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알자지라의 전설 "'폭스뉴스'가 '가짜 뉴스'"

[유라시아 견문] 알자지라 : 대안적 진실

1. 알자지라

지난 1년 이슬람 세계 방방곳곳을 다녔지만, 텔레비전 채널만은 하나로 고정돼 있었다. 알자지라이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에 수치심을 느낀 것도, 光化門(광화문)의 현현인 듯 촛불항쟁에 자부심을 맛본 것도 알자지라 방송을 통해서였다. 비단 아랍어 공부 수단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아랍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방법을 연마하고 터득하는 수련의 과정이었다. 다른 눈으로, 겹눈으로, 입체적으로 세계를 관찰하고 감별하게 된다.


오해가 크다. 글로벌 공론장에서 영어가 득세하는 냥 착각한다. 실상은 그러하지 않다. 영어에만 몰입되어 있기에 그러한 착시가 일어나는 것이다. 으뜸은 아랍어이다. 가장 다양한 채널을 확보하고 있다. 현재 아랍어 위성방송의 채널 수는 700개를 넘어섰다. 전 세계 위성 채널의 40%가 아랍어로 송출된다. 그 전파를 수신하는 아랍어 공론장의 규모는 16억에 이른다. 20억 영어 공론장에 버금가는 규모이다.


그 중에서도 알자지라는 독보적이다. 1996년 11월 1일, 첫 방송이 나갔다. 2016년, 20주년을 맞이했다. 20년 사이 괄목할 발전을 이루었다. 시운이 딱 맞아떨어졌다. 탈냉전 이후 중동이 세계 뉴스의 중심이 되었다. 걸프전부터 9.11을 거쳐, 이라크 전쟁과 IS 등장, 시리아 내전까지 새 소식이 마를 날이 없었다. 알자지라는 아랍의 시각에서 중동의 소식을 전하면서 대안적 미디어로 부상했다.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공습을 바그다드에서 독점 보도한 것도 알자지라였다. CNN 화면이 일방적으로 확산되었던 걸프전과의 결정적인 차이다. 항공모함에서 미사일이 발사되는 장면이 아니라, 미사일 폭격을 맞고 붕괴되는 바그다드의 도심이 클로즈업되었다. 오사마 빈 라덴을 독점 취재한 것 역시 알자지라이다. 알카에다의 영상 메시지의 거개가 알자지라를 통해 송출되었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출발한 '아랍의 봄' 국면에서도 알자지라는 발군이었다. 이슬람 세계의 촘촘한 취재 네트워크를 십분 발휘하여, 특종에 특종을 거듭했다.


CNN 같은 뉴스전문 채널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2003년 알자지라 네트워크로 이름을 고친다. 지금은 스포츠 채널만 10개에 이른다. 유럽의 축구, 남아시아의 크리켓, 미국의 야구와 농구를 모두 아랍어로 중계한다. 가장 최근에는 페더러와 나달이 맞붙었던 호주 오픈 결승전의 명승부를 아랍어로 볼 수 있었다. 2006년에는 알자지라 잉글리시도 출범한다. 아랍의 시각을 영어로 역수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7년에는 알자지라 다큐멘터리도 개설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채널이다. 작년에 방영되었던 <칼리프>, <십자군>, <와쿠프>는 걸작이라는 수사가 전혀 아깝지 않은 명품 다큐였다. 2013년에는 알자지라 아메리카까지 만든다. 중동 매체에서 글로벌 미디어로 진화한 것이다.

2016년에는 경사도 잇따랐다. 런던에서 열린 온라인 미디어 시상식에서 베스트 웹사이트를 비롯, 4개 부문을 석권했다. BBC와 가디언, ITV 등을 모두 제친 것이다. 올해의 온라인 에디터로 선정된 이 역시 알자지라의 야시르 칸이다. 구미 미디어의 정보 독과점을 타파하겠다는 출범 당시의 목표를 상당 부분 달성한 것이다. 알지자라를 대표하는 토른 프로그램의 제목이 상징적이다. <الاتجاه المعاكس> 직역하면 '반대 방향', '다른 방향'쯤 된다. 브렉시트, 미국 대선, 시리아 내전 등 굵직굵직한 사건에 대해서도 이 토론 방송을 보면서 생각을 다질 수 있었다.

