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이 서울 종로를 떠나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면서 부산 북강서을 지역에 출마할 때가 2000년 총선이었다. 당시엔 합동유세라는 게 있었다. 운동장에서 유권자들을 모아놓고 유세하는 것이다. 그때 연단에 선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의 유세 연설은 아마 한국 정치사상 최악의 기억으로 꼽힐 것이다.
"살림살이 나아지셨다는 분들 손 들어 보십시오. 혹시 전라도에서 오신 거 아닙니까?"
"부산시민들은 지난 2년간 DJ정권으로부터 가장 핍박과 홀대를 당해왔다."
"이번에 노무현 씨가 당선돼 기가 살아서 2년 반 뒤에 대통령 선거를 할 때 또 이사람이 출마를 한다면 부산의 표 또 일부 갈라가지고 또 누구 좋은 일 시키는 제2의 이인제 되겠다는 이야기 아닌가. 전라도 사람이 주축인 새천년민주당에서 영남 사람이 대선주자 되겠다는 것도 웃기는 얘기 아닌가."
현장에선 '지역감정 하지 말라'는 격한 항의가 나왔지만, 그는 늠름하게 유세를 마무리했다. 허태열은 53.9%로 당선됐고, 노무현은 37.0%로 낙선했다. 노무현은 낙담한 참모들에게 말했다.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은 시간이 약이다. 시간 만큼 확실한 대책은 없다. 고생 좀 더 하고 갑시다."
참으로 야만의 시대였다. 한국 정치사의 맥락에서 지역주의는 이념 투쟁의 비극적 역사의 상처를 후비고 인종주의적 외피를 입고서 상대 지역을 폄하하는 행태를 주로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영남과 호남이라는 한국 정치의 '라이벌' 파벌이 전체 선거판에 영향을 미치는 특유의 현상을 말하기도 한다. '지역 파벌주의'로 규정해도 좋겠다. 전자의 지역주의와 후자의 지역 파벌주의는 꽤 끈끈하게 연결돼 있었다.
전자의 지역주의는 예나 지금이나 도덕적 지탄의 대상이었지만, 노무현이 말한 것처럼 26년의 시간이 흐르며 정치판에선 사실상 퇴출됐다고 봐도 좋을 듯 하다. 그리고 지금 어쩌면 이번 지방선거는 영남과 호남의 지역 파벌주의가 좀처럼 힘을 쓰지 못한 첫번째 선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몇 가지 징후들이 있다.
첫째, 부산 북갑에 나선 하정우의 출마 방식이다. 과거 노무현이 부산에 내려갔을 땐 '대의를 품고 희생하러 간다'는 반응이었지만, 지금은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현 정부의 '스타 참모'가 여론의 대대적 주목을 받으며 출마 선언을 했다. 26년만의 변화다. 지난 2024년 총선에서 국회 의석 18석 중 17석을 국민의힘이 차지했지만, 8년 전인 2018년 지방선거에선 부산시의회 전체 47석 중 41석을 민주당이 차지한 적도 있다. 여전히 '영남 파벌주의'가 강하다고 해도 부산은 점점 '스윙보터' 지역이 되고 있다.
둘째, 역시 부산 북갑에 나선 한동훈의 사례도 주목된다. 서울 태생의 한동훈이 무소속으로 부산 지역구를 선택한 것 자체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한동훈은 어찌됐든 국민의힘에서 '새로운 보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지역 연고가 전혀 없는 부산을 선택한 것은 국민의힘이 '본진'으로 여기는 영남의 한복판을 '보수 개혁'의 시작점으로 선정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과거라면 좀처럼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 역시 최근 정치판의 변화를 상징한다 볼 수 있겠다.
셋째, 김부겸의 TK 진출이다. 민주당 후보 중 '역대급 스펙'을 가진 그의 대구시장 선거 출마로 국민의힘의 '아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김부겸의 당선 가능성과는 별개로 '영남 파벌주의' 세력이 현재 역대 가장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도 모두 인정하고 있다. 특히 국민의힘 내에서 TK 지역의 토호 정치인들이 중앙 정치에서 더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점, 가장 큰 유권자 집단인으로 묶일 수 있는 수도권 정치에서 TK 정서가 '마이너스'로 작용하고 있다는 징후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넷째, 중앙 정치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호남이다. '호남 파벌주의' 세력은 여전하지만, 민주당은 문재인 정부 시절을 거치면서 이미 수도권 정당으로 완전히 변모했다. 호남이 우호적 인물로 꼽는 조국은 경기도 평택에 출마했지만 좀처럼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 중앙당이 공천한 전북도지사 후보에 맞서 무소속 후보가 나왔지만 수도권 민심과는 거리가 멀고, 전체 판을 흔들수도 없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멈추고 있다. 호남 지역의 이익이 중앙당을 흔들지 못하는 징후도 꽤 많다.
과거엔 영남과 호남의 지역 파벌주의가 중앙 정치에 실질적 힘을 발휘했다. 지역의 이슈가 중앙당을 흔들거나 수도권 민심에 영향을 미쳤다. 지금 이게 '액상화'되고 있다. 노무현의 말대로 '시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특히 유권자 연령층 변화가 주요했다. 수도권의 영호남 커뮤니티는 고령화됐고, 경제 활동의 중심으로 올라온 그의 자녀 세대들은 '지역 정체성'에 굳이 얽매이지 않는다.
더 큰 이유는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수도권 일극화가 강화된 것을 꼽을 수 있겠다. 지역주의를 희석하기 위해 수도권에 자원을 집중한 것은 아니지만, 수도권 일극화 현상이 의도치 않게 지역 파벌주의에 제동을 걸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일종의 '외부 효과'다. 일극화된 수도권은 더 이상 지방에 흔들리지 않는다.
영남 기반의 국민의힘이 영남 소파벌주의로 쪼그라든 것, 호남 기반의 민주당이 수도권 정당으로 변모하며 호남의 중앙 정치 영향력이 약화된 것을 대한민국 정치 지형 변화의 조짐으로 읽을 수 있을까. 선거를 앞두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영남의 선택'이다. 영남 유권자들이 국민의힘의 '텃밭'이란 고정관념에 반기를 들게 될 경우, 한국 정치는 새 국면에 들어설 것이다.
보수의 고질병 같은 '윤어게인'을 끝내고, 한국 정치의 '지역 파벌주의'를 와해시키는 것은 결국 영남 유권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 영남이 한국 정치의 '운전대'를 잡고 있는 셈이다. 대구에서, 부산에서, 경남에서 그들의 선택에 한국 정치의 미래가 달려 있다. 어쩌면 이번 선거는 '지역주의'가 힘을 쓰지 못한 최초의 선거가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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