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한다'는 것은 '선' 하나 넘는 일

[민들레] 대한민국 촛불, 시민으로 살다

"이제 이렇게 생각해보자. 저항과 실천의 문제를, '선 하나를 넘는 것'이라고."

우리는 왜 선을 넘지 못하는가?


언젠가부터 일요일 아침에 눈을 뜨면 환상열차에서 내린 듯한 기분이 든다. 100만 명씩 모이는 엄청난 규모의 집회를 매주 하고 있는 탓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월요일이 되면 지난 주말 잠시 혁명 광장으로 여행을 다녀왔던 것 같고, 먼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처럼 엊그제 일이 옛날 일처럼 아련해져 있다. 이유가 뭘까? 광장의 온도와 일상의 온도가 너무 달라서일까.

일상의 삶 속에서 100만 촛불의 흔적은 너무 희미하다. 우리는 주말마다 낡은 것을 바꾸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자고 외치는데, 일상으로 돌아오면 바뀌는 것도 없고, 두려워해야 할 이들도 두려움이 없다. 집주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집세를 올리고, 남자들은 여전히 지나가는 여자들을 희롱하고, 제철공장에서는 젊은 노동자가 질식해 죽고, 건설현장에선 늙은 인부가 떨어져 죽고, 택배기사들은 주 70시간씩 일하고, 농민들의 빚은 늘어만 가고, 내가 일하는 학교에서는 여전히 강사들이 다음 학기 강의배정을 받지 못할까 걱정하고, 계약 만료를 앞둔 청소노동자들은 고용불안에 떨고, 단골 많은 오래된 전통찻집이 임대료를 감당 못 해 문을 닫는다. 전날 뜨거웠던 광장이 그리 멀지 않은데도 이곳은 마치 다른 나라인 것처럼 조용하다. 광장은 광장에만 있고 텔레비전 속에만 있다. 대통령이 바뀌어야 우리의 삶도 바뀔 수 있는 걸까? 아니면 대통령만 바뀌고 다른 것은 그대로인 것은 아닐까?

이 답답함은 광장에서부터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범람하며 넘실거리는 강물을 보는 듯 장엄한 시위대가 그렇게 밀물처럼 커다란 함성을 남겨놓고 해산 명령과 함께 막차를 타고 질서 있게 집에 돌아가는 모습에서 뭔가 불일치와 부조리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시위 현장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장소처럼 너무 쉽게 복구되고 잠시 흐트러졌던 도시의 규칙들은 재빨리 질서를 되찾는다.

그래서 나는 고민한다. 우리는 왜 이 선을 넘지 못하는 걸까? '이 선을 넘지 마시오', 차벽과 폴리스라인에 쓰인 말이다. 1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몇 주째 선 하나를 넘지 못하고 '민중총궐기'를 하고 있다. 이미 2011년에 헌법재판소가 차벽이 위헌이라고 판결했음에도 오늘도 여전히 이 '불법의 차벽'은 거리의 법이 되어 우리에게 이를 지키라고 명령한다. 이 불법적인 선은 100만 명이 점령한 해방의 거리에서도 평화와 질서와 안전이란 이름으로 자유의 행진을 봉쇄하고 있다. 무법 경찰과 준법 시민들이 함께 지키고 있는 이 선 앞에서 나는 생각한다. '폴리스라인'이 무슨 절대명령이라고, 도대체 왜 이 선 하나를 넘지 못하는 것인가.