이 방송을 처음 기획한 이가 아흐마드 알 셰이크이다. 알자지라 초대 편집장을 지낸, 40년 경력의 베테랑 언론인이다. '알자지라의 전설'로 통하는 그를 만났다. 대안적 목소리를 들어본다.


▲ 알자지라 본사(도하).ⓒ이병한

2. 대안적 진실

이병한 : 알자지라 2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초대 편집장으로 소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아흐마드 : 언론 지형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소셜 미디어의 등장으로 신문과 방송이 주도하던 '부르주아 공론장'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SNS를 통하여 대안적으로 소통하면서 주류 매체의 정보 생산 및 유통 독과점을 허물고 있습니다. 풀뿌리 공론장이 출현한 셈이죠. 그러나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가짜 뉴스가 범람하고 대안 팩트까지 난무하는 탈진실 시대가 열렸습니다. 거짓이 진실을, 감정이 이성을, 개인적 편견이 종합적 판단을 대체합니다. 시시비비를 갈수록 가리기 힘든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정보의 부족만큼이나 정보의 과잉이 문제를 야기하는 시대입니다. 기성 미디어의 하나로서 알자지라의 역할을 재정립해야 할 것입니다.

이병한 : 얼핏 SNS에 부정적인 견해처럼 들립니다.

아흐마드 : 가짜 뉴스가 꼭 소셜 미디어의 전유물만은 아닙니다. 폭스 뉴스(Fox News)야말로 가짜 뉴스(Fake News)의 진원지였습니다. 그러나 CNN과 BBC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2016년 영국에서 '칠콧 보고서'가 발표되었습니다. 비판의 표적은 당시의 토니 블레어 정권입니다. 하지만 언론 또한 정보기관이 흘린 거짓 정보를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과장 보도함으로써,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면하기 힘듭니다. 군산복합체의 이익에 기성 언론이 복무한 것입니다. 최근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보도 또한 의구심이 없지 않습니다. 특정 정파의 주장을 검증 없이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미국 대선에서 드러난 민심의 표출을 수긍하지 않고, 외부세력의 개입으로 빚어진 결과인 것처럼 왜곡시킵니다. 선거 내내 전폭적으로, 일방적으로 힐러리 당선을 지원했던 주류 언론들이 자성하기보다는 남 탓에 열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오리버럴과 네오콘이 합작하고 거대 미디어 기업들이 가세하여 트럼프 정권을 24시간 총력전으로 흔들고 있습니다. '대안적 진실'을 말하자면 선거 개입이야말로 20세기 내내 미국이 타국에 해온 것입니다. 그 선거 결과가 뜻에 맞지 않으면, 정권을 전복시킨 경우도 허다합니다. 아프가니스탄부터 리비아까지, 이슬람 세계에서는 21세기에도 지속되고 있는 현상입니다.


여론 조사의 신빙성 또한 갈수록 의심받고 있습니다.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 투표도, 미국의 대선 결과도 주류 언론의 여론 조사는 줄곧 잘못된 정보를 발신해왔습니다. 여론을 왜곡한 것에서 나아가 여론을 조작하려 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이후에도 뻔뻔하고 태연한 얼굴로 '대안적 진실'을 호기롭게 설파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야말로 주류 미디어와의 적대적 관계 속에서도 트위터를 통하여 대중들과 소통하며 최고 권력까지 거머쥔 'SNS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병한 : 트럼프를 히틀러에 빗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요. 중국현대사를 전공한 제 입장에서는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이 떠오릅니다. 당시에는 대자보라는 게 있었죠. 트위터는 '디지털 대자보' 쯤 되는 것 같습니다. 마오는 인민들과 직접 소통하면서 '사회주의 기득권'의 당과 국가를 뒤흔들었습니다. 트럼프가 자유주의와 '정치적 올바름' 등을 공유하는 미국 사회의 '기득권', '기성 세력'이 아니라 소외된 백인 노동자들을 동원한 점도 비슷해 보입니다. 2016년은 1966년 프롤레타리아트 문화대혁명 50주년이기도 했지요.

