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그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을 제기한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질문 자체가 답변을 위한 조건이 이미 형성되고 있거나 완성되었을 때에만 제기되기 때문이다. 질문이 제대로 던져지기만 한다면, 올바른 대답을 찾아내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할 수 있다.
GM은 과연 한국에서 철수할 것인가? 최근 가장 자주 들어본 질문 중 하나이다. “예” 또는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는 간단한 질문이다. 앞에 거창하게 시작한 <인사이드 경제>의 개똥철학에 따르자면 대답이 가능해야 할 텐데?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종류의 답변은, 틀릴 가능성은 없지만 비겁하다. 지금 시점에서 답변은 앞으로 발생할 여러 사건들을 풀기 위한 실마리 역할을 해줘야 한다. 그래서 좀 무모해 보이더라도 “예” 또는 “아니오”로 답변해 보겠다.
GM은 한국에서 ‘철수’하지 않는다
산업은행이 보고서에서 언급한 ‘GM의 한국 철수’가 언론에 대서특필 되자, 한국GM 측은 “한국에서 사업을 지속할 것”이라며 적극 부인하고 나섰다. <인사이드 경제>가 보기에 한국GM의 해명은 사실에 가깝다.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설명해 보기로 한다.
첫째, 한국GM은 부평, 창원, 군산에 완성차 생산라인을, 보령에 변속기 생산공장을 갖고 있다. 한국GM이 직접고용한 노동자만 1만6000명에 달한다. 이 정도 규모의 완성차 해외법인이 한순간에 ‘먹튀’를 하고 나가는 것은 가능성이 매우 낮은 얘기이다. 세계 자본주의 역사상 (세계 대전 수준의 사건이 아니고서는) 이런 규모의 먹튀는 존재해본 적이 없다.
둘째, 글로벌 GM 입장에서 한국은 ‘생산기지’ 이상의 의미가 있다. 작년에만 18만 대 판매를 기록하는 등 한해에 15만 대 이상의 차를 한국 내수시장에서 팔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정도 내수 판매량은 글로벌 GM에서 Top 10 안에 들어오는 수치이다. (다만, 이 수치에는 쉐보레 임팔라․카마로 등 1만2000대에 달하는 수입차 판매량도 포함되어 있다.)
순위 | 국가 | ‘16년 판매 |
1 | 중국 | 391.3만 |
2 | 미국 | 304.2만 |
3 | 브라질 | 34.5만 |
4 | 멕시코 | 30.8만 |
5 | 영국 | 28.8만 |
6 | 캐나다 | 26.7만 |
7 | 독일 | 25.9만 |
8 | 한국 | 18.0만 |
9 | 우즈베키스탄 | 11.4만 |
10 | 이탈리아 | 10.1만 |
11 | 아르헨티나 | 9.9만 |
12 | 스페인 | 9.6만 |
13 | 호주 | 9.4만 |
14 | 프랑스 | 7.5만 |
15 | 콜롬비아 | 6.0만 |
글로벌 GM 판매량 총계 | 999.8만 |
▲ 각국 자동차공업협회 홈페이지, GM 보도자료, 언론 보도 등 종합
특히 글로벌 GM은 올해 유럽 자회사 오펠(Opel)을 푸조시트로앵(PSA) 그룹에 매각한 상태여서 사실상 유럽사업을 접은 상태이다. 따라서 위 판매량 데이터에서 유럽 국가들(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은 사라질 운명이다. 그렇게 되면 글로벌 GM 사업에서 한국 내수시장 판매량은 곧바로 6위로 뛰어오르게 된다.
쉐보레 브랜드만 보면 한국 내수시장 판매량은 글로벌 Top 5에 랭크된다. 이 정도 규모의 내수 판매를 기록하는 나라에서 단번에 철수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판매량 9만4000대로 13위를 기록한 호주에서 GM은 올해 연말까지만 애들레이드 공장을 가동하며 앞으로는 공장을 폐쇄한다.
