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조승우와 양동근이 야구선수 최동원과 선동열 역을 맡은 영화 <퍼펙트 게임>(2011)은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한다. 조승우와 양동근 두 연기파 배우의 열연도 훌륭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조승우의 연기에 더 점수를 주고 싶다.
조승우는 고(故) 최동원을 많이 연구한 것 같다. 고인의 와인드업(windup, 투구자세 중 하나) 시 보여 주었던 다이나믹한 키킹(kicking, 한창 때는 발이 거의 이마까지 올라갔다)을 거의 근사치까지 흉내냈고, 부산 사투리도 거의 흠잡을 데가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감동했던 것은 최동원을 그린 듯이 닮은 미소였다. 때로 활짝 웃기도 하지만, 대개는 입이 우선 오무려진 뒤 조금씩 이를 보이며 그려 가던 최동원 특유의 수줍은 미소. 그걸 조승우가 스크린상에서 선보일 때는 아까운 나이에 하늘로 간 최동원이 돌아온 것 같은 착각에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했다.
이 영화는 1987년 5월 16일 불세출의 두 투수가 벌인 그야말로 '영웅적인' 투수전을 소재로 한 것이다. 그때까지 1승 씩을 주고받았던 두 사람은 나란히 선발투수로 사직운동장 마운드를 밟았고, 그때부터 징하도록 긴 명승부를 조율해 나간다. 2대 2. 그러나 롯데와 해태 양팀 타선 모두에게 그 이상은 허락되지 않았다.
마치 용의 배 속에서 뿜어 나오는 불같은 강속구로 거의 혼자 힘으로 롯데를 우승시켰던 중천의 해 최동원과, 고려대 시절부터 그때까지 부동의 에이스로 상대 팀의 공포의 대상이던 떠오르는 해 선동렬은 그야말로 공 하나 공 하나에 자신들의 명예를 실어 던지는 듯했고, 투수전은 재미없다는 말은 적어도 그 시점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몰매도 모자랄 망언으로 화한다.
가끔 선수단 분위기를 다잡기 위해 배트로 의자를 부숴 버리던 카리스마 짱 김응룡 감독도, 롯데의 성기영 감독도 감히 마운드에 올라가 공을 달라고 요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타자들은 본의 아니게 조역이 되어 갔다. 9회를 넘어서도 더욱 쌩쌩해지는 둘의 공은 관중들을 무아지경으로 몰아넣었다. 나이 서른의 최동원은 던질수록 젊어지는 듯했고, 대주자 작전을 쓰느라 포수 자원을 다 써 버려서 직구만 겨우 포구 가능한 내야수 백인호에게 마스크를 맡긴 선동열은 직구로 롯데 타선을 농락했다.(이 대목은 영화에서 만년 후보 포수 박만수의 인생역전 스토리로 각색된다.)
경남고와 연세대를 나와 부산에 연고지를 둔 제과회사 '롯데의 수호신'이었던 최동원과 광주일고와 고려대를 나와 광주에 둥지를 튼 제과회사 '해태의 간판'이었던 선동렬은 각각 200개가 넘는 공을 던지며 격렬하게 맞섰다. 장엄하기까지 한 승부였다. 또 그때 그 시절이니만큼 가능한 승부였다. 요즘이라면 200개 이상의 공을 뿌려(던져) 대는 1대 1 승부란 상상할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1승 1무 1패를 마지막으로 둘의 맞대결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보자면 선동렬은 떠오르는 태양이었고, 최동원은 저녁 하늘을 붉게 물들이긴 했지만 지는 해였다. 선동렬은 더욱 승승장구하여 일본에서도 '쥬니치의 태양'으로 군림했고, 선수뿐 아니라 감독으로서도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는 행운을 누렸지만, 최동원은 그 뒤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은퇴한 뒤 야구계에서 제대로 된 일자리 하나 얻지 못하는 '야구계의 야인(野人)'이 되었던 것이다.
