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증약은 대증요법에만!

[김형찬의 동네 한의학] 장기전과 단기전

"약은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쓰는 것이 좋거든요. 그런데 약에 의존하기만 했지, 건강해지기 위한 노력은 안 하셨잖아요. 그렇게 여러 해 지나다 보니 또 다른 문제가 생겼어요. 이번 기회에 주치의 선생님하고 처방약에 대해 진지하게 의논하고, 건강을 회복하는데 초점을 두고 노력을 좀 하시면 좋겠습니다. 시대가 바뀌어서 예상보다 오래 사실수도 있거든요. 훗날을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습니다."

손쉽게 약을 구할 수 있는 시절 탓인지는 몰라도 상담하다 보면 여러 가지 이유로 약을 남용하는 환자가 참 많습니다. 우리의 의료 접근성이 뛰어나다고 좋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아프면 빨리 낫고 일하러 가야하는, 말하자면 한가하게 앓을 여유도 없이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프면 뒹굴 거리면서 간호도 받고, 엄살도 좀 부리면서 몸이 스스로 회복하길 기다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특정한 증상이 있을 때 그 증상만을 없애기 위한 약을 대증약이라고 합니다. 열이 날 때 열을 떨어뜨리는 해열제나, 염증이 있을 때 염증반응을 차단하는 소염제가 대표적입니다. 흔히 ‘대증약’ 하면 양약을 떠올리지만, 한의학에도 병의 초기나 병세가 급할 때는 증상을 없애는 데 초점을 둔 처방이 많이 존재합니다. 이 또한 일종의 대증약입니다.

대증약은 단기전에는 매우 효과적입니다. 증상을 차단해주면 우리 몸이 병에 충분히 대응할 시간을 갖고 건강을 회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병이 만성화되거나, 증상의 원인이 노화와 관련되었거나, 환자의 몸 상태가 스스로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면 대증약은 기대한 만큼 효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모름지기 약이라고 하면 일정 기간 내 증상을 개선하고 물러나야 하는데, 계속 주둔하거나 또 다른 증상에 대응하기 위해 증원군을 요청하는 상황이 됩니다. 그런데 이 증원된 병력으로도 전황은 개선되지 않고 교착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야흐로 장기전에 접어드는 것이지요.

염증반응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염증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현상입니다. 감염과 같은 유해한 외부요인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 몸은 적극적으로 염증반응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대개는 일시적 염증 반응 이후 정상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이 때 과도한 반응과 이로 인한 통증과 열 등을 조절하기 위해 약물을 씁니다. 그러면 좀 더 수월하게 이 과정이 마무리 되지요.

그런데 세포의 노화가 진행되면 이 염증반응을 일으키는 신호가 외부의 감염뿐만 아니라 세포내부에 대해서도 발생하게 됩니다. 즉, 외부의 요인을 제거하면 좋은 상태로 돌아가는 시절과는 상황이 달라진 겁니다. 하지만 우리 몸은 동일하게 염증반응으로 대응하고, 대증약물이 지원군으로 등장합니다. 과거에 이 전략은 승리의 영광을 안겨주었으니까요.

문제는 노화로 손상된 세포에서는 지속적으로 염증을 유발하는 신호들이 새어나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신호는 만성적인 염증반응을 유발합니다. 노인들이 여기 저기 자꾸 아픈 것은 이런 요인이 큽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증약으로 문제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먹으면 좀 낫다가 안 먹으면 다시 아픈 상황이 반복됩니다. 약의 가짓수와 양을 늘려보지만 전황은 크게 개선되지 않습니다. 약이란 게 순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 무작정 대증약 처방에 의존하다가는 다른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생활의 질도 저하됩니다. 전투는 이제 장기전의 양상으로 접어든 것이지요.

전투가 장기화 되면 전력을 유지하기 위한 보급과 적절한 휴식의 중요성이 커집니다. 충분한 영양 섭취와 질 좋은 수면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를 기본으로 양공법을 써야 합니다. 드러난 증상을 개선하면서 한편으로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부분의 복구를 도모해야 합니다. 한의학은 병의 증상을 제거하는 사법(瀉法)과 기능을 회복하는 보법(補法)을 겸하면서 전투의 부산물인 담음이나 어혈을 제거하는 치료법을 적절하게 섞어서 구사합니다. 이 단계에서 영양섭취가 부족하거나, 병종에 따라 추가 섭취가 필요한 영양분이 있다면 자신에게 필요한 영양보충제를 함께 복용하는 것도 좋습니다.

전황이 나아지면 허물어진 성벽을 다시 견고하게 해서 내부에서 새는 문제를 복구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식사와 수면, 그리고 적절한 신체활동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한의학의 양생법이나 건강수명의 연장을 위한(養性延年) 처방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내부에서 발생하는 산화적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이지요.

병을 잘 치유하기 위해서는 병 자체만이 아니라, 그 병이 발생한 사람이란 환경 또한 함께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상황이 단기전으로 끝낼 상황인가, 아니면 장기전의 전략이 필요한 상황인가를 잘 판단해야 합니다. 총력전을 벌여야 하는 포스트시즌의 전략을 정규시즌에 쓰면 팀이 초반에는 잘 나가는 듯싶지만, 그 순간의 재미에 빠지면 결국에는 승률이 떨어지고 팀은 부상병동이 되는 것처럼, 단기전의 전략은 장기전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 반대의 상황도 마찬가지이지요.

앞서 예로 든 환자에게 제가 말한 것처럼,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예상보다 오래 살 확률이 커졌습니다. 건강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격적인 단기 전략과 방어적인 장기 전략을 효과적으로 구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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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찬

생각과 삶이 바뀌면 건강도 변화한다는 신념으로 진료실을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텃밭 속에 숨은 약초>, <내 몸과 친해지는 생활 한의학>, <50 60 70 한의학> 등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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