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XX 간첩이지?" 따귀가 날아왔고 나는 거짓자백했다

국정원 합신센터 허위 자백으로 3년 복역한 탈북자 허우식 씨 이야기①

정부가 국가정보원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가공작원'으로 전락해버린 정보기관의 기상을 다시 세우기 위한 작업이다. 국정원이 국민의 신뢰를 잃은 중대 사건 중 하나가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이었다. 탈북자 조사기관인 중앙합동신문센터(현 북한이탈주민센터)에서 국정원 직원들은 유가려 씨의 거짓 자백을 유도해 오빠 유우성 씨를 하루아침에 간첩으로 만들어냈다. (☞관련기사 : 유우성 간첩조작사건, 반드시 풀어야 할 의혹 네 가지)

이 기막힌 조작극의 희생양은 유 씨 남매만이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유가려 이전에 또 다른 합신센터 피해자가 있었다. 3회에 걸쳐 지난 2011년, 자유를 찾아 남한에 왔다가 간첩 누명을 쓰고 3년 간 옥살이한 허우식(가명) 씨의 사연을 소개한다. 허 씨와 유가려 씨의 증언을 비교해보면, 국정원의 '간첩 생산 시스템'이 얼마나 체계적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시흥에 위치한 북한이탈주민센터(구 중앙합동신문센터). ⓒ프레시안(최형락)

'형이 보위부 끄나풀' 소문이 불러온 나비효과

"북한에선 거의 군대에만 있었죠. 제가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거든요."

허 씨는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중국에서 오셨던 분이라 사회적 입지는 더더욱 좁았다. 입당도 어렵고 출세할 길이 마땅치 않던 그는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군에 입대했다. 요직은 아니지만 차근차근 중급병사, 소위를 거쳐 장교에 해당하는 군관 배지까지 달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갈증을 느꼈다. 하루빨리 발전해서 가족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힘 있는 집안과 결혼하는 것뿐이었다. 군 생활 도중 아는 분을 통해 중매로 결혼을 했다.

아직은 어렸던 스물일곱, 출세하려는 마음에 서둘러 했던 결혼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장모는 허 씨가 근무하는 부대가 유지‧경비 업무를 하는 군 보안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가가 소위 말하는 '갑질'을 했어요. 저를 욕하는 건 참을 수 있었어요. 근데 저희 집안을 욕하더라고요. '시집이 못 산다'면서 험한 말을 하니까 참을 수가 없었죠."

이렇게 살 바에야 이혼하고 어머님이 계시는 고향으로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북한에는 김일성이 만든 '가정혁명화 방침'이 있었다. 이 방침상 군 장교는 이혼을 하게 되면 '불명예 제대'를 해야 했다. 가정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은 대원들도 책임지지 못할 것이므로 군에서 나가야 한다는 논리다. 불명예 제대를 하면, 어지간한 직장에는 들어갈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탄광이나 농사일 정도다. 사람들의 인식도 좋지 않아 사회적 고립도 감수해야만 한다. 낙오자가 되는 셈이다.

어떻게든 가정 생활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처가의 갑질은 심해졌다. 장모는 허 씨가 자신의 아버지 환갑을 축하해드리기 위해 아내를 데리고 고향에 가려 하자 이를 막았다. 심지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조차도 아내를 데리고 가지 못하게 했다.

결국 이혼 수순을 밟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불명예 제대를 했다. 그에 대한 대가는 상상 이상으로 더 혹독했다. 취직은커녕 소문이 날까 봐 집 밖에 나가는 것 자체가 꺼려졌다. 생계 수단이 절실했다. 국경 근처인 함경북도 온성에 살았던 그는 불법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남한이나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이 북에 남은 가족에게 보내는 돈을 대신 받아주는 송금 브로커 일이었다.

불법 송금 브로커는 원래 허 씨의 형이 하던 일이었다. 허 씨의 형은 브로커 일을 하면서 수도 없이 북한 보위사령부에 적발됐다. 잡혀가서 종종 고문을 받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뒷돈을 먹여서 쉽게 빠져나왔다. 이런 일이 숱하게 반복되다 보니, 동네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형이 보위부 끄나풀이라고 쑥덕대더라고요. 보위부에 잡혀 들어갔는데도 잘 나오고, 또 실제로 하도 많이 보위부를 드나들다 보니까 거기에 잘 알고 친해진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그런 소문이 난 거죠."

그 소문이 훗날 남한에 온 허 씨의 발목을 잡을 줄 그땐 미처 생각지 못했다.

▲두만강변. ⓒ연합뉴스

그러던 어느 날, 허 씨의 형이 또 보위부에 잡혀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엔 갇혀 지내는 시간이 길었다. 형이 집에 돌아오기까지 꼬박 석 달이 걸렸다.

