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약 달여먹는 '개벽 교황', 시진핑과 만나면?

[유라시아 견문] 바티칸 - 개벽의 아이콘

1. 남과 북

2013년 3월 13일. 저녁 8시가 지나고 어둠이 내려깔렸다. 촉촉한 봄비도 보슬보슬 뿌렸다. 하지만 누구 하나 자리를 뜨지 않았다. 성 베드로 광장은 수많은 신도들과 취재진으로 가득했다. 마침내 커튼이 걷히고 새 교황이 자태를 드러냈다. 일제히 카메라 프레쉬가 폭죽처럼 터졌다. 동영상을 촬영하는 핸드폰들이 별빛처럼 반짝였다. '좋은 저녁입니다.' 교황의 일성이었다.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 담백하게 첫 인사를 건넨 교황은 정중한 몸짓으로 절을 하며 자리를 비웠다. 고요한 밤이었다. 거룩한 밤이었다.


같은 시각 지구 반대편,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축제의 도가니가 되었다. 3월 12일 오후 4시, 거리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1978년 마라도나의 맹활약으로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이래 가장 많은 인파였다. 프란치스코는 2000년 교회 역사상 최초의 제3세계 출신 교황이다. 아르헨티나가 모국이다. 유럽에서는 낯선 교황이었지만, 남미에서는 친숙한 인물이었다. 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메시의 환상적인 플레이를 보며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었다면, 프란시스코의 말씀으로 영혼을 위로받았다. 메시가 세속의 영웅이었다면, 프란시스코는 영성의 귀감이었다.


내 이웃 같은 친근한 교황이기도 했다. 주말 미사, 성당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어려운 분이 아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곳곳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주교와 대주교, 추기경까지 올라서도 수행비서도 없이 운전기사도 없이,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두 발로 걸어 다니며 교도소를 찾고 양로원과 고아원을 방문하여 가난한 이들을 보살폈다. 책상 앞 행정가이기보다는 겸손하고 검소한 현장파였던 것이다. 응당 서면보고보다 대면보고를 선호했다. 얼굴을 맞대고 눈빛을 교환하며 인간적 친밀함과 온기를 나누는 목회자임을 지속했다. 이제 그가 나고 자란 생가부터 수학했던 학교들과 성직자로 봉직했던 교회들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대표하는 시티투어 상품이 되었다. 유럽에서 남미로 거꾸로 순례여행을 간다. 평생 그의 머리를 다듬어주던 이발사도, 신문을 전해주던 배달원도 덩달아 유명인사가 되었다. 낙수효과가 매우 크다.


그는 역사상 최초의 예수회 출신 교황이기도 하다. 한때 이름 뒤에 항상 SJ(Society of Jesus)를 덧붙였을 만큼 예수회 정체성이 강하다. 아르헨티나에서 예수회는 십자군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이베리아에서 무슬림을 추방시킨 십자군이 아니었다. 스페인 식민통치에 맞서서 원주민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교회의 보편적 가르침과 현지 문화의 조화를 꾀했다. 진리의 보편성과 살림살이의 다양성을 융합시키고자 했다. 스페인으로부터 아르헨티나의 독립을 주도한 이들도 예수회 출신이 많았다. 절대주의 군주가 교회와 교황으로부터의 독립, 즉 주권을 강조하면서 예수회를 탄압했던 것이다. 고로 아르헨티나에서 예수회 추방은 미국에서의 보스턴 차 사건에 견줄 수 있는 사건이었다. 아르헨티나 독립과 예수회는 불가분이었다.


