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거부자들, '프리즌 파이브'를 결성하다

[병역거부는 평화운동이다] ① 한국 병역거부자들, 50년 전 반전주의자를 만나다

'징병제 폐지를 위한 시민모임'은 지난 10월 말,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고자 인트레피트 항공모함을 이탈해 스웨덴으로 망명한 크레이그 W. 앤더슨(Craig W. Anderson) 씨를 만났습니다. 이 만남은 50여 년의 세월을 뛰어 넘은 양심적 병역거부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세계는 어떻게 변했는지, 각자 신념은 어떤 것이었는지, 전쟁이란 무엇이고, 국가란 무엇인지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여정의 기록을 독자 여러분과 세 번에 걸쳐 나누고자 합니다. 필자.

#프롤로그

1.
나는 2017년 7월 22일 있었던 오다 마코토(小田実) 추모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오다 마코토 추모 심포지엄은 매해 오다 마코토의 옛 '베헤이렌(ベ平連,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 동료들과 시민운동가들이 개최한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많은 분이 참석해 일본의 평화와 미래에 관해 이야기했다.

특히 이번에는 일독 평화포럼의 오이겐 아이히호른(Eugene Eichhorn) 씨와 한국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씨 등 독일과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한국의 촛불 운동을 비롯해 일본과 아시아 평화운동의 향후 전망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베헤이렌은 1960년대 베트남전 당시 베트남전에 반대해 결성한 시민운동이다. 철학자 츠루미 슌스케(鶴見俊輔)를 위시해 이미 반전 활동을 하던 학자와 문인들이 1965년에 결성하였다. 결성 계기는 미군의 북베트남 폭격(롤링 썬더 작전)이었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당시 폭격의 공포를 아직 기억하던 일본인에게 미군의 북베트남 폭격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좀 더 힘 있는 대중운동으로 거듭나기 위해, 츠루미 슌스케는 당시 인기 작가였던 오다 마코토에게 연락했다. 오다 마코토는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 달라"는 츠루미 슌스케의 부탁을 흔쾌히 승낙했고, 이후 약 10여 년간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 매진한다.

베이헤렌의 경우, 가입과 탈퇴가 자유로웠으며 각 지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를 전개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마치 한국의 촛불시민들처럼.... 1968년경 전국적으로 350여 개에 달하는 베헤이렌이 있었다고 한다. 짧은 기간 지역별 평화집회를 개최한 경우도 있지만, 10년 넘게 이어진 경우도 있다. 그중 일부는 여느 과격파와 다르지 않게 "헬멧을 쓰고 각목을 들고 가두(街頭)투쟁을 벌이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이처럼 베헤이렌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각지에서 투쟁을 전개했다.

도쿄의 사무국과 교토의 경우, 어느 정도 조직을 갖추고 움직였다. 이들에 의해 <뉴욕타임스>에 베트남 전쟁 반대 광고(반전 광고운동)가 실리기도 했다. 또 베헤이렌 구성원 개개인이 방위산업의 상징이 된 '미츠비시 중공업' 주식을 한 주씩 사서 주주총회에 난입하는 운동(1주 주주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한국도 주주총회에 베헤이렌이 입장하자, 미츠비시는 총회 측과 우익 행동대를 동원해 맞대응했다고 한다.

베헤이렌 회원 중 일부는 베트남전에 반대해 탈영한 미군을 해외로 밀항시키는 작업을 했다. 이들은 베헤이렌 내에 '자테크(JATEC, 반전 탈주 미군 원조 일본 기술위원회)'를 결성하고 미군 탈영병을 해외로 탈출시켰다. 이들은 미국에서 흑인 노예를 북부로 탈출시키던 '지하철도(Underground Railway)'를 참고했다. 베헤이렌과 자테크는 1973년 해산 이후에도 각자의 지역과 분야에서 시민운동을 이어간 경우가 많다. 이들 중 일부는 또 '김지하 구명운동'이나 '김대중 구명운동'에 가담해 한국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기도 한다.