하지만 이런 말을 꺼내면 곧장 "그래도 폭력은 안 돼"라는 말이 돌아오곤 한다. '폭력 대 비폭력'이라는 틀에 갇히면 빠져나오기도 어렵다. 그래서 계속 고민했다. 그 도식을 벗어나 좀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볼 수는 없을까. 사실 폭력과 비폭력의 대립구도는 완전히 허구적인 것이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종의 시위방법론으로 폭력과 비폭력을 전략적으로 선택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관념상의 착각일 뿐이다. 그것은 양자택일할 수 있거나 양립할 수 없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현장의 상황은 비폭력에서 폭력으로, 폭력에서 비폭력으로 언제든지 변할 수 있으며, 따라서 폭력이든 비폭력이든 모두 상황에 따라 시민행동의 양식이 될 수 있다. 폭력과 비폭력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발생하는 힘들의 양상이다. 폭력 또는 비폭력적 상태는 상대적인 힘들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힘의 결집과 대립과 해소의 과정으로 봐야지, 하나에 대해 절대적 금지를 선언하면 저항하는 힘들은 급격히 무력화되고 만다. 하지만 '힘'을 사유하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정지상태를 선호하는 이성의 사유는 변화와 운동 앞에서는 늘 미숙하니까. 그래서 시민으로서의 저항 행동과 실천의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힘'의 문제가 아닌 '선'의 문제로. 그러니까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저항한다'는 것은 '선' 하나를 넘는 일이라고.

ⓒ프레시안(최형락)

지난주 처음으로 광장을 벗어나, 내가 살고 있는 시골의 한 들판에서 조용한 촛불집회를 했다. 그때 같이 있던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샘, 저는 처음에는 집회에 나가도 인도로 걸었는데요. 어느 날 차도에 딱 서니까 기분이 완전 다른 거예요. 선 하나 넘었을 뿐인데 완전 다른 세계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계속 차도로 걸어요."

'아, 그랬구나!' 그때 나는 퍼뜩 깨달았다. 선 하나를 넘는 것일 뿐이지만, 그것이 아주 중요한 실천론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선을 넘는다는 건 실천할 수 있는 몸으로 자기를 해방시키는 것임을….

나는 우리가 선을 넘지 못하는 것을 비겁하다거나 용기가 없어서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선을 넘지 못하는 것이 그 때문이라면 그 선을 넘는 데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 정도의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인지를 고민하고 찾아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폭력을 피하고 비폭력을 '선택'한 것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차벽과 폴리스라인을 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정직하게 물어보자. 선을 넘지 않는 진짜 이유가 정말로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전략적으로' 평화시위를 선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마치 따먹지 못한 포도가 시어서 먹지 않았다는 여우의 변명 같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물어봐야 한다. 우리는 왜 선을 넘지 못하는가? 그 이유를 알아야 넘는 방법도 찾을 수 있을 테니….

일상 속 '선'의 명령

"넘어오지 마!"

아이들에게 명령한다. 말 한마디로 아이를 얼어붙게 만드는 이 명령의 힘은 '권위'에서 나온다. 그 권위는 힘의 절대적 불균형 위에서 세워진 것이다. 어른과 아이 사이. 이 선을 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금지와 해제의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과 그 명령을 따라야 하는 사람. 그 절대적 불평등이 선의 권위를 만든다. 만약 그 선의 명령이 평등한 관계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쉽게 허물어진다. "선을 넘지 마"라고 말하는 사람이 친구라면, 아이들은 웃으면서 쉽게 그 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런데 명령자가 권위 있는 부모나 교사라면, 아무것도 아닌 선 하나 앞에서도 아이들은 꼼짝하지 못한다. 지금 우리의 모습도 딱 그런 것은 아닌가. 그 명령 앞에서 넘어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갑론을박하고 있는 우리들 앞에 놓인 선도 바로 그런 선 하나인지 모른다.

도시는 이러한 '선'의 명령으로 가득 차 있다. 정지선, 횡단보도선, 주차구획선, 우측보행 안내선, 금연구역 경계선. 이런 선은 대체 무슨 권위가 있는가. 이런 선들이 강제력을 갖는 이유는 '공적 권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제복 입은 경찰이 인격화한 권력을 나타낸다면, 각종 공간 속에 구현된 금지선들은 도식화된 형태로 권력을 가시화하고 있다. 그래서 선이 바로 '공권력'이다. 이런 선이 일제시대 경찰이나 계엄령 하의 군인들처럼 무섭지는 않지만, 우리를 불편하고 귀찮게 하면서 복종하도록 만든다. 이 공권력은 CCTV를 갖고 있고, 벌금을 부과할 수 있고, 체포 구금을 할 수 있으며, 출두명령서를 발부한다. 대도시의 삶은 편리와 효율성과 안전을 위해 선들에 권리를 위임한 삶이다. 그래서 이 선들은 끊임없이 삶의 영역과 행동의 반경을 제한하는 투명한 작은 감옥들이기도 하다.