스무 살이 되던 1956년 3월, 프란치스코는 예수회에 입회한다. 일생일대의 결단이었다. 부모님의 소망을 거스른 선택이었다. 신학교에 진학하여 성직자가 되겠다는 폭탄선언에 어머니는 억장이 무너지고, 아버지는 무릎이 꺽였다. 이민자 집안이었다. 아메리칸 드림, 아르헨티나 드림을 품고 대서양을 건넜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하고 돈을 모았다. 아들은 총명했다. 전공으로 선택한 화학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자랑했다. 의대 진학을 의심치 않았다. 버젓하게 의사가 되어 중산층에 진입하는 날이 머지않았다고 여겼다. 허나 자식 이기는 부모 드문 법이다. 아들이 안락한 가족의 둥지를 떠나 고행 길에 들어선 날, 두 사람은 눈물을 쏟았다. 그 아들이 57년이 지나 교황이 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혼을 치유하는 의사가 되겠습니다.' '낮은 곳으로 임하겠습니다.' '예수처럼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아들은 약속을 지켰다. 두 분도 하늘에서 기뻐하실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았다. 그들을 대신한 것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였다. 유년기의 상당 시간을 조부모와 보냈다. 할아버지의 무릎 위에 걸터앉아서, 할머니의 배를 베고 누워서 옛날이야기를 즐겨 들었다. 아버지와 여섯 형제를 데리고 아르헨티나로 건너올 때의 일도 생생하게 전해졌다. 하마터면 대서양에서 수장될 뻔 했다. 1927년 10월 침몰한 여객선 표를 구했던 것이다. 천만다행 할아버지 할머니가 운영하던 커피숍이 제때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이에게 표를 넘긴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떨어진 것은 1928년 1월이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북미의 캐나다 못지않은 세계 8대 경제대국이었다. 부푼 꿈을 안고 신세계에 당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만사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이듬해 뉴욕에서 세계공황이 격발된다. 곧 유럽에서는 세계대전도 발발했다. 공황과 전쟁은 수출산업으로 성장하던 아르헨티나에 직격탄이었다. 당시의 고생담은 할아버지의 단골 레퍼토리가 되었다. 손자의 귀에 딱지가 앉도록 구구절절 읊조렸다.


할머니는 떠나왔던 이탈리아와 유럽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1920년대,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한창 기승을 부렸다. 할머니는 국가로부터 교회의 독립을 수호하기 위해 행동했던 독실한 신자였다. 이주를 결심한 결정적 계기이기도 했다. 신앙을 대신하여 이념(자유주의, 공산주의, 전체주의)이 휩쓸고 있는 유럽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두 분은 그들이 경험한 1차 세계대전 이야기도 전해주었다. 교과서에 실린 표준적 역사가 아니었다. 몸으로 직접 겪어낸 살아있는 이야기, 산 역사였다. 좌/우파 이데올로기로 해석되지 않은 삶의 실감을 전수해준 것이다. 노인들과의 밥상머리 대화는 소년의 인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들과 함께 한 유년 시절을 축복으로 회고한다.


교황이 되고난 이후의 행보도 유년기의 경험과 밀접하다. 가장 먼저 달려간 곳도 람페두사(Lampedusa)였다.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향하던 난민들의 비극이 서린 장소이다. 뱃길에서 죽어간 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기도를 올렸다. 반이민, 반난민 정서를 선거에 동원하는 유럽의 정치인들과 관료들도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EU 차원에서 긴급 구조에 투입될 배와 헬리콥터를 대폭 확충하는 실효를 거두었다. 언론에서 더욱 주목한 것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교황의 맹렬한 비판이다. 경제학 교과서의 낙수효과는 가짜 이론(Fake Theory)이라고 성토했다. 대공황 시절 조부모들이 겪었던 고통에, 국가 파산 위기를 거듭했던 아르헨티나의 신자유주의 시절도 생생했다. 고용 없는 성장으로 인간의 비극을 양산하는 경제체제의 선진화를 비판했다. 이민/난민과 자본주의, 현대사회의 가장 첨예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교황 직을 시작한 것이다. 가장 인간적이고 이웃 같은 교황은 가장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교황이기도 했다.


그의 파격 행보는 교황으로서 맞이한 첫 부활절에 정점에 달했다. 세르비아 출신 소녀의 발을 씻겨준 것이다. 교황이 여성의 발을 닦아준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무슬림의 발 앞에 무릎을 꿇은 것 역시도 처음이었다. 유럽에서는 파격이었으나, 남미에서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그는 이미 아르헨티나에서 종교간 대화의 전범을 확립했던 바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모스크가 겨우 셋에 불과했지만, 프란치스코는 무슬림들과 돈독했다. 특히 시리아 출신의 울라마 오마르 아부드와 긴밀했다. 코란을 스페인어로 처음 번역한 할아버지의 손자였다. 코란도 읽었고, 이슬람 사상사도 공부했던 프란치스코는 2004년 주교로서 처음으로 모스크를 방문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이집트를 방문하여 알아즈하르 대학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 교황의 행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이다. 아즈하르는 이집트의 탈기독교화, 이슬람화를 상징하는 장소이다. 이슬람세계의 수많은 울라마들이 아즈하르에서 공부했다. 그 곳에서도 조금도 거리낌 없이 기독교와 이슬람의 공존을 설파하며 기꺼이 이맘과 포옹을 나눈 것이다.