▲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베트남 다낭 상륙 장면. ⓒgoogle.com

2.
지난 10월 열린 심포지엄에는 당시 시민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인물들이 모였다. 심포지엄이 끝나고 참석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요시다 카즈오(吉田和雄) 씨가 나와 나의 옛 동료인 양성택(가명) 씨를 따로 불렀다.

요시다 씨는 1960년대 당시 베헤이렌 활동가였고, 베헤이렌의 후신 조직이라 할 수 있는 '시민의의견 30·도쿄' 모임(市民の意見30の会·東京)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시민의의견 30은 베헤이렌처럼 광고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 단체는 2015년 8.15 광복절에 "한국인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라는 광고를 <동아일보> 전면에 실은 적이 있다. 우리에게는 놀라운 이야기였다.

"올해는 1967년 인트레피드를 탈출한 4명이 일본을 떠난 지 50년이 되는 해다." 요시다 씨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꺼내며 운을 뗐다.

1967년 10월 23일 네 명의 미 해군 병사들이 요코스카에 기항 중이던 항공모함 인트레피드에서 빠져나온다. 이들은 베헤이렌의 도움으로 비밀리에 소련 상선에 밀항, 스웨덴으로 망명했다. 한 편의 첩보영화 같은 이야기다.
요시다 씨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당시 망명을 떠난 4명의 병사 중 크레이그 앤더슨 씨와 최근 연락이 닿았다. 그래서 50년 만에 그를 일본으로 초청하여 10월 28일에 강연회를 진행하려고 한다. 그러니 한국 병역거부자들과 함께 참석해 달라.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으면 좋겠다."

분명 뜻깊은 자리가 될 것 같았다. 5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병역을 거부한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니....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동안 알고 지내던 병역거부자들에게 연락을 했다.

한국의 병역거부 운동은 2000년대 들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에는 특정 종교인을 중심으로 이뤄졌지만, 2000년 이후 정치적인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는 이들이 생겼다. 이들은 한국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군사문화를 거부하고, 평화와 인간의 권리를 위해 병역을 거부했다.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촛불 시위를 강경 진압할 수 없다"며 병역거부를 선언한 이길준 씨, "국가가 강제로 부여한 역을 거부한다"는 관점으로 병역을 거부한 안지환 씨 등 병역거부의 이유는 점점 다양화되었다. 2010년에는 병역제도에 동의하지 못하겠다며 병역을 거부하는 일도 발생했다. 급기야 2013년 이예다 씨가 병역거부를 사유로 프랑스에서 난민 지위를 획득 , 한국 징병제의 실상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의 평화운동가 단체 '전쟁없는 세상'이 이런 병역거부 운동의 산실이 되었다. 이들은 국내에서 병역거부 수감자 지원 활동을 하며, 신념에 따라 1년 6개월가량 수감생활을 선택한 이들을 도왔다. 그 외에도 노동당 당원이자 병역거부자인 이들이 생겼다. 노동당은 정기적으로 '도망자들'이라는 병역거부자 모임을 열고 있다. 나는 이 두 곳에 연락해 10월 크레이그 앤더슨 씨 강연에 함께할 이들을 모았다.

#사전모임

1.
한국의 병역거부자를 모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평범하게 사회인으로 살아가고 있어 눈에 띄지 않지만, 평화운동에 관련한 이들 중에는 병역거부자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없는세상에서 만난 박정경수 씨, 강길모 씨와 연락이 닿았다. 그리고 노동당 '도망자들'에서 최기원 씨, 박정훈 씨, 박유호 씨도 함께했다. 이들 중에는 일본과 연대 활동으로 내부 사정에 잘 아는 사람도 있었지만, 일본의 복잡한 상황을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더군다나 베헤이렌과 자테크는 국내에 거의 알려진 바가 없어 생소했다. 일본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반전·평화운동인데, 국내에는 알려지지도 않았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10월 10일 우리는 서울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나에게는 시민의의견 30에서 보내준 자료가 있었고, 우리는 함께 읽었다.