'선을 넘지 마세요'는 그런 공간적 분할 선의 명령어로 나타나는 것만도 아니다. 관계에서도, 위계에서도, 선은 작동한다. 친구 사이, 이웃과 이웃 사이에도 '선'이 있다.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다. 직장 상사나 학교 선생님이 하고 싶은 말 다 해보라 해서 정말로 다 했다가 고초를 배로 더 겪고 나면 알게 된다. 눈에 보이는 선들보다 더 복잡하고 미묘한 선들이 있다는 것을. 더 들어가면 안 되는 '선'. 그 선을 넘어서면 관계가 깨어지기도 하고 갈등을 빚기도 한다. 하지만 그 선을 넘어야 평등한 관계와 자기의 존엄을 지킬 수 있을 때도 있다.

선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고정될수록 선은 질서가 되고, 법규가 되고, 행동의 준칙이 된다. 이제 내면화된 '선'은 '법'이 된다. '선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의식이 이 선에 대한 '왜?'라는 의문을 소거하기 시작한다. 여기 선이 있으니까 넘을 수 없는 것처럼, '법이 그렇다'라는 말 한마디는 그 자체로 넘을 수 없는 벽이 된다. 하지만 넘을 수 없는 선이 모두에게 평등한 '넘사벽(넘을 수 없는 벽)'인 것도 아니다. 선은 오직 약자에게만 '넘사벽'이다. 아이는 어기면 혼나는 모든 규칙들이 어른들은 자유자재로 '융통성 있게' 어겨도 되는 것처럼, 경찰은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해 마음대로 어기는 선이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도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것이 그들이 그어놓은 선이다. 이미 불법과 편법으로 법과 규칙을 마음대로 어기고 넘나들면서도 뻔뻔하게 규제철폐를 외치는 재벌들에게서 보듯이, 노동자들에겐 절대적 강제력을 갖는 규칙·규정들도 사측은 얼마든지 '융통성 있게' 지키고 어기며 '조절'할 수 있는 선이다. 그러니 선은 그냥 선이 아니다. 선은 권력관계 를, 즉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철저히 내면화한다. 선을 어기고 넘는다는 것은 그 관계를 전복하는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어떻게 '선'을 넘을 수 있을까?