▲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달 28일 이집트 카이로 알아즈하라대학에서 셰이크 아흐메드 알타예브 이맘을 만났다. ⓒAP=연합뉴스

반면으로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랍비 아브라함 사코르카와도 절친이었다. 그와 나눈 대화를 책으로 발간하고, TV에서 대담을 하기도 했다. 랍비에게 가톨릭 대학의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한 것도 최초였을 것이다. 유유상종, 셋이서 함께 만나는 날도 드물지 않았다. 도란도란 할랄 음식과 코셔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즐거운 만찬을 즐겼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이 갈등을 그치지 않는 유라비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아르헨티나에서부터 일군 것이다.


최초의 남반구 출신, 최초의 예수회 출신 교황 아래서 바티칸은 목하 개혁으로 분주하다. 중앙집권적 군주제에 가까웠던 조직을 공화정에 가깝게 구조조정하고 있다. 각 대륙별, 국가별 추기경과 대주교에게 권한을 대폭 이양하는 분권과 자치의 실험이 진행 중이다. 바티칸의 명령을 하달하는 일방향이 아니라, 쌍방향적 소통을 제도화하고 있다. 대륙별 추기경 8명으로 구성된 민주적인 집담회도 만들었다. 인도와 독일, 콩고와 미국, 온두라스와 호주 등 출신 국적도 다양하다. 온두라스 추기경이 의장을 맡은 이 기구를 흔히 'C(cardinal)8'이라고 한다. 선진국 클럽 'G8'과는 전혀 다른 구성이 돋보인다. 이 자리서도 교황은 말하기보다는 경청하는 쪽이라고 한다. 일종의 집단지도체제형 협치 모델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바티칸의 탈이탈리아화, 탈서구화라고도 하겠다. 비서구적 세계화의 개창이라는 세계사의 흐름과도 합치하는 바이다. 교회에서 가장 현저했던 서구와 비서구, 중심과 주변의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적폐를 청산하고 있다.


이미 기층의 변화가 현저하다. 1910년, 가톨릭 신자의 70%가 북반구에 살았다. 대부분 유럽인이었다. 백년이 흐른 2010년, 정반대가 되었다. 남반구에 신도의 7할이 살아간다. 북반구는 3할에 그친다. 그 중 4할이 남아메리카에서 살고 있다. 세계 최대의 가톨릭 국가는 브라질이며, 가톨릭 세계의 제1언어는 라틴어도 이탈리아어도 아닌 스페인어이다. 그것도 스페인 본토 발음보다는 라틴아메리카의 히스패닉 스페인어가 주류이다. 앞으로 이 추세는 더해질 것이다. 남미 가톨릭 신자의 7할이 25세 이하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북반구와는 전혀 다른 현상이다. 젊은 사람일수록 교회와 척을 지고 있는 유럽과는 달리, 남미에서는 청년 신자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고로 장차 남반구가 영성 세계를 주도할 것임에 틀림없다. 가톨릭의 미래 또한 유럽의 외부에 달려 있다. 탈세속화, 재영성화의 새 바람이 남쪽에서부터 불어오는 것이다. 2000년 교회사에서 전례가 없는 남과 북의 대반전이다.