"형을 보는데, 정신이 바짝 들었어요. 내가 이 땅에서 살다 보면 계속 형처럼 살아야 할 텐데, 그럼 나도 매번 보위부에 끌려가서 매 맞으면서 살아야 하는 건가 싶었어요. 형은 운이 좋았지만, 일단 잡혀 들어가면 언제 나온다는 보장이 없거든요."

북한 생활에 지독한 회의가 든 허 씨는 한국으로 간 탈북자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수화기 너머 그들은 "여기서는 본인이 열심히만 일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 꼭 오라"고 했다.

허 씨는 예전에도 이미 탈북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한창 아내와 사이가 안 좋을 무렵, 아버지 친구분이 허 씨에게 함께 두만강을 건너자고 한 것이다. 당시는 제대 전이었고, 또 어머니가 만류했다. 그래서 아버지 친구분께 '지금은 못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럼 내가 한국에 넘어가서 일 년 후에 소식을 띄우겠으니 내 아들과 함께 넘어와라'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 일 년 사이 상황이 바뀌었어요. 말 그대로 짐승만도 못한 생활을 하게 된 거죠. 북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된 겁니다."

하지만 당장 떠날 수는 없었다. 형이 또다시 보위부에 적발된 것이다. 형이 없으면 집안 식구들 생계가 막막했다. 늙은 어머니가 산밭에서 따온 옥수수로 끼니를 때우거나 그것도 떨어지면 외상으로 쌀을 빌려와 생활해야 했다. 허 씨는 형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브로커를 구하는 등 남한으로 갈 준비를 했다.

한참 후에야 형이 집에 돌아왔다. 몸에는 여기저기 맞아터진 흔적이 남았다. 간에 복수(腹水)가 찼다고 했다.

"형이 울면서 '너라도 넘어가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먼저 남한에 가서 자리를 잡으면, 형과 어머니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허우식(가명) 씨는 지난 8일 기자와 만나 합신센터에서 있었던 피해 사실을 털어놓았다. ⓒ프레시안(서어리)


"마약죄로 감방서 20년 살래? 아니면 간첩죄로 3년 살래?"

2011년 6월 7일 허 씨는 드디어 고향을 등지고 중국으로 향했다. 탈북자들은 보통 태국이나 라오스를 거쳐 한국에 들어간다. 허 씨는 태국으로 갔다. 2011년 6월 19일 태국에 도착한 그는 난민 절차에 따라 방콕 이민국 감호소에 수용됐다.

여기서는 '예비 조사'가 이뤄졌다. 국가정보원 직원은 허 씨에게 탈북 동기를 물어본 뒤, 보위부에 아는 사람이 있는지를 물었다. "없다"고 하자, "잠깐이라도 스친 인연이 있으면 다 말하라"고 했다.

"저희 집 앞에 보위부 초소가 있었어요. 한국으로 말하면 경찰 지구대 같은 건데, 그 초소 비서분이 저희 가족과 같은 고향 출신이었어요. 그래서 어머니와도 친하게 지내셨고 형이 보위부에 끌려가면 힘도 써주시고 그랬어요. 그리고 북한은 전화가 집집마다 있는 게 아니라 저는 그 집에 가서 전화를 쓴 적이 있었죠. '잠깐이라도 스친 인연이 있으면 다 말하라'길래, 그분과 우리 집안과 가까웠다고 대답했습니다."

예비조사는 간단하게 끝났다. 한 달간의 기다림 끝에 2011년 8월 5일, 드디어 고대하던 남한 땅을 밟았다.

제일 처음 간 곳은 모든 탈북자가 그렇듯 중앙합동신문센터였다.

며칠 동안 대기방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다가 1차 조사가 시작됐다. 조사관이 허 씨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을 시간, 분까지 나누어 쓰라고 했다. 들었던 이야기, 옆집에서 있었던 일도 쓰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갖가지 이야기들을 떠올려 썼다. 그런데, 딱 한 가지가 걸렸다.

"제가 북한에 있을 때 필로폰을 했어요. 거기선 '빙두'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제가 좀 타락한 상태가 되고 하니까 자주 했었거든요. 북한에서는 워낙 대중화된 기호품이라 별 문제의식을 못 느끼고 한 거죠. 근데 다른 나라에선 빙두를 하면 굉장히 엄하게 처벌받고, 한국도 마찬가지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빙두를 했다는 얘길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더라고요. 괜히 썼다가 벌을 받을 것 같아서 그 내용은 결국 진술서에 안 썼어요."

1차 조사가 끝난 뒤, 조사관이 넌지시 물었다.

"너 거짓말했지?"

