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최대 비극, 민간인 학살을 되돌아보다

[프레시안 books] <꽃 같던 청춘, 회문산 능선 따라 흩뿌려지다>

한국전쟁기, 한반도 전역에서 크고 작은 무수한 전쟁이 이어졌다. 어제 인민군이 지주를 청소하자, 다음 날 국군이 농민을 죽였다. 밤이면 빨치산이 마을에 들이닥쳐 우익 인사를 숙청했고, 낮에는 경찰이 몰려와 빨갱이를 처단했다. 주리고 겁에 질린 사람들은 인민군이 오면 '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러야 살 수 있었고, 깃발이 바뀌면 그저 살고자 외친 한 마디로 인해 일가족이 몰살당했다. 지금은 미소 냉전기의 대리전으로 불리는 한국전쟁기, 대부분 약자에게 이 시간은 그저 생존을 위한 투쟁의 장일 뿐이었다.

한국전쟁은 유례없는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 깊이 연구되어야 할 비극이다. 하지만 당사국인 한국에서도 명확한 학살 피해자 집계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어림잡아 민간인 학살 희생자 수가 많게는 100만 명 단위에 이르리라는 추정치가 관련 전문가들 사이에서 거론되나, 국가가 앞장서 해당 연구를 총체적으로 진행하진 않았다. 민간인 학살 사례의 대부분이 국군과 경찰, 그리고 미군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1950년과 화해하지 못하는 이유, 여전히 냉전의 망령이 한국을 떠도는 주된 이유는 과거를 마주할 용기를 누구도 내지 못했음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 학살 사례 발굴은 거시적 통계에 매몰되어도 안 된다. 전국 곳곳에서 죄 없는 숱한 목숨이 이념의 잣대로 인해 사라졌다. 억울한 죽음은 지역을 가리지 않았다. 충북 영동 노근리에서, 경북 포항에서, 전남 화순에서, 제주 제주시 오라리에서 순진한 사람들이 흉포한 권력의 총칼에 목숨을 잃었다. 이 야만의 역사가 남긴 상처가 너무 깊은 탓에, 짐승이 된 가해자는 과거를 미화해 평생을 자기합리화에 바쳤다. 살아남은 피해자는 과거의 상처에 갇혀버렸다. 지금이라도 숱한 억울한 목숨 하나하나를 모두 조명해야 할 이유다. 과거를 성찰할 수 있어야 왜곡된 눈으로 오늘을 조명하는 비극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커버리지> 기자 정찬대 씨가 누구도 조명하지 않던 전국의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이야기를 <프레시안>에 연재한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기획의 호남·제주편 이야기가 신간 <꽃 같던 청춘, 회문산 능선 따라 흩뿌려지다>(한울 아카데미 펴냄)로 나왔다. 지은이가 60여 년 전 벌어진 전국의 민간인 학살 생존자와 희생자 유가족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조명한 이 책은 앞으로 이어질 영남, 강원, 충청, 서울·경기 기획의 첫 번째 결과물이다. 저자는 충실한 인터뷰와 풍부한 역사적 사료를 바탕으로 과거를 되짚고, 그날의 비극을 오늘로 소환하는 생생한 이야기를 엮었다.

긴 시간이 흘렀지만, 어떤 정부도 역사의 피해자들을 조명하지 않았다. 전북 임실군 강진면 호국로에 자리한 국립임실호국원 한편에는 군경의 손에 무참히 살해된 마을 주민 700명의 넋이 잠들어 있다. 1951년 3월 14일, 이 지역을 수복한 군경은 빨갱이 사냥에 나섰다. 임실의 한 폐광굴에 숨어든 남산리 마을 주민 700여 명은 굴 양편을 틀어막은 군경이 들여보낸 연기를 들이마시며 삶의 벼랑에 내몰렸다. 숨을 참지 못해 바깥으로 뛰쳐나온 이들이 차례대로 기관총에 몸이 찢겨 죽었다. 정부는 여태 몰살당한 이들에 관한 어떤 의견도 내놓지 않았다. 오늘날 이들이 희생된 바로 옆에는 군경과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호국지사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 함평 월야면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장소. 군인들은 묘지 위(사진 하단)에 기관총을 거치한 뒤 주민들을 향해 그대로 난사했다. 주민이 모여 있던 장소(사진 가운데 상단)에 조립식 건물이 들어서고 나무가 심어져 있다. ⓒ커버리지(정찬대)

1950년 12월 7일 아침, 전남 함평군 월야면에 군인들이 몰려들었다. 이미 전날 인근 정산리와 계림리에서 각각 70여 명, 60여 명의 주민이 몰살된 터였다. 월야면도 같은 운명을 맞을 순간이었다.