그 결정적 계기는 1988년 "선수 상호 간의 친목과 복지"를 내세운 선수협의회 결성 시도였다. 최동원은 그 선봉장이었다. 당시 최동원의 코멘트는 영화 <퍼펙트 게임>에서 조승우가 멋지게 내뱉던 대사, "게임은 최동원이 끝냅니다. 이겨도 내가 끝내고 져도 내가 끝냅니다!"만큼이나 사람을 울컥하게 만든다.
"누군가 앞장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사실 제 생각만 한다면 선수회 만들 일 없습니다. 어려운 동료, 불우한 후배들을 돕자는 취지에서 저같이 연봉 많이 받고 여유 있는 선수들이 앞장선 거죠."
1988년 9월 30일 마침내 계룡산에서 선수협 대의원 총회가 개최되던 날. 물론 방해 공작은 간악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지경이었다. '노조 없는 기업'의 대명사 삼성은 담당 이사가 직접 설득에 나서는 한편, 박승호, 장효조, 김시진 등 해당 선수의 부인을 협박해서 남편의 행동을 저지하도록 했다. (아, 삼성…) 해태는 새벽부터 구단 직원들을 선수들의 집 앞에 대기시켜 거머리처럼 물고 늘어졌고, 태평양은 선수 전원을 구단 사무실에 집결시켜 일일이 포기 각서를 받아 냈다. 롯데의 경우도 선수들을 소집하여 오후 6시까지 잡아놓은 뒤 '이제는 못 가겠지' 하고 풀어 줬는데 롯데 소속 대의원들 김용철, 유두열, 김민호, 한영준, 김용운, 윤학길(아아, 내 추억 속 롯데 자이언츠 선수들!) 등은 나는 듯이 계룡산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어렵게 모였지만 정족수는 미달됐고, 구단들의 압박은 더욱 강화되면서 끝내 선수협은 와해되고 만다. 그리고 선수협의 주동 최동원은 롯데 유니폼을 벗는다.
선수들의 참여가 가장 두드러졌던 롯데의 경우 선수들에게 '선수협 포기 각서'를 요구한다. 이 치졸한 요구에 견결히 불응했던 이가 영화 <퍼펙트 게임>에서 최동원의 앙숙으로 등장하는 김용철이었다.
"안 한다 캤으면 됐지 각서까지 낼 이유가 뭐꼬?"
예나 지금이나 속 좁기로는 롯데 껌 종이만도 못한 롯데 구단은 김용철의 훈련 참가를 불허한다. 선수단은 이 구단의 조처를 두고 단체 행동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투표에 부치지만, '롯데의 최동원'이 한칼에 날아가는 것을 지켜봤던 선수들은 단체 행동에 반대하고 김용철은 여기에 분통을 터뜨린다.
"우째 자~들이 내 동료란 말이고. 자들 믿고 무슨 야구하겠노."
롯데에 정나미가 떨어진 김용철은 트레이드를 요구했고, 롯데 구단은 얼씨구나 그마저 롯데에서 쫓아내 버렸다.
영화 <퍼펙트 게임>의 주연과 감칠맛 나는 조연은 그렇게 '롯데 자이언츠'에서의 야구 인생을 마감했다. 뒷이야기를 하다 보니, 새삼 영화의 장면들과 1987년 5월 16일 실제로 벌어졌던 야구 영웅들의 혈투가 머릿속을 감아 든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던 장엄한 승부. 그러나 그 주인공들 중 한쪽은 치졸하고 추악한 구단들의 횡포 속에 쓸쓸하고 씁쓸한 뒤안길로 퇴장해야 했다.
다시 한번 최동원 선수. "코리안 시리즈 네 번을 다 나갈 수 있겠나?"라는 감독의 어이없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질문에 "해 보입시다, 마"를 부르짖었던 불굴의 투수, "내가 안 하모 누가 하겠능교?"라고 금테 안경을 쓸어올리며 선수협의 필요성을 주장하던 용감했던 사람, 고 최동원 선수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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