크레이그 앤더슨 씨는 알려진 대로, 다른 3명의 탈영병과 함께 신주쿠 근처를 떠돌았다. 이들은 대학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닌 19~20세의 평범한 미국 젊은이들로, 한 번의 베트남전 파병 경험이 다였다. 딱히 반전사상이나 평화주의가 있던 것도 아니었고, 그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이 전쟁은 잘못되었다'는 판단으로 탈영을 결심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들은 무작정 신주쿠의 '후게츠도(風月堂)'라는 음악다방을 찾았다고 한다. 후게츠도는 당시 외국 관광 안내서에 '도쿄의 그리니치 빌리지'라고 불릴 정도로, 히피와 예술가들, 그리고 반체제 활동가들이 뒤섞인 기묘한 곳이었다. 4명의 탈주병 중 2명은 후게츠도의 히피들과 어울리며 지하도에 앉아 소주를 마시곤 했다. 이들은 여기에서 평범한 일본 대학생 야마다 켄지(山田健司, 현재 작고) 씨를 만나 베헤이렌과 연결된다.

베헤이렌은 기본적으로 시민운동이었고, 당파와 소속과 관계없이 누구나 가입할 수 있으며 지역에 지부를 세울 수도 있었다. 초기에는 좌익부터 우익까지 모였지만, 이후 정당 관료주의에 반대하거나 좌파 진영의 중국 핵실험 용인에 반발해 탈당 또는 제명된 사람들도 유입되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직접 나서서 할 것", "다른 사람의 의견에 이러쿵저러쿵 말하기보다 좋은 제안이 있으면 자신이 먼저 할 것"이라는 오다 마코토의 격언에 따라 각자의 방식으로 각지에서 투쟁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누가 정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나름대로 행동했다.

이런 느슨한 분위기 덕에 4명의 탈영병도 재워주고, 먹여주고, 숨겨주는 것이 가능했다. 이제는 노년이 된 베헤이렌 활동가를 만났을 때도 "전쟁은 당연히 반대해야 하는 거고,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함께 도와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에 놀랐다.

베헤이렌 활동가들은 개개인 성향이 굉장히 다양한데, 일단 모여서 움직일 때는 적당히 절충되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래서인지 베헤이렌이라는 '집단'은 완전히 하나로 묶을 수 없다.

2.
나는 참가자들에게 이 행사는 과거 병역거부자의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병역거부자와 평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 말했다. 한국의 상황과 일본의 상황을 어떻게 엮어 이야기 것인지, 현재 동아시아의 상황에 대해 어떤 논의를 할 것인지,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야기를 언급할 것인지 등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특히 일본의 평화운동과 오랫동안 연대해 왔고, 국내에서도 평화운동을 지속해온 박정경수 씨가 중요한 지점을 짚어주었다.

일본의 평화운동은 몇 가지 흐름이 있다. 그중 가장 큰 줄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평화헌법 9조'를 지키는 흐름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일본 내 미군기지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그를 위해서는 어떤 시각을 가진 단체에서 하는 행사인지 좀 더 알고 갈 필요가 있었다. 박정경수 씨는 이에 대한 설명을 원했다.

이번 행사 주최자 중에는 현장에서 활동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연령대가 높을 뿐 아니라 학자나 문필가, 예술가가 많다. 그래서 참가자들에게 평화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보다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평화헌법 9조를 지키는 '9조의 모임'과도 관련이 있으며, 베헤이렌과 자테크의 주요 인물이었던 요시오카 시노부(吉岡忍)씨 같은 경우는 평화운동과 반(反) 빈곤운동 웹진인 <매거진 9>의 발기인이기도 하다.