군인들이 7개 마을을 에워싸고 사람들을 끌어냈다. 어떤 군인은 "빨치산이 파손한 도로를 복구해야 한다"고 달래 사람들을 끌어냈고, 어떤 군인은 "안 나오다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총살한다"고 위협했다.

당시 11살이던 정진억 씨 가족도 같은 운명에 처했다. 군인들은 45살 이상 어른과 10살 미만 아이는 면소재지로 돌려보냈고, 15세 이상~45세 미만 사람을 남겼다. 정 씨는 어린 덕분에 살아남았다. 중대장은 이들을 향해 "명당자리를 잡아주겠다"고 말한 후, 비탈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세 자루의 기관총이 이들을 맞았다. 일제히 총격이 일어났고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죽었다. 한 차례 사격이 끝난 후 중대장이 외쳤다. "산 사람은 하늘이 돌봤으니 살려주겠다. 일어나라." 그 말을 듣고 일어난 50여 명이 2차 총격에 의해 사망했다. 이런 식의 승강이가 총 네 차례 이어졌다. 끝까지 군인을 믿지 않은 양채문 씨(당시 19세)가 그 지옥에서 살아남았다. 200여 명은 이 자리에서 사망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 총선거가 치러졌다. 제주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거부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제주는 눈엣가시였다. 제주 지역 선거가 무효화되자, 이승만 정부는 행동을 시작했고 미군정은 이에 눈감았다. 이승만은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해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말했다. 곧이어 제주 토벌대가 구성됐다. 10월 17일 토벌대는 제주 해안 통행금지를 명령하고, 이를 어길 시 총살에 처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1948년부터 1949년 걸쳐 제주도 전역이 민간인 학살의 장이 됐다.

▲ <꽃 같던 청춘, 회문산 능선 따라 흩뿌려지다>(정찬대 지음, 한울 아카데미 펴냄) ⓒ프레시안
4.3사건 이후 포로들은 일제가 세운 제주 주정공장에 수용됐다. 서북청년단원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남녀를 불러내 폭행한 후 성교를 강요했고, 여자를 마구 성폭행했다. 일부 포로를 정뜨르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에 끌고가 집탄 총살했다. 1949년 2월 경찰서에 수감된 주민 76명이 죽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군법 사형수 249명이 죽었다. 1950년 한국전쟁 직후에는 주정공장에 구금된 예비검속자 500여 명이 정뜨르비행장에서 집단 학살됐다.

한국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남한도, 북한도 아니다. 죄 없는 민간인 학살 피해자다. 인민군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죽고, 불러도 죽는 생지옥에서 숱한 이들이 사망한 기막힌 현실을 우리는 여태 조명하지 않았다. 2005년 발족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적잖은 미규명 피해 사례를 역사적 진실로 규명했지만, '진실규명 결정통지서'를 받은 후 3년 이내에 소송을 통해 배상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을 몰라 신청 기간을 넘긴 수많은 희쟁자 가족이 여전히 국가로부터 어떤 배상도 받지 못했다. 여전히 역사와의 화해가 필요한 이유고, 이 책이 중요한 까닭이다.

전남 영암 구림마을에는 지와목 사건 순절비가 있다. 1950년 10월 7일 밤, 빨치산이 마을을 기습했다. 기독교 신자와 경찰 가족 등을 포함한 우익 인사 28명을 주막에 가두고 불태워 죽였다. 며칠 뒤, 군경 토벌대가 마을을 수복했다. 2차 학살이 일어났다. 1976년 한국반공연맹은 이곳에 지와목 사건 순절비를 세웠다. 순절비는 우익 인사만 추모했다. 2006년이 되어서야 '용서와 화해의 위령탑'이 세워졌다. '가해자와 피해자 너와 나 낡은 구별은 영원히 사라지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향기만 가득하리오'라는 문구가 적혔다. 남은 사람들은 이미 용서를 말하고 있지만, 가해자는 누구도 사과를 건네지 않는다.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우리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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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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