셋째, 이 부분이 매우 결정적인 대목인데, 글로벌 GM이 사용하는 문법이 보통 사람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이다. 단순히 공장 가동을 중단하는 것만이 아니라, 해당 국가의 내수시장에서도 빠져나갈 때에만 ‘철수’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를테면 앞서 사례로 들었던 호주의 경우, 생산공장은 폐쇄하지만 GM 차량의 판매는 유지할 계획이다. 아마도 독일에서 차량을 만들어 호주로 수입해 판매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러나 GM은 호주에서 ‘철수’한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공장 폐쇄 결정 직후에 “우리는 호주에 남는다(We are here to stay)”는 광고까지 만들어 홍보한 적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3년 전에 썼던 <인사이드 경제> 기사 참조 ☞ GM, 공장 폐쇄 발표 후 '안 떠난다' 광고…한국서도? GM 호주법인이 만들었던 광고 동영상 바로가기 ☞ We're Here To Stay)
반대로 인도의 경우 2개의 생산공장 중 할롤 공장은 가동을 중단한 뒤 상하이차에 매각하고, 나머지 1개인 테일가온 공장에서는 수출물량만 생산한다. 즉, 인도 내수시장 판매는 조만간 중단될 예정이다. 수출물량만 생산한다 할지라도 인도에서 공장 1개를 가동하기 때문에, 이 경우에도 GM은 '철수'한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즉, GM이 한국에서 '철수'라는 표현을 공식 사용한다면, 부평․창원․군산․보령의 생산공장을 모조리 폐쇄 또는 매각하고 내수시장에서도 더 이상 GM 차량을 판매하지 않는 상황에서만 그럴 거라는 것이다. 이 모든 행위가 당장, 한꺼번에 벌어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 상황 아닌가.
질문이 제대로 던져져야 한다 : 철수만 안 하면 다 괜찮은가?
이러니 매번 'GM 철수설'이 불거지면 GM 측은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발뺌을 한다. 만약에 공장가동률이 가장 낮은 군산공장의 가동을 중단한다 해도, 다른 공장은 가동을 계속하고 있으므로 "철수할 생각 없다"고 답변을 한다. 모든 생산시설을 폐쇄 또는 매각한다 해도 한국에서 GM 차량 판매가 유지되는 한 "철수가 아니다"라고 얘기할 것이다.
질문을 좀 다른 각도에서 던져보자. GM이 한국에서 '철수'만 하지 않으면 다 괜찮은 것인가? 눈치 빠른 독자들이라면 <인사이드 경제>의 질문 의도를 이해했을 것이다. ‘팩트 체크’가 아니라 ‘프레임’을 던지며 해법을 찾아가자는 것이다.
'철수'라는 프레임 안에서라면 글로벌 GM은 아주 손쉽게 빠져나갈 수 있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 철수할까?"라는 질문은 GM에게 너무 쉽다. 철수 안 한다고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생산시설 폐쇄와 내수시장 판매 중단을 당장 한꺼번에 할 생각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럼 도대체 글로벌 GM은 한국GM을 어떻게 할 생각이란 말인가? 제멋대로 쉐보레 유럽도 철수하고, 러시아 사업도 철수하고, 그 비용을 모조리 한국GM에게 떠넘기고, 그러는 사이 지난 3년 동안 무려 2조의 적자를 기록해 이제 자본잠식 상태에 빠졌고, 신차 배정과 물량 배정도 없고, 틈만 나면 사무관리직 희망퇴직으로 뒤숭숭한 분위기를 만들면서 말이다."
그렇다. 역설적이지만 지금 던져야 할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도대체 GM은 한국 사업을 어떻게 할 생각인가 말이다. GM은 한국에서 철수하지 않는다. 이것이 곧 장밋빛 미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사업과 일자리를 축소하고, 적극적인 구조조정을 일삼고, 비정규직 쫓아내고 하더라도 ‘철수’만은 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GM의 글로벌 전략을 알아야 한다. GM이 움직이는 방식은 철저히 글로벌 전략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한국 노동자들 입장에선 억울할 수밖에 없지만, GM은 한국의 상황만을 놓고 한국 사업계획을 짜지 않는다. 그리고 최근에, GM의 향후 글로벌 전략을 짐작하게 하는 차트 한 장이 공개된 바 있다.
GM의 글로벌 전략을 보여주는 한 장의 차트
GM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라면 누구나 3개 지역에 대한 전략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한다. 견고한 자동차 설계와 생산을 해온 유럽 대륙, ‘빅 3’로 유명한 미국 등 북미 대륙, 세계의 공장이자 가장 많은 자동차 판매를 기록하고 있는 중국이다.
그런데 GM이 갑자기 올해 3월에 유럽 사업을 정리하고 푸조시트로앵(PSA) 그룹에 자회사 오펠(Opel)을 매각한다는 발표를 하게 된다. 세계적인 완성차업체가 유럽 사업을 포기한다니, 충격적인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당시 GM은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차트 한 장을 공개했다.