▲ 바티칸 광장. ⓒ이병한

2. 성과 속

교황에 빨갱이 딱지를 붙이는 네거티브 색깔론이 없지 않다. 근거 없는 흑색선전이고 가짜 뉴스이다. 비록 청년 시절부터 좌파 잡지의 구독자였다 하더라도, 단 한 순간도 마르크스주의에는 기울지 않았다. 사회주의 간행물을 읽으며 이성을 벼리되, 영성의 갈고 닦음을 방기하지 않았다. 독서하는 시간만큼 기도하고 명상하는 묵상의 시간을 확보했다. 영성을 갈고 닦아 신성에 이르는, 인성을 절차탁마하여 천성을 밝히는 사도로서의 임무를 방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에 비판적인 만큼이나 공산주의에도 냉담했다. 공히 일방적인 세속화의 그릇된 결과라고 여겼다. 신학교 시절 박사 논문에 해당하는 글의 주제부터 그러했다. '역사의 종언'이 아니라 '근대의 종언'을 예언했다. 세속주의에 지친, 세속화에 찌든 현대사회를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절박함만큼이나 관료화된 교회, 관성적인 성직자를 꾸짖었다. 세속문화 탓만 하고 교회 자체를 성찰하지 않는 나태함을 나무랐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는 사업을 방기한 교회야말로 병통이라고 질타했다. 모름지기 교회는 인민들과 동고동락해야 한다. 성직자는 정의를 구현하는 사제단이어야 한다. 그는 오늘날의 교회를 '야전 병원'에 빗대었다. 만인이 만인과 경쟁하는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치유해 주어야 한다. 고로 교회의 가장 시급한 임무 또한 심판이 아니라 힐링이다. 곁에 있어주어야 하고, 곁을 주어야 한다.


교황으로 발표한 첫 공식 문헌도 복음의 축복(Evangelii Gaudiem)이었다. 성인과 성현의 옛 말씀을 상기시켰다. 전범은 역시 예수회이다. 전도는 십자군의 성전도 아니고, 자본주의의 마케팅도 아니며, 공산주의의 프로파간다도 아니다.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난민 열 명이 지중해를 건너다 죽었다는 뉴스에는 심드렁하면서도, 주가가 10포인트 떨어졌다는 소식에는 흠칫하는 현대인들의 멘탈 붕괴 상태를 치료해야 한다.


그는 자유주의도 사회주의도 엘리트 프로젝트라고 여겼다. 한쪽은 '깨어있는 시민'들을 양성하고, 다른 쪽은 '각성된 노동계급'을 배양코자 한다. 어느 쪽도 민초들의 삶에 면면히 계승되고 있는 오래된 지혜를 신뢰하지 않는다. 유물론에 바탕하고 있음도 공통적이다. 하지만 만물이 영물임을 망각한 유물론은 가짜 과학(Fake Science)일 뿐이다. 그래서 인간을 물질적으로만 이해한다.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하고, 무의식이 의식을 규정한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영적인 충만, 도덕적 욕구 충족에는 하등의 관심이 없다. 수양과 수련도 등한시 한다. 먼저 빵을 더 키울 것인가, 적은 빵일망정 나눌 것인가 갑론을박할 뿐, 공히 사람들을 개돼지 취급하기는 매한가지다. 빵으로 밥으로 유혹하면서 표를 매수하는 것이 오늘날의 선거판, 정당정치의 민낯이다.


자연스레 계몽주의에도 거리를 두었다. 이성의 빛을 맹목하는 것(Enlightenment)이야말로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비극이라 했다. 마치 사피엔스가 지구의 주인이고, 지상의 주권자인양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코 그러하지 않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일 뿐이다. 결단코 주권자가 될 수 없다. 그 커다란 착각으로부터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왔다. 자연을 타자로 관찰하는 이성이 득세하고, 천인합일을 추구하던 영성은 축소되고 말았다. 고로 자유주의도 사회주의도 호모 사피엔스의 본성을 거스른다. 한쪽은 원자화된 개인으로 사회를 파편화시키고, 다른 한쪽은 균질한 계급으로 역사와 전통을 말소시킨다. 그래서 공산주의 국가는 우울이 창궐하고, 자본주의 국가는 불안이 만연하다. 어느 쪽도 행복하지가 않다. 교회를 떠난 현대인들이 도달한 곳은 결국 정신병원과 심리치료이다.


이와 같은 교황의 독특한 현대사회론도 아르헨티나의 경험에서 도출된 것이다. 좌충우돌, 좌고우면했던 지난 백년이다. 성과 속이 치열하게 경쟁했던 백년이기도 하다. 19세기말부터 국가와 교회의 경합이 본격화되었다. 자유주의 엘리트들은 유럽을 모델로 삼은 세속화를 열망했다. 응당 예수회에 기반을 둔 교회를 경쟁자로 여겼다. 일체의 교육을 국가가 담당하는 개혁안을 입법화한다. 공교육에서 교회를 전면 배제시킨 것이다. 경건한 신자들이 아니라 계몽된 국민을 양성코자 했다. 이를 수천 년 미신에 대한 과학의 승리라고 규정했다.