아흐마드 : 트럼프는 취임 이후 기존의 백악관 기자회견실을 철거했습니다. 50여 명으로 한정된 장소에서 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자회견실로 개조할 것이라고 합니다. 주류 미디어의 엘리트 기자들만이 아니라, '대안적 미디어'의 소수 기자들도 대우하겠다는 뜻입니다. 기성 매체들이 '선출되지 않은 권력'으로 누리고 있던 특권을 박탈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류 미디어가 '가짜 뉴스'를 발신하고 있다고 조롱하는 이유의 상당수가 대외 보도라는 점입니다. 그 중에서도 중동 뉴스가 중요하지요. 이라크부터 시리아까지 미국의 중동 정책이 실패한 것과 미디어 보도가 불가분이라는 점입니다. 알자지라에 20년째 몸담고 있는 저로서는 트럼프의 견해를 마냥 부정하기가 힘듭니다. 알자지라의 출범 자체가 1960년대 이스라엘-아랍 전쟁이나, 1990년 걸프전쟁의 보도가 지나치게 서방 중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랍의 소리, 이슬람의 시각을 전달할 필요가 긴절했습니다.

이병한 : 알자지라의 시각에서 2016년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엇이었습니까?

아흐마드 : 단연 시리아 내전입니다. '아랍의 봄' 이후 중동의 향방을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였습니다. 동시에 준-세계대전에 값하는 전쟁이기도 했습니다. 이란과 사우디의 지역 강국과 미국과 러시아의 세계 강국이 모두 개입한 복합적인 전쟁이었습니다.

이병한 : 다른 시각, 다른 관점으로 내세우실만한 내용은요?

아흐마드 : 보도의 전제부터가 편향되어 있습니다. 아사드 정권을 '악'으로 치부하고, 체제 전복만을 '선'으로 여깁니다. 정권 전환만을 유일선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다각적인 보도와 분석이 불가능합니다. 정부군이 알레포를 재탈환한 사건을 '해방'이 아니라 '학살'로 낙인찍는 경우가 대표적이지요. 일각에서는 작전을 주도했던 러시아에 의한 홀로코스트라고 비유합니다. 반면 평화 협상과 내전 종식에는 관심이 덜합니다. 내전 종식이야말로 시리아인의 입장에서 크게 환영해야 하는 사건임에도 정작 보도는 뜸합니다. 다마스쿠스를 비롯하여 내전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하는 사업 또한 거의 주목받고 있지 못하지요. 민주주의로의 체제 전환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그 밖의 사정에는 무심한 것입니다. 시리아에만 한정되지도 않습니다. 리비아도 마찬가지이죠. NATO 군이 개입하여 카다피 정권을 붕괴시켰습니다.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다며 대대적인 뉴스가 쏟아졌습니다. '북아프리카의 히틀러'를 제거했다는 전시 보도가 넘쳐났지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무정부 상태에 빠진 리비아의 현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습니다. 리비아는 아프리카에서 생활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그 정권이 전복됨으로써 순식간에 '실패 국가'로 전락했습니다. 테러리스트의 온상이 되고 말았죠. 리비아의 젊은이들이 IS에 속속 참여하고 있습니다. 트럼프가 거듭 오바마-힐러리가 IS를 만들었다고 '가짜 뉴스'를 발신하는 연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전혀 틀린 견해라고 반박하기도 힘들어요.

이병한 : 다른 사례도 있습니까?