'선'을 넘어서는 것은 반드시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방식으로 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종은 머릿속에만 새겨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머리는 선을 인식할 수 있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결정적으로 선을 넘지 못하는 이유는 머릿속의 선 때문이 아니다. 그 선이 내 몸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의식이 날마다 불의한 선을 지워내도 내 몸이 그 선을 지킨다. 선 앞에 가면 자동적으로 몸이 멈춰 선다. 그래서 '자발적 복종'은 무엇보다도 '신체의 자발적 복종'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을 넘는 연습은 반드시 '신체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나온 우리는 왜 항상 차벽 앞에서는 가만히 돌아가는가? 나는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어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한 것이 '질서'가 아닐까 한다. '질서 있게, 질서 있게', 늘 선이 귓가에 속삭여준 그 말. 그 속에서 우리는 무질서와 혼돈 상태에 대한 불안을 키웠다. 대상을 알고 그 타자를 두려워하는 것이 '공포'라면, 대상을 알 수 없어 자기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것이 '불안'이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통치는 공포보다 불안에 기반한다. 공포는 대상을 제거함으로써 해소되지만, 불안은 그 대상이 없기 때문에 해소되지 않고 회피된다. 불안은 질서가 작동하는 동안은 억압되지만 질서가 무너지면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광장의 시민들 역시도 그 무질서에 대한 불안이 폭력에 대한 공포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 룰이 깨진다는 것은, 도시민에게는 가장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공공장소는 매우 중요한 공권력의 훈육 장소다. 수많은 선들의 지도하에 도시민은 지켜야 할 공중도덕을 익힌다. 하지만 그것은 공공생활을 위한 기초 에티켓이지 '시민윤리'가 아니다. 공중도덕을 잘 지키는 사람이 좋은 시민이라고 할 수 있는가? 도시거주자인 도시민으로서의 시민과 정치적 주체로서의 시민은 엄연히 다른 존재다. 공공장소 곳곳에서 나타나는 '시민의식'에 대한 호소는 대부분 도시민을 위한 생활수칙인데, 우리는 그것을 정치적 주체로서의 시민의 규범과 종종 혼동한다. 생활 질서의 규칙을 곧 시민적 삶의 준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전자와 후자는 어떻게 다른가? 전자는 도시의 시스템을 위한 것이고, 후자는 도시의 정치를 위한 것이다. 전자에서 시민은 대상이 되지만 후자에서 시민은 주체가 된다. 그런데 선의 공식은 이것을 전도한다.

이 '선'의 명령과 복종은 도시일수록 더 강력하게 작동한다. 내가 사는 산촌의 작은 마을에선 주차구획선이 사실상 의미가 없다. 공간이 넓고 자동차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길가에 나란히 차 뒤에 차 뒤에 차를 세우는 공동체의 공통감각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군청에서 주차구획선을 긋고 나면 갑자기 선도 못 지키는 사람들이 되어버린다. 부재한 시민의식은 계몽의 대상이 된다. 시골의 삶은 자연과 더불어 살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무질서와 공존하는 삶으로 이어진다. 우연과 돌발성이 반복되는 자연 상태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적응력을 키워준다. 그와 반대로 도시는 체계가 흐트러지고 일상이 마비되면 끔찍한 상황에 놓인다. 단전과 단수가 일주일만 지속되면 도시는 곧바로 지옥이 될 것이다. 그래서 도시의 모든 관리 규범은 최대한 빨리 '정상 상태로 복구'하는 것이다. 집회와 시위도 이러한 규범적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일상을 중지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것이 정치집회요, 저항시위의 본질인데, 그것을 위해서조차 일상을 양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주체로서의 시민은 법을 지키는 사람이기 이전에 법을 수립하는 자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이 법을 지켜야 할 의무를 갖는 것은 스스로가 입법자인 한에서다. 시민은 법을 지키는 자 이전에 법을 세우는 자이고, 시민이 입법자라는 것은 그가 법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법을 세울 수 있는 자라는 뜻이며, 그것이 '주권자'라는 단어의 의미이다. 그러나 우리는 100만, 200만 명이라는 엄청난 힘의 우위와 정당성을 갖고서도 아직도 그 '선'을 넘지 못했다. 차벽이 불법인 줄 알면서도 그 불법을 깨트려서 새로운 법을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폴리스 라인의 사용수칙을 우리는 다시 명령해야 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자꾸 묻는다. 선을 넘지 않고도 얼마든지 평화롭게 집회를 하고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는데, 왜 자꾸 무모하게 선을 넘자고 하는 건가요? 선을 넘는다고 해서 당장 청와대로 쳐들어가 대통령을 끌어낼 수도 없는데, 그건 그냥 무의미한 행동이 아닐까요? 과연 그럴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게 단지 무모한 행위라면 단지 '선' 하나를 넘는 일일 뿐인 것을 왜 그토록 두려워하는가. 실은 그 '선' 하나에 지배자의 명령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차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그 명령에 대해 불복종의 의지를 천명하는 것이고, 자발적 복종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차벽을 해체시키는 것은 권력을 해체시키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의지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그냥 실현하는 것이다. '선'을 넘어가는 것은 법을 어기는 경찰 기구에 대해 국민이 헌법의 명령을 집행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주권자로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선'을 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 행위다. 해방의 경험을 신체에 새기는 것, 그것이 바로 '선을 넘는다'는 것의 실천적 함의다. 그래서 나는 반드시 우리 자신이 그것을 몸으로 넘어섬으로써 차벽을 해체하고 무력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해방의 순간이 '선' 하나를 넘는 것에서 왔는지.