도취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공황으로 말미암아 (구)자유주의 세력은 몰락한다. 재차 교회는 목소리를 높였다. 1930년대 자유주의를 비판하고 대안적 진실을 설파하며 '가톨릭의 봄'을 구가한다. 교회가 발행하는 신문과 잡지, 라디오 방송이 약진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동시에 사회주의에도 저항했다.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 여기는 무신론 국가는 더욱 끔직한 사태였다. 이념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했다. 프란스치코는 바로 그 시절, 1936년에 태어났다.


세속주의의 견지에서 교회의 재림은 역사의 반동이 아닐 수 없었다. 늘 세속화의 최후 보루는 군부였다. 군사 쿠데타를 통하여 교회를 제압하고 재차 우파 정권을 수립한다. 교회의 빈자리, 우익 군사정부에 맞서 궐기한 것은 좌익 게릴라였다. 좌/우간 격렬한 대립과 분쟁으로 아르헨티나의 국력은 급속도로 소진되었다. 1970년대 예수회마저도 좌/우로 분열된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쿠바 혁명 성공에 고무된 성직자들이 적지 않았다. 해방신학을 제창하는 진보파들과 공산주의를 적대하는 보수파 사이에서 예수회의 근간이 흔들렸다. 프란치스코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았다. 군사독재에 협력하는 보수파들을 옹호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쿠바식 무장혁명을 주장하는 급진파들과도 함께 할 수 없었다.


미래의 교황은 제3의 길을 궁리했다. 성과 속의 공진화를 꾀했다. 전례가 없지 않았다. 그의 사춘기 시절, 아르헨티나에서는 페론이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근사한 외모에 여배우 에비타를 부인으로 두고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폐론주의라는 독특하고 독창적인 실험이 한창이었다. 대공황의 폐해를 절감한 폐론은 자본주의에 비판적이었다. 국가의 시장 개입을 수긍했다. 그러나 국가만 개입하는 것에도 거리를 두었다. 여기서 교회의 역할을 강조했다. 사회의 도덕적 각성과 영성의 고무를 위하여 교회의 분투를 격려했다. 국가를 통하여 시장만능주의를 견제하는 것처럼, 교회를 통하여 국가만능주의를 교정코자 한 것이다. 그래야 선전과 선동으로 복음과 은총을 소거시켜버린 소련과 동구의 오류를 복제하지 않을 수 있었다.


예수회도 호응했다. 페론과 더불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서 새 길을 내고자 했다. 서구를 모방하지도, 동구를 답습하지 않으면서 아르헨티나의 역사와 문화와 전통에 바탕한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 교회의 교리를 국가의 정책으로 입안함으로써, 복지국가와 복음국가의 공진화를 도모한 것이다. 하여 페론주의를 아르헨티나 판 뉴딜 정책으로 빗대는 것은 미진하고 미흡한 비유이다. 대규모 공공 지출과 재분배 정책만큼이나 도덕적이고 영성적인 가치의 영도기관으로 교회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고아원, 탁아소, 양로원이 늘어나는 만큼이나 교회와 신학교도 불어났다. 자본을 인간화하고, 노동을 신성화하자는 폐론의 사자후 또한 교리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예수회 신부를 정책 자문으로 삼기도 했다. 이 성/속 합작의 실험이 군사 쿠데타로 좌초되면서, 군부와 게릴라 간 좌/우 투쟁이 격화되었던 것이다.


역사의 무대 밖으로 밀려난 교회에서 프란치스코는 와신상담을 도모했다. 페론의 '가지 못한 길'을 경장하고 갱신했다. 주교가 되면서 신학교의 커리큘럼을 바꾼다. 유럽의 고전 중심 교육에서 탈피하여, 아르헨티나의 문학과 남미의 역사를 가르쳤다. 자연스레 가톨릭과 히스패닉 전통의 결합을 강조했다. 영판 새 것만은 아니었다고 하겠다. 본디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이었고, 초기 예수회의 정신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좌/우에 휘둘리지 않고, 근본으로 회귀하고 원천으로 진입했던 것이다. 특별히 강조한 것은 인민(El Pueblo)이라는 개념이다. 자유주의적 시민도, 사회주의적 계급도 아닌 아르헨티나의 역사와 문화의 산물로서 인민을 옹호했다. 이들은 계몽되어야 할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래된 지혜와 전통을 간직한 역사의 주체이자 정의와 평화의 담지자였다.


