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신화'에 가려진 '부산 혁명'을 주목하자

박정희가 만든 '영남 불패' 신화, 이번 대선에 깨진다고?

2007년 한나라당에서 이명박과 박근혜가 맞붙은 경선 이후, 2017년 더불어민주당 경선은 가장 치열한 당내 경선으로 기록될 것이다. 물론 호남에서 승기를 잡은 문재인이 유리해진 상황이지만, 10년 전과 비교될만한 구석은 많다. 보수 진영과 민주 진영의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당시 민주 진영, 진보 진영에서 또렷한 후보가 없었던 상황은, 현재 보수 진영에서 또렷한 후보가 없는 현 상황과 비슷하다. 지지율 1위 정당의 경선 승자가 대권을 쥘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비슷하다.

지역구도를 통해 정치 판세를 분석하는 것은 사실 불편하다. 유권자들의 표와 성향으로 작동하는 정치의 영역에서 지역주의적 요소를 빼고 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지만, 유독 배제의 지역주의에 의해 좌우되는 한국 정치의 부정적 측면을 증폭시키고 부추기는 것 같아서다. 지역주의가 문제라고 끊임없이 지적하면서도, 지역의 정치색과 그에 따른 이미지를 고착화하는 것이 바로 언론이다. 이처럼 장황한 서설을 늘어놓는 이유는 이 글이 대한민국 특정 지역의 정치색을 다루려 하기 때문이다.

1990년 3당합당 이후 27년 동안 한국 사회는 동서로 나뉘었다. 각각 영남과 호남으로 대변된다. 영남에서는 멀리 박정희의 공화당에서 시작해 민정당을 거쳐, 김영삼을 대선 후보로 내세운 민주자유당, 최근 이명박근혜 정권까지 보수 정당이 그 패권을 잡아 왔다. '새누리 계열'이라고 하자. 호남에서는 김대중의 평화민주당부터 역사상 첫 정권 교체를 이룬 새정치국민회의를 거쳐 현 더불어민주당까지, '민주 계열'이 패권을 잡아 왔다. (국민의당은 김대중의 뜻을 따른다는 의미에서 폭넓은 의미의 '민주 계열'로 보는 게 타당하다.)

27년간 고착화한 이 구도가 깨질 가능성이 높은 게 2017년 대선이라는 점은 현재 크게 주목받지 않는다.

호남의 선택은 정말 대통령을 만들어왔는가?

언론의 주목도가 덜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먼저 호남 정치의 역동성 때문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그런 면에서 호남은 꽤 성공했다. 유권자 수에서 영남에 비해 압도적으로 밀리는 지역이면서도 핸디캡을 딛고 대선판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정당을 두 개나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스스로 호남을 지역 기반으로 한다는 두 정당(민주당과 국민의당)의 유력 후보들이 모두 영남인 부산 출신이라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이다.

지금, 보수 진영의 유력한 영남 출신 후보는 없다. 홍준표 경남도지사 정도만 10% 안팎을 오르내릴 뿐, 대선판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호남을 핵심 지지 지역으로 삼는 정당에서 대통령을 배출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인지, 언론은 호남 지역 지지율은 경쟁적으로 보도한다. 터무니없는 응답자 샘플 수지만 민주당 대권 주자들의 호남 지지율이 출렁거릴 때마다 이를 대서특필한다. 지난 2002년 호남에서 시작한 '노풍'의 추억과 맞물려 호남 경선 과정이 소위 '얘기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호남의 승자가 전국을 재패한다는 '속설'은 여의도에서 이제 '명제'처럼 받아들여진다. 호남의 전략적 선택 때문이다.

박근혜 정권 출범 이후 호남은 계속 주목받아 왔다. 문재인의 2012년 대선 패배 후 치러진 첫 민주당 경선에서 호남은 김한길을 선택했다. '패배자' 문재인 세력을 견제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었다. 문재인은 재기를 꿈꿨다. 결국 박근혜 정권하에서 두 번째 당내 경선에 나섰고 당대표가 됐다. 그래도 호남은 문재인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안철수를 선택했다. 지난 2016년 4월 총선에서도 언론의 주목을 끌어낸 지역은 단연 호남이었다.

박근혜의 국정 운영 지지도가 불신받는 상황에서 야권 승리가 유력한 상황인데, 호남은 국민의당을 밀어주는 '모험'을 택했다. 창당 두 달 만에 총선을 치르게 된 국민의당의 주요 영입 대상은 호남 지역구를 노리는 인물들이었고, 이들은 '호남 정치 복원'을 내세웠다. 국민의당과 호남은 안철수에게 양날의 칼이었다. 호남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한 안철수는 '전국 정당'을 외쳤지만, 유권자는 국민의당을 호남에 고립시켰다.