그 옛날에 한 대학생이 맨몸으로 판문점 휴전선을 넘었던 것처럼, 그래서 고작 10센티미터(㎝) 높이의 그 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그 선이 만들어낸 비극과 고통에 대해 묻고, 그리하여 절대시되었던 '금지의 선'으로부터 이 땅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온 세계 사람들의 상상력을 해방시켰던 것처럼, 베를린 장벽이 문서에 의해 효력이 해제되거나 공권력에 의해 철거된 것이 아니라, 동쪽과 서쪽의 시민들에 의해 부서지고 무너뜨려 졌던 것처럼, 그 차벽도 그렇게 무너져야 한다고. 100만 명이 모이고 200만 명이 모이는 것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가두고 있는 이 '선' 하나를 넘는 것이 더 중요한 실천이고, 100만 명이 모여 대통령을 끌어내려도 끝내 이 '선' 하나를 넘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가 넘지 못하고 멈춘 여기서 민주주의의 진전도 멈추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차벽을 넘는 것이 중요하다. 차벽을 넘는 것, 그것은 자유를 향한 직접 행동이다.

'선'을 넘는 구체적 방법, 시민 몸치 탈출하기

이제 선을 넘는 구체적 실천론을 고민해보자. 우선 일상의 금지선들을 수시로 넘는 것. 이것을 나는 사소한 범법행위의 습관화라고 말하는데, 인류학자이자 정치학자인 제임스 스콧은 <우리는 모두 아나키스트다>(김훈 옮김, 여름언덕 펴냄)에서 그것을 '아나키스트식 유연체조'라고 부른다.

"합당하지 않은 사소한 법들을 매일 어기도록 하세요. 어떤 법이 정의롭고 합리적인 것인지 아닌지 자신의 머리로 직접 판단해보세요. 그렇게 하다 보면 여러분은 날렵하고 민첩한 정신자세를 유지하게 될 겁니다."

스콧은 우리에게 그런 자세와 행동지침을 제안한다. 나는 여기에 적극 동의한다. 그래서 나의 연습은 붙이면 안 되는 곳에 붙이고, 들어가선 안 될 곳에 들어가고, 넘어선 안 될 선을 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이 왜 안 되는 것인가를 모두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요즘 나는 매주 수요일마다 학교 잔디밭에서 학생들과 둘러앉아 강의실 밖 강의를 하고 있다. 수강신청 시스템으로는 신청할 수 없는 강의다. 지난해 부당해고 후에 1인 시위를 시작했고, 그러다가 학교가 선생님께 강의를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선생님께 강의를 요청하겠다는 제안으로 열린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계속 금지선을 넘어야 하는 강의는 허락되지 않았던 선을 넘고 또 넘으며 새로운 대학의 영토들을 탈환하고 우리의 것으로 되찾는 과정이 되고 있다.

처음에는 '1인 시위도 어디에 신고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던 학생들이 어느새 확성기를 들고 "이것은 수업 방해가 아니라 대학을 대학답게 만드는 진짜 교육"이라고 당당하게 외친다. 조건과 상황이 되면 순식간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 발언을 하고 그게 시위가 되고 집회가 되기도 한다. 학교 안 작은 광장에는 우리 말고도 다른 행사들이 종종 겹치기도 하지만, 서로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자율적으로 공간을 나누고 각자의 활동을 진행한다. '유럽 귀족풍의 스탠포드식 잔디밭'에 난입하여, 사람보다 귀한 대접을 받는 잔디를 '데모스(민중)의 궁둥이'로 뭉개고 앉은 이들은 우리가 처음이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두 사람 씩 앉아버리고 나니,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경계선 앞에 멈칫했던 발걸음들이 지금은 주저 없이 척척 잔디밭으로 들어온다. 처음 한 번만 두려웠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게 얼마든지 해도 되는 일이라는 건 해보임으로써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선'을 넘을 수 있는 용기는 머리가 아니라 몸에서 나왔다. 그러니 일상 속에서 몸과 마음의 근육을 수시로 키워놓아야 한다.