새천년 21세기, 대주교와 추기경이 되어서는 아르헨티나 대화(Dialogo Argentino)를 주도한다. 세속의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 간 끝장토론을 이끌었다. 2001년 국가 파산으로 망가진 나라를 성과 속의 합작으로 되살리기 시작했다. 교회가 최선두에 섰지만, 교회만도 아니었다. 민간의 연결망을 복원하고 이웃애를 발휘하면서 상부상조 정신을 북돋았다. 국가가 무너진 자리에서 민간의 활력이 되살아난 것이다. 아르헨티나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자그마치 2000여 개의 비정부기구가 발족했다. 민간의 자율성을 발휘하여 교통, 식량, 보육, 의료 등 기초 서비스 문제를 해결했다. 정치인들이 아니었기에 선거에 연연하지 않고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할 수도 있었다. 정당 간 경쟁과 이익집단의 로비로 물들어버린 근대정치와는 다른 새 정치를 선보인 것이다. 동시대 카리스마적 지도자 차베스에 의탁하여 국가 의존을 심화시켰던 베네수엘라와도 다른 모델이었다.


성/속을 아우르는 대연정의 지도자로서 프란시스코는 국가와 국민, 조국을 분류했다. 국가는 지리적인 것이다. 국민은 제도적인 것이다. 조국은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것이다. 국경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이민국가의 국민 또한 거듭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조국은 근원적인 존재이다. 세대와 세대를 이어, 역사를 통하여 전수되는 것이다. 그래서 문명에 바탕을 둔다. 아르헨티나는 기독교 문명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기독교의 갱신 없이, 교회의 회생 없이 새 정치도, 새 국가도 가능하지가 않다. 여론조사로도 입증이 되었다. 세속기구인 입법부와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을 긴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신뢰받고 있는 기관은 단연 교회이다. 가톨릭 신자라는 정체성의 비중은 갈수록 높아져 90%까지 이르렀다. 공적 서비스와 영적 서비스를 동시에 제공하는 교회의 개혁에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시민들의 공화국과 성자들의 공화국의 상호 진화, 성과 속의 일대 반전으로 다른 백년의 물꼬를 틔운 것이다.

3. 고와 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추기경이 바티칸의 교황이 됨으로써 아르헨티나 대화는 세계화되고 있다. 종교간 대화, 문명 간 대화를 주도한다. 500년간 서먹했던 프로테스탄트 신교와의 화해를 이끌고 있다. 2014년 6월 24일, 개신교 지도자들을 바티칸에 초청하여 환담을 나누었다. 신부와 목사가, 신교와 구교가 함께 기도를 올렸다. 교리로 다투지 않고, 개종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영성을 공유하고 공감했다. 내가 좋은 것을 남에게 권하기 보다는, 내가 꺼리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않는 황금률을 실천한 것이다. 마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발표된 지 꼬박 500년이 되는 올해 10월 31일에는 신교와 구교가 함께 종교개혁의 의미를 음미하는 기념비적 풍경을 바티칸에서 목도하게 될 것이다.


500년 신/구교가 서방 교회의 분열이라면, 1000년 전에는 동/서 교회가 갈라졌다. 1054년, 서방의 가톨릭과 동방의 정교회가 분화된 것이다.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은 '제 2의 로마'를 자처했다. 1453년 비잔틴제국이 몰락하고 오스만제국으로 대체되면서는 모스크바가 '제 3의 로마'를 자임했다. 러시아제국을 비잔틴제국의 계승자로서 자리매김하면서, 러시아 정교회를 유일하게 올바른 기독교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서구와 동구, 20세기 냉전의 뿌리에 저 멀리 천년 동/서 교회의 분단이 자리했던 셈이다. 그리하여 러시아 정교회의 총주교 키릴(Kirill)과 가톨릭의 교황 프란치스코가 손을 맞잡은 2016년 2월 12일 또한 획기적인 순간이었다. 천년만의 재회를 통하여 기독교세계의 공존체제 수립을 다짐했던 것이다. 장소 또한 의미심장했다. 쿠바의 하바나였다. 가톨릭 신자들이 많은 곳이다. 소련/러시아와 긴밀한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신냉전 운운하는 세속의 갈등을 치유하는 돌파구를 영성의 지도자들이 먼저 마련한 것이다.

