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서 나오니 여긴 큰 감옥"

[작은책] <공동정범>·<마이 스윗 홈>·<두 개의 문>

20대 시절, 사무실에 출근하면 밤사이 온 팩스를 철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광고지나 동문회보 같은 것들은 버리고 <인권하루소식>('인권운동사랑방'이 1993년~2006년까지 발행하던 소식지)은 늘 소중히 챙겼습니다. '그날그날 열심히 읽어야지' 다짐하지만 그렇게 읽을거리는 서류철 안에 수북이 쌓였고, 어느 날 문득 펼쳐 보면 팩스로 받은 <인권하루소식>은 감열지 위에서 희미해져 읽을 수 없었습니다. 날아가 버린 글자를 바라보며, 내 무관심 때문에 인권이 그렇게 흔적 없이 날아가 버린 것 같아서 미안한 적이 많았습니다. 지난해 12월 <인권하루소식>의 후신인 <인권오름>의 종간 소식을 듣고 그 옛날 읽을 수 없었던 <인권하루소식>이 생각났고, 지금 나의 외면으로 희미해져 가는 인권은 없는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고민하며 고른 2017년의 첫 영화는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의 김일란·이혁상 감독이 만든 <공동정범>(2016)입니다.

2009년 1월 20일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있는 남일당 건물 옥상에서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 한 명이 불에 타죽는 '용산참사'가 일어납니다. 평범한 이웃의 삶이 송두리째 망가져 가는 것을 그저 무기력하게 바라만 봐야 했던 경험은 모두의 가슴에 깊은 상흔을 남겼습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용산에 모여 '촛불방송국'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독립 다큐멘터리도 많이 나왔습니다.

망루에 올랐다가 감옥에 가게 된 세 사람이 투옥 전에 주변을 정리하는 모습을 담은 김청승 감독의 <마이 스윗 홈-국가는 폭력이다>(2010)를 보고 나서 저는 며칠 동안 잠을 못 잤습니다. 주인공 중 한 사람인 경기도 성남시 단대동 철거민 김창수 씨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아이 생각에 학교 가까운 곳에 전셋집을 얻는데, 그 지역이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어 전세금을 받지 못한 채 쫓겨날 상황에 처합니다. 영화를 보던 그때 저도 초등학생 큰애를 위해 학교 가까운 곳에 집을 얻었고, 제가 살고 있던 봉천동에도 재개발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하루아침에 빈손이 되어 버리는 세상, 나에게도 김창수 씨 같은 일이 닥칠 수 있고 나 또한 외줄을 타듯 위태로운 세상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마이 스윗 홈>의 끝부분에는 김창수 씨를 포함한 연대자들의 법정 최후 진술이 소리로만 들립니다.

▲ 다큐멘터리 <공동정범> 스틸컷. 용산참사 책임자인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은 현재 새누리당 소속으로 경북 경주시를 지역구로 둔 20대 국회의원이다. ⓒ연분홍치마

그리고 2016년 가을 <공동정범>이 나왔습니다. 저는 김창수 씨의 안부가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김창수 씨는 감옥에 간다는 사실을 숨긴 채 어디 먼 데 다녀오겠다며, 떠나기 전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동물원에 갑니다. 철거투쟁으로 바쁜 아빠 때문에 둘째는 태어나서 한 번도 동물원에 가 보지 못했거든요. 상도동에서 철거투쟁을 하던 천주석 씨는 고향의 선산을 방문해 성묘를 하고 친척들에게는 몇 년간 외국에 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주변 정리를 하고 투옥된 두 사람과 지석준·김주환·이충열 씨가 <공동정범>의 주인공들입니다. 주인공들은 함께 망루에 올랐고 함께 고초를 겪었지만, 다시 만난 서로를 반가워하지만은 않습니다.