그래서 이번 민주당 경선에서 단연 주목받은 지역은 호남이었다. 국민의당에 의석을 몰아준 호남이, 과연 민주당 내부 경선에서 문재인의 손을 들어줄지 여부가 최대 관심거리였다. 언론은 안희정과 이재명을 호남의 차세대 주자에 빈번하게 대입시켰다. 대선이 임박한 상황에서 경선이 정신없이 치러져서일까. 호남은 그래도 문재인의 손을 들어줬다. 아무래도 그가 대통령이 될 확률이 가장 높아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호남은 전국의 주목을 받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호남의 선택은 항상 승리로 귀결됐는가? 그렇지는 않다.

2007년에도, 2012년에도 호남의 선택은 대통령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다양한 이유는 존재한다. 2012년 호남은 문재인을 압도적으로 밀어줬으나, 승리는 영남, 그 안에서도 대구경북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박근혜가 차지했다. '호남에 선택지가 문재인밖에 없어서 미워하면서도 찍을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호남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안철수가 아예 본선에 등판하지도 못했던 상황이라 더욱 그랬다. 호남 유권자들은 '만약 2012년에 안철수가 나왔더라면?'이라고 가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 민심을 파고든 안철수는 결국 호남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인물(문재인)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으로 호남은 정당성을 획득했다. 그러나 결과만 놓고 봤을 때 호남의 선택이 승리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호남은 두 명의 유력 후보를 밀고 있다. 링이 다르고 경선 참여인이 다르기 때문에 국민의당 호남 경선의 안철수 승리, 그리고 민주당 호남 경선의 문재인 승리를 단순 비교할 수가 없다. 안희정, 이재명이 호남에서의 패배 여파로 경선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섣부르다.

다만 의문은 제기할 수 있다. '호남 승리'의 신화는 만들어진 것일 수 있다. 역사에서 같은 일은 두번 반복되지 않는다. 민주당에 우호적이지 않은 보수 종편이 호남 민심을 상품화해 당의 분열을 부추긴 것도 사실이다. '동교동계'라는 '정치 유물'을 부활시켰고, 당적을 바꾼 정치인들에게 부활의 기회를 줬다. 국민의당이 자유한국당 등과 손을 잡고 개헌안에 합의한 것을 보라. 백년지대계의 개헌을 한두달 안에, 그것도 '청산'의 대상이 돼야 할 정치인들이 몸담은 정당과 합의하는 것을 '호남 민심'으로 포장한 것은 꽤나 놀라운 일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부산에서 '지역주의'의 장벽을 깨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했다.

'호남 지지율'만 경마식 보도부산, 울산, 경남이 '디비진다'고?

오히려 다른 곳을 주목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부산이다. 부산에서 희한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언론의 주목도는 매우 낮다. 경남 역시 마찬가지다. 자유한국당 대선 주자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만약 후보로 선출된다면 경남도지사 보궐선거가 열린다. 자유한국당이나 바른정당이 경남도지사 보궐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다.

한국갤럽이 지난 24일에 발표한 지지율 조사에서 부산·울산·경남의 정당 지지율은 더불어민주당 42%, 자유한국당 13%, 국민의당 8%, 바른정당 5%로 나타났다. 대선 후보 지지율은 문재인 41%, 안희정 13%, 홍준표 11%, 안철수 5%, 이재명 4% 순이었다. 놀라운 결과다. 더불어민주당이 보수 정당 두 개를 합한 지지율보다 더 많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문재인 지지율은 문재인 외에 모든 후보를 합한 지지율보다 더 높다. 여론조사는 추이다. 이 추세는 지난 11월부터 만들어졌다.

같은 기관에서 지난해 10월 14일 발표된 부울경 지역 정당 지지율은 민주당 29%, 새누리당 31%로 새누리당이 앞서있었다. 문재인은 23%, 반기문은 21%를 기록했다. 10월 21일 조사에서는 새누리당이 회복세를 띤다. 새누리당 37%, 민주당 26%였다. 대선 후보 지지율 조사는 없었다. 10월 28일에도 정당 지지율은 새누리당 31% 민주당 27%였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의 묵직한 후폭풍이 본격화되면서 민주당은 새누리당을 앞서기 시작한다. 11월 4일 조사에서 민주당은 34%를 기록하고, 새누리당은 23%를 기록한다.

