상태로 아주 잠시나마 그냥 머무는 겁니다. 어떤 관여나 참견 혹은 판단은 없지만, 아이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지요. 몇 달 정도 판단 없이 바라보기를 연습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를 있는 모습 그대로 인지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이를 불안이 없는 상태로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저도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컴퓨터 앞에서 바쁘게 일을 하다가도 이따금 하던 걸 놓고 아이들을 그냥 바라봅니다.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고 말이죠. 그러면 아이들 동작 하나하나가 그림처럼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바로 알아차리지요. 지금 누가 화가 났고, 누가 짜증을 내고 있고, 누가 신나게 장난치고 있는지 말입니다. 가끔은 눈을 감고 소리만 듣습니다. 시끌벅적 소란스러운 교실에서 아이들 음성만으로도 많은 것들을 보게 됩니다. 어떤 아이가 아픈지,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지 억양이 조금만 달라져도 감지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이러한 바라봄을 직관적으로 감지합니다. 그러면 자신을 바라봐주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죠. 자신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해석하고 분석하고 판단하고 방향을 정해주는 부모가 아니라, 어떤 상태이든 나에 대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자기 대상과 같은 존재로 느끼게 됩니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효과가 있습니다.
강의를 하러 다녀보면, 부모님들이 사춘기를 맞은 자녀와 소통하는 방법을 알고 싶다고 자주 말씀하시는데요. 사실 사춘기 자녀와 잘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와 대화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부모의 대화 방식이 이렇기 때문입니다.

"오늘 학교에서 어땠어? 반에서 누가 제일 좋아? 오늘 친구랑 재밌게 보냈어? 혹시 스트레스 주는 친구는 없어? 친구 생일잔치에 누구누구 왔어?"

이건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질문'이지요. 조금 더 지나친 분들은 취조를 하시고요. 질문과 취조의 공통점이 있어요. 그 중심이 상대에게 있다는 거예요. 대화의 방향을 자기 자신으로 돌리세요. 자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엄마가 아까 설거지를 하는데 바퀴벌레가 나온 거야! 아, 진짜 이사 가고 싶다. 얼마나 놀랐는지 당장 부동산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런 얘기를 쏟아내시는 거예요. 어느 순간 아이들이 질문을 할 거예요. "부동산이 뭐야?" 하는 객관적인 질문일 수도 있고, "엄만 왜 그렇게 벌레가 싫어?" 하는 주관적인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대화의 물꼬를 터나 가야 합니다.

아이의 반항을 격려해야 하는 이유

마지막으로 사춘기 자녀와 감정적 다툼이 있을 때 부모가 가진 힘이나 권한으로 눌러버리려는 유혹을 견뎌야 합니다. 부모들이 가장 실수를 많이 하는 부분이고, 또 가장 후회를 많이 하는 부분입니다. 사춘기 자녀가 부모에게 대드는 것은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하는데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이 아이가 버릇없어질 것을 염려해 강하게 억누르며 말 잘 듣는 아이로 만드는데 온 힘을 기울입니다. 그렇게 길든 아이들이 성장해서 말 잘 듣는 회사원이 되지요. 뭔가 도전해보고 싶어도 안정적인 길을 찾고, 뭔가 비판하고 싶어도 나서지 않는, 그저 그런 어른이 됩니다.

사춘기의 권리는 무언가를 거부해보는 시도를 하는 것이고, 그러한 과정에서 스스로를 정립해나가는 것입니다. 엄마에게 "싫어!"라는 말도 못 한 채 성장한 아이는 세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 부모들은 "자녀가 말을 잘 듣네요" 하는 말을 들으면, 거의 욕에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그들은 심지어 도서관에서도 시끄럽게 상대방과 논쟁을 벌이지요. 그런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세계의 경제와 정치를 흔들고 역사를 바꾸는 겁니다.

아이들이 사춘기를 잘 보내기 위해서는 부모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부모로서 인정받으려 하지 말 것, 그들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말 것, 판단 없이 바라볼 것. 이 세 가지를 되뇌면서 아이가 부모와 맞설수록 장하게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스스로 독립하고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그들의 용기에 박수를 쳐줄 수 있는 부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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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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