아흐마드 : 예멘도 내전 상황입니다. 그러나 시리아에 비해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맨 내전을 촉발한 세력이 미국과 사우디이기 때문입니다. 국제법 위반에 대한 UN 조사조차 미국은 거부하고 있습니다. 시리아에서, 리비아에서, 예멘에서, 중동 전체에서 어느 쪽이 내전을 유도하고 있는지, 어느 쪽이 내전을 종식시키고 있는지 복합적으로 판별해야 합니다. '십자군식 프로파간다'는 지양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병한 : 중동 이외의 지역은 어떻습니까? 이슬람 세계가 아닌 곳에서도 알자지라만의 시각이 관철되는지요?

아흐마드 : 우크라이나가 대표적인 경우이겠죠. 러시아의 제국주의를 성토했던 보도가 난무했던 이후 잠잠해졌습니다. 그러나 극우파들이 준동했던 '민주화' 이후 우크라이나는 경제적으로 붕괴 직전의 상황까지 곤두박질 쳤습니다. 인구의 절반이 빈곤선 이하로 떨어졌어요. 부패지수 또한 더욱 나빠졌습니다. 우크라이나 이전에는 발칸 반도도 있지요. 유고전범재판소에서 밀로세비치의 측근들이 줄줄이 무죄 선고를 받고 있습니다. 2016년에도 계속 무죄 판결이 나왔어요. 그러나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한때는 '발칸의 도살자'라며 인종 학살의 주범으로 낙인찍는 융단폭격식 보도들이 넘쳐 났던 것과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가짜 뉴스'만 기억되고, '대안적 진실'은 묻혀 있는 셈입니다. 아프가니스탄부터 이라크를 거쳐 리비아까지, '인도주의적 개입주의'의 원형이 되었다는 점에서, 1990년대 발칸사태와 나토의 개입을 재조망하는 특집을 알자리라에서 기획하고 있습니다.

이병한 : 발칸 반도는 저도 올해 가볼 예정입니다. 유럽의 논리, 이슬람의 논리, 러시아의 논리가 중층적으로 길항하는 흥미로운 장소 같습니다. 알자지라의 보도를 긴히 참조하겠습니다. 2017년에 대한 전망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흐마드 : '러시아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2016년은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25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러시아의 귀환이 도처에서 완연했습니다. 시리아에서는 러시아가 완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와 터키, 이란의 고위 관료들이 모스크바와 아스타스에서 시리아의 재건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합작하여 현재의 중동을 탄생시켰던 1916년과 전혀 다른 풍경이 연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리비아에서도 러시아 군이 국가 재건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NATO의 주축국이었던 터키도 러시아에 기울어지고 있고, 이스라엘마저도 러시아와의 협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신중동 질서를 러시아가 주도하여 만들어 가는 중입니다. 탈냉전 이후 '자유주의적 세계 질서'가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러시아의 영향이 전 방위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침 미국에서도 푸틴과 적대했던 오바마-힐러리가 아니라 트럼프가 당선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서 푸틴의 지위는 더욱 견고해질 것입니다. 탈근대=탈서구=탈진실 시대의 전위로서 러시아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0세기의 공산주의가 아니라 21세기의 새로운 '러시아 혁명'에 착목해야 할 것입니다.

이병한 : 동유라시아에 있으면 '중국의 굴기'만이 과장되게 인식됩니다. 서유라시아에 있노라면, 그리고 이슬람세계의 대안적 미디어인 알자지라를 통해 세계를 접하고 있노라면, 러시아의 귀환이 확연하게 느껴집니다. 2017년에는 저 또한 모스크바에 거점을 차리고 유럽부터 중앙아시아까지 살펴볼 예정입니다. 북방에 가서도 알자지라를 애청하면서 '대안적 진실'에 더욱 근접해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머지않아 알자지라 러시아어, 알자지라 중국어 채널까지도 생겨나기를 기대해 봅니다.