하지만 혼자서는 두렵다. 그래서 함께 '선'을 넘는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 혼자선 못 넘어도 둘이라면 넘는다. 더 많은 사람이면 범법이 당당해진다. '선'을 넘는 사람들이 더 더 많아진다면, 나중에는 그게 '길'이 되고 '법'이 된다. 그러니 함께하자. 친구와 함께, 단체와 함께, 노동조합과 정당과 함께. 민폐 금지의 규칙이 시민도덕이 되고, 공사다망하게 동네 일, 남의 일에 간섭하고 개입하던 '오지라퍼(참견쟁이)'들이 주책바가지로 몰려 다 사라져버렸지만 예전에는 동네 오지라퍼들이 정의와 진리의 수호자들이었다. 이 마을의 배심원들을 다시 부활시키자. 우리 모두 오지라퍼가 되어야 한다. '평론가'가 아니라 '개입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 비극에서는 주인공이 선택의 기로에 서거나 중대한 결단의 대목에서 노래를 하면 데모스로 구성된 합창단이 코러스로 응답한다. 우리도 누군가 앞장서는 사람이 있을 때 코러스처럼 '에코'를 해주자. 선창은 힘들어도 코러스는 힘들지 않다. 누군가 용기를 내어 '선'을 넘는 사람이 있거든 우리도 열심히, 코러스 역할을 해 주자.

ⓒ프레시안(최형락)

당신이 광장을 떠날 때

200만 촛불의 시위도 언젠가는 끝이 나고 각자가 어느 선에서 목표에 도달하고 나면, 그다음에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광장에 남는 이들이 있다. 그때 광장의 풍경을 상상해보라. 무엇이 남아 있을지. 여전히 물러설 곳도 돌아갈 곳도 없이 싸우는 사람들과 그들을 막아선 차벽을. 그러나 그때 그 차벽은 지금까지의 차벽과는 완전히 다른 힘과 권위를 갖고 그 자리에 서 있게 될 것이다. '100만이 허락한 차벽'으로. 그러고 나면 '평화시위'는 절대적 명령이 될 것이고, 평화 유지란 이름으로 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더욱 잔인한 폭력이 행사될 것이다. 그때 '성숙한 100만 명의 시민들‘은 싸우는 사람들의 '미성숙한' 시민의식을 증명하는 존재로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그러니 100만 명이 떠난 자리에 남을 사람들을 외롭게 남겨두지 말자. 고립시키지 말자. 설사 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부단히 넘으려는 시도를 통해서 누군가가 차벽을 마침내 철폐해낼 그 날까지 우리는 그 선을 시민의 자유를 침범한 '선'으로 규정하고, 그 '불의한 장벽'을, 침을 뱉고 욕을 하는 장소로 남겨두어야 한다. 그게 모두의 해방을 위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엄호하는 시민적 연대의 자세다.

그리고 해방의 광장에선 해방의 몸짓을 제한하지 말기를. 그 해방된 몸이 모두에게 어떤 해방을 가져올지 아무도 모르지 않는가. 혁명에는 경로가 없다. 정치공학자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길로 설정해놓은 내비게이터(션)의 경로 설정은 모두 취소해버리자. 정말로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가보고 싶은 것이라면. 주권자는 주어진 경로를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라 길을 만드는 사람이어야 한다. 함께 걸어가면 길이 된다는 것을, 지금 이 거리에서 확인해보자. 차벽이든 폴리스라인이든, '선'의 지도는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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