▲ 프란치스코 교황과 키릴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가 지난해 2월 쿠바 하바나에서 만났다. ⓒAP=연합뉴스

두 사람은 예수의 사도로서 경쟁자가 아니라 형제임을 선언했다. 유럽이 좌/우 이념으로 갈등하거나 민족주의/국가주의로 갈라설 것이 아니라 기독교문명의 뿌리에 충실함으로써 대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데도 공감을 나누었다. 20세기 서구와 동구가 공유했던 전투적 세속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대동단결을 이룬 것이다. 새 것에 열광하는 아방가르드 엘리트가 주도했던 민족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에 휩쓸릴 것이 아니라, 전통을 고수하고 존중하는 인민들이 주역이 되어 교회를 교회답게, 나라를 나라답게, 유럽을 유럽답게 만들자고 선언했다. 예수의 삶을 실천하는 것,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 뿌리로 내려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이자 개벽이기 때문이다.


교황의 대연정과 대탕평은 사회주의로 획일화하는 소비에트연방(SU)을 극복하고, 자유주의로 통일하는 유럽연합(EU)도 초극한다. 만국이 만국과 국익을 다투는 '국제정치'가 아니라, 문명과 문명이 대화하며 영성을 고조시키는 '세계정치'의 지평을 선보인다. 프랑스 혁명 이래 성/속을 나누고, 좌/우를 가르고, 여/야를 다투었던 '정치적 이성'에 기초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원수마저 이웃처럼 사랑하라 하셨던 '정치적 영성'에 바탕하여 좌/우의 대연정, 성/속의 대협치를 구현함으로써 종파로 신도를 가르고 정파로 인민을 분열시켰던 유럽의 고질병을 치유하고자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천주교와 개신교, 무슬림과 유대교들이 함께 심은 올리브 나무가 자라나고 있다. 구동존이와 화이부동, 크레올/혼종화와 융복합의 똘레랑스를 상징하는 새 천년의 기표이다.


▲ 바티칸 박물관의 영성 계단. ⓒ이병한

4. 동과 서

바티칸에서는 산타 마르타(Santa Marta) 게스트하우스에 묵었다. 교황의 인기에 숙소 또한 만원이었다. 마닐라에서 순례 온 신도들과 상하이에서 여행 온 유커들과 한 방에서 묵었다. 종종 교황이 게스트하우스를 방문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다는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아쉽게도 내가 머물렀던 이틀간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뜻밖에도 교황을 목도한 것은 떠나는 마지막 날, 점심시간이었다. 숙소 식당에 깜짝 출물하신 것이다. 가끔 점심 드시러 이곳으로 나오신다고 한다. 그래서 교황 자리를 따로 마련했지만 항상 남들과 똑같이 식판을 들고 줄을 선다고도 했다. 특권의식일랑 요만큼도 없는 서민적인 교황이다. 그로 인해 단순함과 소박함이 밀라노의 최신 패션 트랜드가 되었다는 잡지 기사도 읽었다. 그와 한 테이블에 앉는 은총을 누리게 된 관광객들은 함박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말을 섞고, 악수를 나누고, 포용하고, 키스하고,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시샘이 솟을 정도였다. 교황도 마냥 즐거운 얼굴이었다. 천진난만한 장난꾸러기, 여든의 나이를 무색케 하는 베이비 페이스였다.


교황은 취임 1년 만에 미국, 중국, 러시아의 최고 지도자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등극했다. 타임지도 '올해의 인물'로 그를 선정하여 표지를 하사했다. 하버드대학교의 비즈니스 스쿨은 애플의 스티브 잡스에 견주어 그의 리더십을 연구하는 강의를 개설했다고 한다. 죽어가는 조직에 새 숨결을 불어넣은 혁신적 CEO로서 주목하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이라는 고색창연한 조직을 가장 핫한 곳으로 리브랜딩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글쎄, 이러한 세간의 평가에 얼마나 달가워하실지는 잘 모르겠다. 나라면 서구판 반전 시대의 리더이자, 개벽의 아이콘이라고 불러드릴 것이다.


