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밝은 월출산은 그렇게 목 놓아 울어댔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남도 영암④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획 연재를 다시 진행합니다. 정찬대 <커버리지> 기자가 발로 뛰며 취재한 내용입니다. 전쟁이 끝난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아픈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필자는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글로나마 위로받길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호남(제주 포함), 영남, 충청, 서울·경기, 강원 순으로 연재할 계획이며, 권역별로 총 7~8개 지역을 다룰 예정입니다. 호남 지역의 지난 연재는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호남 지역 중 전라남도 영암 지역과 관련해 보강 취재를 한 원고를 싣습니다. 전라남도 영암편 1편과 2편, 그리고 3편은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이번 원고는 4편에 해당합니다.


보복 학살의 제물이 된 구림

"공포에 휩싸여 닭은 울음을 멈췄고, 개는 짖는 것을 잊어버린 채 만물이 숨을 죽였으며, 청천벽력 같은 원통하고 억울한 죽음에 당산바위는 떨고, 당산나무는 소리 내 울지도 못한 채 슬픔을 삼키었다."

구림 사람들이 직접 쓴 마을 공동체 이야기 <호남명촌 구림>은 한국전쟁 당시 구림이 겪은 민간인 학살의 참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구림은 동구림리·서구림리·도갑리로 구분되며, 모두 12개 부락으로 이뤄져 있다. 400년 넘게 이어온 대동계를 중심으로 해주 최씨, 낭주 최씨, 함양 박씨, 창녕 조씨 등 4개 성씨가 마을의 주축을 이룬다.

마을 뒤편 도갑사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구림천이 되어 12개 마을을 살피며 크게 휘돈다. 그렇게 흘러내린 옥류는 상대포에 갇힌 뒤 영산강 지류가 되어 서해로 몸을 푼다. 백제 왕인박사가 일본에 문물을 전파하기 위해 배를 탄 곳도 이곳 상대포다.

▲ 영암 구림마을 상대포의 해질녘 모습. ⓒ커버리지(정찬대)


구림은 영암 지역 항일운동의 구심점이었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레 사회주의 운동으로 이어졌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들어선 것도 같은 일환이었다. 때문에 우익 색이 짙은 영암읍과는 대립 관계를 유지했다. 이것이 훗날 피의 학살을 불러온 배경이 되기도 했다.

도갑사 오른편 도갑재는 강진군 성전면 월하·월남마을과 연결돼 있고, 월출산 주지봉 너머엔 서해를 품고 있는 목포와 곧장 통한다. 전남 서남권 빨치산들은 구림을 거쳐 영암 월출산에 들어왔고, 그렇게 금정면과 장흥 유치면으로 흘러들었다. 이 지역 빨치산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기 위해선 구림마을 수복이 반드시 선결돼야만 했다.

월출산 주지봉을 병풍삼은 구림은 좌우 용마루에 안긴 채 자그마치 2200년의 역사를 품어왔다. 그러나 대표적인 양반촌이었던 만큼 반상 간의 갈등 또한 존재했다. 여기에 서호면과 학산면 사람들은 '물아래(영산강 아래) 사람'으로 취급돼 구림으로부터 홀대받았다. 이러한 시공간적 특성이 더해지면서 구림은 한국전쟁 당시 점령 세력이 바뀔 때마다 좌-우익 간 보복 학살이 이뤄졌다.

1950년 7월 국민보도연맹 사건이 그랬고, 8월 이후 인공기가 들어서면서 자행된 우익 인사에 대한 숙청이 그랬다. 그리고 10월 수복 과정에서 또다시 보복 학살의 광풍이 불어왔다. 서남지구 토벌 작전, 이른바 '구림마을 첫 포위 작전'이 그것이다. 금정면 냉천마을 토벌이 있기 정확히 두 달 전 구림은 그렇게 살육됐다.

구림마을 첫 포위 작전

작전은 이른 새벽 시작됐다. 영암경찰서장 류기병의 지휘를 받은 보안주임 김준병(경위)이 경찰 기동대 100여 명을 이끌고 구림에 도착했다. 1950년 10월 17일 새벽 5시. 산허리를 갈라놓은 지방도 819호선(왕인로)을 경계로 산간 아래에 나란히 선 경찰은 마을 뒤서부터 치기 시작했다. 후방 도주를 막기 위해서다.