▲아흐마드 알 셰이크ⓒaljazeera.com


3. 등대 : 아랍의 소리

알자지라가 불현듯 솟아난 것은 아니다. 21세기 신아랍에 도하가 있다면, 20세기 구아랍에는 카이로가 있었다. 아랍 세계와 이슬람 세계를 관장하는 정보 제국의 수도였다. 카이로에서 발행되는 신문과 잡지, 도서가 이슬람세계 전역으로 유통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라디오 방송이 유명하다. 1950~70년대 절정기를 구가한다. 당대 최고의 라디오 스타는 나세르였다.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이집트 너머 아랍 세계 전역으로 울려 퍼졌다. 그 전위 매체가 <아랍의 소리>(صوت العرب‎‎)였다. '아랍의 소리'를 통하여 공화 혁명과 아랍 통일을 설파하는 사자후를 토해낸 것이다. 응당 왕정국가들은 카이로발 라디오 방송을 통제해야 했다. 요르단과 예멘의 국왕들이 공공장소에서 라디오를 몰수하는 조치를 취할 정도였다. 아랍 세계의 공화파와 왕정파간 이데올로기 투쟁을 대리하는 선전기구였던 셈이다.


나아가 새로운 국제 정보 질서를 요구하는 정보 자립의 출발로서 <아랍의 소리>를 자리매김할 수도 있다. 1950~60년대 아랍 세계에서 독립 국가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식민지 시절의 군사적 지배와는 다른 정보와 지식의 지배(=오리엔탈리즘)가 화두로 부상하게 된다.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의 정보 격차를 둘러싼 논쟁이 촉발된 것이다. 그 정보 격차를 시정하기 위하여 1975년에 설립된 것이 비동맹 국가 통신사 기구(Non Aligned News Agencies Pool)이다. 1976년에 26개, 1978년에는 50개 통신사가 참여한다. 거개가 아랍 및 이슬람 국가들이었다. 초국가적인 정보 질서를 구축하려는 시도가 20세기 후반부터 지속되었던 것이다.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볼 수도 있다. 19세기, 지중해의 풍향이 바뀐다. 아랍풍이 불었던 천 년을 대신하여 유럽풍이, 북풍이 불기 시작했다. 유럽의 바람이 가장 먼저 닿는 곳이 알렉산드리아였다. 그리스인, 이탈리아인 연결망이 여전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도입한 신문물 가운데 인쇄술도 있었다. 1821년 최초의 인쇄소가 들어선다. 이듬해 가장 먼저 찍어낸 책이 이탈리아어-아랍어 사전이다. 그러나 속도가 붙지 않았다. 필사본 시대 유럽을 압도했던 아랍이 인쇄술 시대에 뒤처진 데에는 아랍어의 특성도 한몫했다. 위치에 따라 글꼴이 달라진다. 단어의 앞에 있느냐, 중간에 자리하느냐, 마지막에 붙느냐에 따라 모양새가 변하는 것이다. 활자판 만드는 초기 비용이 많이 들었다. 최초의 <코란> 인쇄본이 완성된 것도 1923년에 이르러서이다. 그 백년 새 유럽과 아랍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응당 유학의 방향도 달라졌다. 이집트 최초의 국비 유학생이 파견된 나라는 프랑스였다. 10대의 파릇파릇한 울라마 지망생들이 유럽에서 공부했다. 파리 견문기를 책으로 발간한 이도 있다. 아랍어판 <서유견문>에 해당한다. 이집트는 물론 아랍 세계에서 큰 화제를 일으켰다. 그렇게 유학생 시절부터 명성을 쌓은 이가 타흐타위이다. 귀국해서는 번역 사업에 매진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비롯하여 서구의 정치 사상을 아랍어로 번역했다. 교육부 산하 번역국을 담당했고, 번역학교의 교장을 맡기도 했다. 본디 이슬람 학자였기에 유럽어와 아랍어 간 번역에 능숙했던 것이다. 메이지 유신기 일본의 계몽가들이 동방 고전의 한자를 조합하여 유럽의 사상을 번역했던 것과 흡사한 이치이다. 일본식 한자 개념들이 중화 세계 전반으로 확산되어 간 것처럼, 이집트에서 고안된 신조어들이 이슬람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신문과 잡지도 속속 발간된다. 1876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처음 등장한 신문이 <하흐라므>이다. 피라미드라는 뜻이다. 카이로로 본사를 옮겨 지금까지 발행되고 있다. 150년 역사를 자랑하는 아랍 세계 최장수 신문이다. 최초의 주간지로는 <히라루>가 꼽힌다. 새 달이라는 뜻이다. 역시나 오늘까지 발행되고 있는 100년 이상의 정통 주간지이다. 월간지로는 <마나르>가 유명하다. 등대라는 뜻이다. 1898년에 발행을 시작하여, 1940년에 폐간되었다. 나로서는 유독 <마나르>에 눈길이 쏠린다. '改新(개신) 이슬람' 운동을 주도했던 지식인 잡지였기 때문이다. 디지털 미디어 알자지라의 기원으로 종이잡지 마나르를 꼽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등대'라는 제호부터 상징적이다. 세속화=서구화의 북풍 속에서 한 줄기 이슬람의 빛을 발산했다. 기고자들의 면면도 흥미롭다. 시리아, 레바논, 터키, 모로코, 인도, 인도네시아를 망라한다. 20세기형 국민국가 체제로 재편되기 이전 '최후의 이슬람 세계'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스레 독자들 또한 국가 단위로 쪼개지지 않았다. 태평양의 자바 섬부터 대서양의 카사블랑카까지 글로벌 움마를 독자로 삼는 초국적 잡지였다. 응당 세속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 '식민지 근대화'에 함몰되지도 않았다. 알라를 우러러 한 줌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민족 해방 운동보다는 문명 해방 운동에 가까웠다.