바티칸에서 '개벽 교황'이 등극한 다음 날, 베이징에서는 시진핑이 국가 주석으로 취임했다. 2013년 3월 14일이다. 기별을 먼저 보낸 쪽은 교황이었다. 교황이 축전을 보내자, 신임 주석은 답신으로 화답했다. 이듬해 춘절에는 모든 중국 인민들을 향하여 교황이 새해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교황이 음력설을 기념한 것 또한 역사상 최초였을 것이다. 신/구 교회의 화해, 동/서 교회의 화합만큼이나 중국과의 재회에도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늘 위대함의 기준이었고, 위대한 국가를 넘어 위대한 문명과 지혜의 보고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중국위협론과 중국붕괴론에는 아랑곳도 없이, 중국의 굴기가 세계의 평화와 문명 간 대화의 기회를 열어주고 있다고 한껏 치켜세웠다. 2014년 8월 한국 방문길에 중국 영공을 통과하면서도 시진핑 주석과 중국 인민에 대한 축복의 메시지를 잊지 않았다. 냉전의 최전선에서 소련 해체에 일조했던 왕년의 바티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세속의 자유주의 근본주의자, 교조적 민주주의자들이 여전히 '중공'과 적대하는 반면으로, 열린 영성으로 고양된 교회가 더욱 적극적으로 새 천년의 동서관계를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14억 세계 최대의 세속국가 수장과 13억 세계 최대의 영성집단 영수가 만나는 세기의 만남, 아니 '밀레니엄적 만남'은 2021년이 유력하게 점쳐진다. 바티칸과 베이징의 관계가 끊어진 해가 1951년이다. 한국전쟁의 한복판, 바티칸이 대만으로 피신한 중화민국을 승인했던 것이다. 냉전의 소산으로 베이징과 로마가 멀어졌던 것이다. 단교 70년이 되는 2021년, 양자가 회동하기 위한 물밑 작업이 한창이다. 공교롭게도 1921년은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천주교 교황과의 악수는 중국공산당이 협량한 20세기형 공산주의로부터 탈피했음을 환기시키는 자리가 되기도 할 것이다. 공히 중화문명의 부흥과 기독교문명의 부흥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바티칸과 베이징은 의기투합할 수 있다. '신형 성/속 관계', '신형 동/서 관계'의 초석을 닦는 '다른 천년'의 이정표가 될 듯하다.


이 밀레니엄적 만남을 준비하며 프란치스코 교황이 거듭 상기시키고 있는 인물이 한 명 있다. 바로 예수회의 먼 선배인 마테오 리치이다. 마테오 리치의 삶을 통하여 중국에 대한 존경심을 키웠다고 한다. 중의학에도 호의적이다. 2004년 추기경 시절부터 장쑤성 출신 이민자의 후손으로부터 물리치료를 받았다. 아버지는 도교의 도사였다고 한다. 공산당 정권을 피해 아르헨티나까지 피신한 것이다. 남아메리카까지 이주하여 전통의 가르침을 고수했던 것이다. 추기경은 도사가 지어주는 한약을 달여 먹으며 양약을 끊었다고 한다. 외부에서 투입하는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 내 몸의 기운, 근기(根氣)를 되살리는 방법을 배우고 익힌 것이다. 영혼을 달래는 치료사와 몸을 다스리는 한의사의 대화는 종종 중국의 '道'(도)와 유럽의 'God'(신)에 대한 토론으로도 이어졌다고 한다. 400여 년 전, 마테오 리치가 도모했던 동서 문명 간 대화를 남미에서 이어갔던 셈이다.


바티칸을 떠나 로마 시내로 돌아온 나는 비로소 <천주실의>를 펼쳐 들었다. 서방의 선교사와 동방의 선비들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천주와 천하의 대연정을 궁리하던 17세기 초엽의 베이징을 떠올렸다. '기억의 궁전'에 대한 상상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로마는 마침 휴일이었다. 춘절 축제로 공항부터 백화점, 거리와 광장까지 온통 붉게 물들었다. 마테오 리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21세기의 신천지이다. 그가 첫 발을 내디뎠던 동서 간 대화가 500년이 지나서야 마침내 무르익을 것도 같다. 서양에서 온 큰 선비(西士), 리치를 복기해 보기로 한다.

▲2013년 3월 19일 교황 대관식.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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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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