처음에는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질문이 계속되자 슬슬 겁이 났다. "사실 마약을 했었다"고 실토했다. 조사관은 그 내용까지 넣어서 쓰라고 했고, 허 씨는 진술서를 다시 작성했다. 그리고 손가락에 인주를 묻혀 지장을 찍었다. 지장이 찍힌 종이를 내밀자 조사관이 다짜고짜 손찌검을 날렸다.

"이 XX, 간첩이지?"

따귀를 몇 번이나 때리던 조사관은 허 씨가 부인하자 이번엔 머리채를 잡고 사정없이 흔들었다.

"머리가 벗겨졌고, 키는 작은데 몸집이 좀 있는 사람이었어요. 안경을 썼고 격자무늬 반팔 셔츠를 입고 있었습니다. 경상도 말투였고요. 제가 똑똑히 기억해요. 저는 그땐 경상도 사투리를 몰랐는데 욕을 하고 있다는 건 알았어요.

갑자기 때리니까 너무 어이가 없고 황당하더라고요. 그래서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간첩이면, 보위부 사람을 안다고 말했겠나. 생각해보시라' 이렇게 말했죠."

마구잡이로 때리던 조사관의 손이 멈췄다.

"네가 대한민국에 대해 잘 모르나 본데, 마약범이 얼마나 무거운 형을 받는지 모르지? 이거면 최소 20년은 썩어야 해."

"한국에 와서 한 것도 아닌데 왜 죄가 되느냐"고 대들자, 협박이 시작됐다.

"그래도 마약을 한 건 한 거잖아. 너 마약한 죄로 감방에서 20년 살래? 아니면 3년만 살고 나올래? 니가 간첩이라고 하면 3년만 살다 나올 수 있어. 대한민국은 관대한 나라여서 아무리 간첩이라도 협조만 잘 하면 10년, 15년 살 거를 3년만 살고 나올 수 있거든? 네가 진술을 잘 하면 너를 감방에서 조금만 살게 할 수도 있어. 똑바로 잘 생각해봐라."

▲남영동 대공분실. ⓒ프레시안(최형락)

'안기부 고문' 무서워 거짓 자백 구렁텅이로...

나중에 안 얘기지만, 태국 감호소 조사 때 보위부 사람과 아는 사이라고 했던 게 꼬투리를 잡힌 것이었다. 그리고 같은 탈북자 중에 '허우식의 형이 보위부 끄나풀이었다'라며 소문을 들먹이며 밀고를 한 이가 있었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미치겠더라고요. 왜 그랬냐면, 북한에서 그런 말 많이 들었거든요. 한국 남산에는 안기부 지하 조사실이 있는데, 옛날에 거기 들어간 사람들은 뼈도 못 추리고 나왔다고요. 손 끝에 못 박고, 전기 고문하고 물 고문한다고요.

조사관이 저한테 협박을 하니까, 딱 그 이미지부터 연상이 되더라고요. 제가 만일 제대로 말을 안 하면 그런 고문을 하겠구나 싶었어요. 조사관이 한 마디로 사람 심리를 갖고 장난을 친 거죠."

물론 북한에서의 '전기고문' 등의 소문은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 체제가 만들어낸 소문일 것이다. 그는 사흘 밤낮을 고민했다. 어떻게 대답하는 게 옳은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일단 사실이 아닌 건 아니니, 당당하게 "간첩이 아니"라고 했다.

방이 바뀌었다. 처음 조사실과 달리 천장 끄트머리에서 불이 반짝반짝했다. CCTV였다. 대머리 조사관이 계속 물었다.

"너 이 XX, 진짜 감옥에서 20년 썩고 싶냐?"

조사관이 협박을 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혈혈단신이라면, 감옥에서 3년을 살든 20년을 살든 상관없었다. 문제는 북에 남아있는 가족이었다. 남한에서 자리를 잡고 형과 어머니를 모셔오기로 했는데, 감옥에 오래 갇혀있으면 모셔오기는커녕 연락할 방도도 없어 걱정을 끼쳐드리게 될 판이었다. 또 한 편으론 복역 기간을 줄이려 괜히 간첩이라고 말했다가 가족까지 간첩으로 엮이면 어떻게 하나 싶었다.

답은 나오지 않는데 '간첩이라고 말하라'는 조사관의 압박 강도는 더욱 세졌다. 결국 그는 폭발했다. 미친 듯이 날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래, 내가 간첩이라 하시오. 내가 간첩이라고 해!"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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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리

매일 어리버리, 좌충우돌 성장기를 쓰는 씩씩한 기자입니다. 간첩 조작 사건의 유우성, 일본군 ‘위안부’ 여성, 외주 업체 PD, 소방 공무원, 세월호 유가족 등 다양한 취재원들과의 만남 속에서 저는 오늘도 좋은 기자,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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