일단 이번 여정이 과거와 현재의 만남이고, 동시에 새로운 세대와 과거의 평화운동이 만나는 자리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사회운동이 군사독재의 긴 암흑기로 인해 세계사적 맥락에서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68혁명'도 비껴갔고, '여성 해방운동'도 비껴갔다. 한국에서 반(反) 권위적이고 다원화된 운동은 90년대가 되어야 등장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마저도 '냉전 붕괴'와 'IMF 시대'로 인한 탈(脫) 정치적 흐름 때문에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를 짚지 못하고, 현재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크레이그 앤더슨 씨는 지난해 12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새로운 반전세대와의 연대를 기대한다"고 밝힌 바 있다. 우리는 시민의의견 30에서 보내준 회지에 실린, 나고야 시립대학의 히라타 마사키(平田雅己) 교수가 쓴 앤더슨 씨에 대한 글을 읽으며 만남을 기대했다.

일본에 출발하기 전, 나는 앤더슨 씨와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그는 한국의 병역거부자와의 만남을 굉장히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 1967년 당시 망명에 성공한 인트레피드의 4인. 왼쪽에서 두번째가 크레이그 앤더슨 씨. ⓒ전쟁없는세상

#출국

1.
우리는 10월 26일 저녁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밤 도쿄를 가로질러 코엔지로 향했다. 나의 오랜 친구이자 책 <가난뱅이의 역습>으로 잘 알려진 마쓰모토 하지메(松本哉) 씨가 운영하는 '마누케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아마미야 카린(雨宮処凛) 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마미야 씨는 일본의 르포 작가이자, 반빈곤네트워크 부대표로, 프리타 전반 노동조합(フリーター全般労働組合) 조합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나는 5명의 한국 병역거부자와 함께 코엔지의 작은 오키나와 술집으로 향했다. 이들 중 3명은 '알바노조' 조합원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이 자리는 한국의 알바노조와 일본의 프리타노조의 역사적인 만남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환영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침 오키나와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일본인 친구가 모두에게 오키나와 소주인 '아와모리'를 권했다. 우리는 느슨한 분위기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정규직 모임이자 청년 빈곤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두 노조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프리타노조는 비정규 노동자와 무직자가 모인 개인 가맹 노동조합이다. 이들은 주로 불안정 노동(프레카리아트, precariat)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일본이든 한국이든 젊은 세대들이 충분하지 못한 급여와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에 놓여있기는 마찬가지다. 아마미야 씨에게 기형적인 징병제하에서 턱없이 부족한 급여와 인권침해적인 근무환경에 놓인 한국의 사례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심지어 병역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1년 6개월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아마미야 씨로 하여금 외면할 수 없는 문제였다. 아마미야 씨는 오랫동안 한국 징병제 반대운동의 가장 강력한 조력자였다.

아마미야 씨를 비롯한 알바노조 노조원들은 한국이든 일본이든 많은 기업들이 사회 초년생이나 아르바이트생이 노동 관련법을 잘 모른다는 이유로 많은 착취를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문제가 징병제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군대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알다시피, 아무것도 모른 채로 군대에 간다. 입대자 중 누군가는 가정환경으로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도 모른 채 복무하고, 건강상 심각한 문제가 있어도 자기 권리를 찾을 방법을 몰라 복무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불안정 노동과 한국의 징병제는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다. 이를 해결할 방법이 구조적으로 은폐되어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나는 아마미야 씨에게 "이번 행사는 '인트레피드 4명(Intrepid Four)' 중 한 명이 오고, 그가 한국에서 온 5명의 병역거부자와 함께하는 역사적으로 뜻깊은 자리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마미야 씨는 "그렇다면 이 5명을 '프리즌 파이브(Prison Five)'라고 부르는 게 어떻겠는가"리고 제안했다. 순식간에 한국에서 온 병역거부자들은 '프리즌 파이브'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