용산참사 이후 355일간의 투쟁 끝에 장례는 치렀지만, 책임자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참사의 실질적 책임자인 당시 서울경찰청장 김석기는 낙하산 인사로 한국공항공사 사장이 되었다가 다시 국회의원이 됩니다. 국가는 오직 철거민들에게만 죄를 물었고 주인공들은 그렇게 죄인이 되어 공동정범으로 3년씩, 5년씩 감옥살이를 합니다. 돌아와서 겪은 시간을 천주석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용역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지. 철거된 동네를 돌아보면 미칠 것 같애. 출소해서 보니까 그리움이라는 거는 그냥 다시 전쟁터가 되어 버리더라구. 거긴 작은 감옥, 나오니까 여긴 큰 감옥."

악화된 것은 경제적 상황뿐만이 아닙니다. 뜨거운 열기를 피해 망루에서 뛰어내린 지석준 씨는 다발성 골절로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지금도 치료 중입니다. 김주환 씨는 벌레가 계속 귀로 들어가는 것 같은 환각과 환청 때문에 고막이 손상될 만큼 귀를 파거나 액이 줄줄 흐를 만큼 살충제를 머리와 귀에 뿌려 댑니다. 그리고 참사로 아버지를 잃은 이충열 용산 철거민대책위원회 위원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동료를 잃은 이들에게 국가는 그 죽음의 책임자라는 표딱지를 붙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깊어만 갑니다. '내가 왜 이런 사고를 겪어야 했지?'라는 물음 속에서 마음은 수천수만 번, 그때 그 시간으로 돌아갔겠죠. 그리고 외부로부터 승인되지 못한 고통, 외부로 표출되지 못하는 아픔은 매운 칼날이 되어 그날 그 장소에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로 날아갑니다. 그 울분과 그 아픔과 그 억울함은 자꾸 이런 물음을 하게 만듭니다.

'나쁜 놈들은 잘만 자는데, 슬픔과 고통은 왜 이들만의 몫이어야 하는가?'

저는 이 영화를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처음 봤는데, 관객과의 대화를 위해 주인공들이 함께하셨더라고요. 다행히 주인공들의 관계는 앞으로 더 나아질 것 같았습니다. 그런 희망은 영화 안에서도 조금 보입니다. 첫 번째 모임에서는 날 선 말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던 주인공들이 두 번째 모임에서는 참사 당시의 기억을 맞추고 각자의 오해를 풀기 위해 노력합니다. 가슴 속에 묻어 둔 말들을 꺼내고 맞춰 보면서 서운함, 분노, 아픔, 회한을 나누며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거든요.

▲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 스틸컷. 화재가 일어나기 전, 한 철거민이 점거 중인 남일당 건물에서 바깥 상황을 살피고 있다. ⓒ연분홍치마

세상이 거대한 어둠에 휩싸인 것 같고, 그 어둠을 부리는 권력자들의 힘은 너무 강력해서 진실·정의·양심과 같은 단어가 더 이상 쓸모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연분홍치마'의 감독들은 영화로 답을 줍니다. <두 개의 문>(김일란·홍지유 감독, 2011)은 용산참사의 25시간을 정교하게 재현함으로써 관객을 목격자 위치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공동정범>은 관객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용산참사 현장은 2016년 9월 착공을 앞두고 있으며, 대규모 주상복합단지로 조성될 예정이다. 이제 참사의 흔적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당신마저 기억하지 않는다면."

마지막 자막이 제 마음을 쿵 하고 울렸습니다. 감열지에서 사라져버린 <인권하루소식>을 발견했을 때처럼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저를 일깨워 준 '연분홍치마'에게 고마웠습니다. 세월호가, 용산이, 밀양이, 기륭전자가, 콜트콜텍이, 한진중공업이 그렇게 바로잡힐 것입니다. 잊지 않기 위해서, 바로잡기 위해서, 기억이라는 감열지 위에 새겨진 저 물음이 사라지기 전에 <공동정범>이 좀 더 멀리까지 퍼져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공동체 상영 문의 : 영화제작사 연분홍치마 02-337-6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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