글로벌 GM의 향후 투자계획을 나타내는 위 차트를 보면 가로 축은 수익잠재력(Profit Potential), 세로 축은 GM의 브랜드 파워(GM Franchise Strength)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즉, 매출 규모나 생산 규모가 아니라 수익성과 브랜드 파워를 제1의 기준으로 투자계획을 수립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여러 사업부문을 3가지로 구분하고 있는데, 초록색은 성장가능성을 높게 보아 투자를 늘리고, 붉은색은 성장가능성이 낮아 투자를 축소하며, 검은색은 성장가능성이 없어 철수하는 사업부를 의미한다.
성장가능성이 가장 높게 평가되는 부분은 북미지역 SUV/트럭(NA Truck/SUV)과 중국 시장이다. 금융부문인 GM파이낸셜과 AV/TaaS(자율주행, 미래형 대중교통 서비스) 부문 역시 우선 순위로 꼽히며, 브랜드 파워가 충분치는 않지만 높은 수익성을 보이는 상용차(Commercial Vehicle)와 캐딜락 부문도 투자 우선 순위에 포함된다. 남미시장의 경우 불확실성이 약점이긴 하나 높은 점유율과 브랜드 파워를 바탕으로 투자를 늘릴 계획이라 한다.
반면 북미지역 승용차 부문(NA Car)의 수익성 악화로 투자 순위가 하향 조정되며, 일부 GMI 부문(Select GMI Market)은 수익성, 브랜드 파워에 따라 선별적 투자계획 수립을 예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수익성, 브랜드파워 모두 낮은 것으로 나타난 오펠/복스홀(유럽사업)과 쉐보레유럽, 러시아 사업은 철수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한국GM은 위 차트에서 붉은색으로 표시된 GMI(GM International)에 속해 있다. 즉, 투자 순위의 하향 조정 대상이라는 것이다. GMI에 속해 있는 대표적인 국가들이 호주, 남아프리카공화국, 태국,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중동 등인데 실제로 이들 나라의 GM 사업은 최근 매우 급격한 구조조정을 겪은 바 있다.
우선 호주에서는 생산공장을 올해 연말에 폐쇄할 계획이다. 인도네시아 공장은 이미 폐쇄된 상태이며, 남아공에서도 GM은 사업 철수 결정을 내렸다. 인도의 경우 2개의 생산공장 중 1개를 상하이차에 매각했고, 나머지 1개 공장은 수출물량만 생산하며 내수 판매를 중단한다. 태국의 경우 조만간 승용차 생산을 중단하고 상용차와 SUV 생산만 할 계획이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실 한국GM 역시 위의 계획에 따라 상당한 구조조정을 겪은 사업부문이라 할 수 있다. 쉐보레 유럽과 쉐보레 러시아는 본래 한국GM의 자회사 형태로 운영되던 곳이라 GMI 소속이었다. 그런데 모두 ‘철수’ 결정이 내려졌고 수천억의 철수 비용을 한국GM이 부담한 바 있다.
현재까지는 GMI 소속 사업부문 중 베트남과 우즈베키스탄, 중동사업부만이 그나마 구조조정 여파에 휘말리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종합해 보자면 글로벌 GM은 한국GM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진행하는 중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미 극동군 사령관 겸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한국전쟁의 전술을 놓고 미국 정부와 의견 충돌을 겪다가 결국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며 퇴임하게 된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갈 뿐.(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그가 상륙작전을 감행했던 인천(!)에 본사를 두고 있는 한국GM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그의 퇴임사를 한번 패러디해보자.
"GM은 한국에서 철수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존재를 조금씩 지우고 있을 뿐."
불사신도 아니고 슈퍼 히어로도 아닌 바에야 노병(老兵)은 언젠가 죽을 운명이다. GM 역시 한국에서 100년, 200년, 영원히 철수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조금씩 지우는 과정에 수십만 한국 노동자들의 운명이 걸려 있다.
따라서 GM이 한국에서 철수하지 않는다는 말은, 답변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GM은 (철수가 아니라) 한국GM에 대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하려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구조조정의 폭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이 구조조정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나중에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글의 맨 앞에서 모든 질문은, 적절하게 제기되기만 한다면, 올바른 답변이 가능하다고 적었다. 사실 이 얘기 역시 <인사이드 경제>의 독창적인 워딩이 아니라 패러디이다. 적절한 질문이 제기되었고, 답변도 찾았다. 그런데 그 답변은 이제 ‘구조조정’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제기하게 되었다. <인사이드 경제>는 앞으로 독자들과 함께 이 과제에 대한 해결책도 찾아보려 한다.
"인류는 그가 해결할 수 있는 과제만을 제기한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과제 자체가 그 해결을 위한 물질적 조건이 이미 존재하거나 또는 적어도 생성과정에 있을 때에만 출현하기 때문이다." (칼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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