이때부터 현재까지, 약 4개월 반동안 부울경 지역에서 민주당은 다른 정당의 추격을 허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최근 1달간 부울경 지역 정당 및 후보 지지율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한국갤럽 3월 3일자

민주당 44%, 자유한국당 12%, 바른정당 6%, 국민의당 5%
문재인 35%, 안희정 15%, 황교안 7%, 이재명 6%, 안철수 5%

- 조사기간: 2017년 2월 28일, 3월 2일
- 표본추출: 휴대전화 RDD 표본 프레임에서 무작위 추출
- 응답방식: 전화조사원 인터뷰
- 조사대상: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1,010명
- 표본오차: ±3.1%포인트(95% 신뢰수준)
- 응답률: 20%(총 통화 5,124명 중 1,010명 응답 완료)
- 의뢰처: 한국갤럽 자체 조사

한국갤럽 3월 10일자

민주당 40%, 자유한국당 15%, 국민의당 9%, 바른정당 5%
문재인 33%, 황교안 13%, 안희정 11%, 안철수 9%, 이재명 6%

- 조사기간: 2017년 3월 7~9일
- 표본추출: 휴대전화 RDD 표본 프레임에서 무작위 추출
- 응답방식: 전화조사원 인터뷰
- 조사대상: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1,005명
- 표본오차: ±3.1%포인트(95% 신뢰수준)
- 응답률: 20%(총 통화 5,055명 중 1,005명 응답 완료)
- 의뢰처: 한국갤럽 자체 조사

한국갤럽 3월 17일자

더민주 38%, 자유한국당 20%, 국민의당 9%, 정의당 5%
문재인 33%, 안희정 13%, 안철수 9%, 황교안 9%, 이재명 5%

- 조사기간: 2017년 3월 14~16일
- 표본추출: 휴대전화 RDD 표본 프레임에서 무작위 추출
- 응답방식: 전화조사원 인터뷰
- 조사대상: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1,004명
- 표본오차: ±3.1%포인트(95% 신뢰수준)
- 응답률: 22%(총 통화 4,551명 중 1,004명 응답 완료)
- 의뢰처: 한국갤럽 자체 조사

한국갤럽 3월 24일자

민주당 42%, 자유한국당 13%, 국민의당 8%, 바른정당 5%
문재인 41%, 안희정 13%, 홍준표 11%, 안철수 5%, 이재명 4%

- 조사기간: 2017년 3월 21~23일
- 표본추출: 휴대전화 RDD 표본 프레임에서 무작위 추출
- 응답방식: 전화조사원 인터뷰
- 조사대상: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1,007명
- 표본오차: ±3.1%포인트(95% 신뢰수준)
- 응답률: 19%(총 통화 5,254명 중 1,007명 응답 완료)
- 의뢰처: 한국갤럽 자체 조사

자세한 사안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영남의 한 축인 부산, 울산, 경남 지역에서 야당이, 야당의 후보가 이 정도 지지율을 나타낸 것은 근 수십년간 없었던 일이다. 지역별 지지율은 샘플이 적어 단순 수치를 그대로 믿을 수 없으나, 추세로 읽는데는 도움이 된다.

이런 조짐은 지난해 4월 총선에서도 감지됐었다. 부산 지역에서 더불어민주당 간판을 달고 국회의원에 당선된 숫자는 18석 중 5석. 이른바 '부산 갈매기 5형제'(김영춘·김해영·박재호·전재수·최인호 의원) 외에도 낙동강 벨트로 분류되는 경남 일부 지역에서 김경수, 서형수, 민홍철(재선) 의원이 당선됐다. 문재인이 단일화 협상에 직접 나서면서 노회찬 당선에 기여를 했던 사례도 있다. 그리고 울산에서는 야권 성향으로 두 명의 무소속 의원이 나왔다.

부울경의 정치 성향이 조금씩 왼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것이 노무현이 남긴 공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문재인은 노무현과 그 후예들이 끈질기게 도전해온 '지역주의 타파'의 열매를 따게 될 지도 모른다. 물론 문재인도 기여한 바가 있다.

이런 변화가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호남에 쏟아지고 있는 스포트라이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영남 지역의 이같은 변화는 분명 주목할만 하다. 문재인과 같은 부산 출신인데도 안철수의 지지율이 낮은 것은 그의 영남권 '확장성'을 의심받게 할 수 있다.
'호남의 선택'이라는 신화는 사실 민주계 정치인들과 '홀대론'에 경도된 호남 유권자들, 그리고 2002년 노풍의 달콤한 추억이 만들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신화'를 깬다는 것은 항상 아픈 일이다. 그래도 '신화'에서 벗어나 볼 필요는 있다. 반론도 제기될 수 있다. 다만 기자의 '출신 지역'을 공격하는 방식의 반론은 사양한다.

분명한 것은 이번 대선에서 진짜 주목할 만한 곳은 사실 영남 지역일지 모른다는 점이다. 특히 부산, 울산, 경남 지역일지도 모른다. 박정희가 만든 '영남 불패 신화'가 그의 딸 박근혜의 몰락을 넘어서 이번 대선에서 깨진다면, 그것이 '호남 승리 신화'에 비해 덜 주목받을 이유는 없다. 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가 호남에 쏠려 있을때, 영남에서는 조용한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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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열

정치부 정당 출입, 청와대 출입, 기획취재팀, 협동조합팀 등을 거쳤습니다. 현재 '젊은 프레시안'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쿠바와 남미에 관심이 많고 <너는 쿠바에 갔다>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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