영암 경찰 기동대는 세 갈래로 나뉘어 12개 마을을 포위했다. 1개 소대는 영암 방면 강담안 사거리에서, 또 다른 소대는 마을 중간 시근정사거리에서, 마지막 1개 소대는 목포 방면 지와목에서 각각 마을을 훑고 상대포 방향으로 수색을 폈다. 이른 새벽 밭일을 나가던 주민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 영암 구림마을 입구의 모습. 구림은 영암의 대표적인 양반촌으로 자그마치 2200년의 역사를 품어왔다. ⓒ커버리지(정찬대)


"남송정(서구림) 아랫사우 앞에 있는디, 경찰이 조르라니 섰드라고. 근디 갑자기 어디서 개떼(경찰) 왔다고 막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 그래서 봤더니 사람들이 들판에서 도망치는 모습이 보이대. 글더니 거기다 대고 경찰이 총을 쏘고 난리가 아니더라고. 어머니가 언능 피해야 쓰것다 해서 학산면으로 내뺐제. 난중에 와서 본게 들판에 사람들이 희커니 죽어 있더라고, 아따 그 꼴 못 보것씁디다."

서구림리 남송정 지장게등에서 태어나 연보리 냉천부락으로 시집간 나춘자 씨는 일곱 살 어린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토벌이 있기 전 유격대(빨치산)들이 개새끼(경찰을 지칭하는 비속어) 온다며 산으로 내빼자고 했다"며 "그런데도 안 가려는 사람들은 좌익을 피해 울타리나 논둑 밑에 숨고들 그랬다"고 말했다. 결국 동네에 남아있던 이들이 이날 토벌의 제물이 됐다.

나 씨가 들었다던 '개떼' 소리는 구림마을 이영월 씨가 야경 중 경찰의 총격을 받고 도망가면서 외친 소리다. 그 덕에 야경을 위해 모였던 주민들이 서둘러 몸을 피할 수 있었다. 당시 주민들은 돌아가며 번(보초)을 섰다. 마을 치안을 위해, 또는 지방 좌익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죽창을 들었다. 그리고 수복 후 또다시 경찰 지시로 죽창을 든 채 야번을 섰다.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는 것이 '장삼이사(張三李四)' 평범한 이들의 운명이다.

아랫사우 앞 들판에선 총 맞은 사람들이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총상을 입고 툭 엎어진 어떤 이는 땅바닥을 벅벅 기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이가 담장 밑에 열린 늙은 호박 하나를 따오더니 속을 꺼내 서둘러 상처에 동여맸다. 염증이나 지혈, 통증, 쇠붙이로 인한 상처에는 호박만한 게 없었다. 변변한 약이 없던 시절 호박은 그렇게도 쓰였다. 나 씨는 호박으로 총상을 싸매던 모습까지 목격한 뒤 어머니 손에 이끌려 아랫사우를 빠져나왔다.

아버지와 오빠는 험한 꼴을 피하고자 나락을 베어 놓은 베눌(낟알이 붙은 곡식을 그대로 쌓아둔 더미, '낟가리'의 전라도 방언) 아래 굴을 파고 생활했다.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베눌 밑 땅굴에서 잠을 청했다. 다행히 두 사람은 첫 포위 작전이 있기 전 미암면으로 몸을 피해 험한 꼴을 면했다.

▲ 영암 구림마을 뒤를 감싸고 있는 월출산의 모습. 노적봉(좌)과 주지봉(우) 사이 골짜기(가운데)에 도갑사가 위치해 있다. ⓒ커버리지(정찬대)


최기욱 씨(현 영암향교 전교)도 그날 현장에 있었다. 옆집에 세수하러 가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경찰기동대가 마을을 헤집는 동안 어머니와 함께 서숙('조'의 전라도 방언)밭에 엎드린 채 숨어 있었다. 그저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총소리가 잠잠하더니 주변에서 수런거린 소리가 들려왔다. 토벌대였다. 일촉즉발의 상황, 어머니는 '조용히 하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일각의 시간이 어제 일처럼 두근거린다. 그는 당시 일곱 살이었다.

경찰에 끌려가는 딸을 담 너머로 지켜보던 어머니가 관자놀이에 총을 맞은 채 사망했고, 동구림리 알뫼들에선 경찰이 처녀 두 명을 개천으로 끌고 가 옷을 벗으라고 한 뒤 주저하던 한 명을 그대로 총살시켰다. 야경을 섰던 주민에게는 총을 겨눈 채 서로 칼싸움을 시켰고, 결국 두 사람 모두 칼에 찔려 죽었다. 대나무 밭이나 마루밑, 심지어 합수통(시골 화장실) 인분저장소에 목만 내놓고 피한 이들만이 지옥 같은 그곳에서 살아남았다. 높은 기개와 고고한 품격을 지닌 2200년 역사의 반촌마을은 그렇게 폐허가 됐다.

이날 토벌 작전으로 주민 96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구림연구>는 이후 희생자를 78명이라고 기록했다. 외지로 이사하거나 연고자가 사망해 명단을 정확히 확인할 길은 없다. 2007년 진실화해위는 제적등본 등을 통해 확인 가능한 희생자 수가 44명이라고 특정 지었으며, 실제 희생자는 이를 상회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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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대

신념이 담긴 글은 울림을 주며, 울림은 다시 여론이 됩니다. 글을 쓰는 궁극적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을 연재 중이며, 오늘도 순응과 저항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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