발간 당시에는 동조보다는 비판이 잦았다고 한다. 반식민, 반제국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쥔 쪽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이었다. <마나르>는 시대착오적인 보수파로 낙인찍혔다. <아랍의 소리>를 통하여 아랍민족주의가 절정을 구가하던 1960년대까지도 <마나르>를 주목하는 연구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새 천 년, 지금은 너도 나도 <마나르>를 연구한다. 문학, 철학, 역사학, 정치학, 사회학을 막론하고 <마나르>에 대한 석박사 논문들이 쏟아지고 있다. 1979년 이란 혁명 이래 도도하게 전개되고 있는 재이슬람화의 원조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슬람 문명의 현대적 유효성을 입증하는 기초 이론을 세운 시조로서 재평가 받고 있다.

4. 화두 : 움마와 천하

나도 <마나르>의 전권을 PDF로 구했다. 내년에 대학에 복귀하면 논문으로 써볼 요량이다. 비슷한 시기에 발행되었던 중국의 <동방잡지>와 견주어보면 흥미로운 그림이 펼쳐질 것 같다. 동아시아에서도 20세기에는 단연 <신청년>이 돋보였다. 1915년에 창간되어, 신문화 운동을 주도하고, 1921년 중국 공산당 창당을 이끈 독보적인 잡지였다. 1915년의 신청년이 1949년의 신중국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신청년>의 맞은 편에 서 있던 것이 바로 <동방잡지>였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로 내달리는 <신청년>에 어깃장을 놓으며 전통의 근대화를 옹호했다. 21세기 중국의 방향을 백년을 앞서 미리 준비해둔 것이다. 과연 중국에서도 <동방잡지>에 대한 논문과 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중이다. 1920년대 그 유명한 동서 문화 논쟁 또한 <신청년>과 <동방잡지>간 지식인들이 일합을 겨룬 것이었다. <마나르>의 특집 기획들을 일별하노라면, 마치 이슬람판 동서 문화 논전인양 보인다. 고로 <마나르>와 <동방잡지>를 겹쳐 읽는다면, 21세기 '동방의 등대'가 밝혀질 수 있겠노라 예감하게 되는 것이다.


견문 2년차, 중화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공진화를 진리하게 궁리하고 있다. 천하와 움마의 더불어 중흥이라는 필생의 화두도 얻게 되었다. 움마와 천하의 관점에서 지난 한 해를 회고해 보기로 한다. <유라시아 견문> 2권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알자지라 네트워크. ⓒaljazeer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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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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