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아람 작가와 유족 최윤아 씨, 만나다

[세월호 1000일①] 20140416, 그리고 1000일

지난 2017년 1월 9일은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1000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간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세월호 유족들과, 그들에 동조한 '세력'을 짓뭉개는데 혈안이 됐던 정부는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스스로 정통성을 반납하고 발가벗겨진 채, 법정 앞에 섰다.

그간 세월호 참사에 대한 동화감은 시민들의 마음속에 침잠해 있었다. 때로는 '이제 그만하자'는 선동적 구호들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주눅 들어 있었다. 그러나 사라지지는 않았다. 처참할 정도로 망가진 정부, 그 정부는 2014년 4월 16일에 목격한 그 정부였다. 시민들은 마음속에 있던 세월호 참사를 다시 꺼냈다. 해갈되지 못했던 '그 무엇'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듯했다. 그리고 1000일이나 지났음에도 안간힘을 쓰며 '반동적' 태도를 고수해오던 부덕한 정권에 분노했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는 하마터면 잊을뻔한 세월호 참사를, 박근혜 정권 참사의 상징적 사건 반열에 올려놓았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요'라는 대통령과 달리, 시민들은 그날의 일상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촛불 민심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어쩌면 이 민심은 2014년 4월 16일부터 시작됐던 것일 수 있다. 이를테면 대통령의 7시간 안에는, 70년간 쌓여 왔던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점이 집약돼 있었던 것이었다. 박근혜 정권 3년, 그리고 그 이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세월호 참사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 치유는 대화와 소통을 통해서 가능하다. 프레시안은 세월호 참사 1000일을 앞두고 <소수의견> 등 사회에 울림이 되는 글을 써 왔던 소설가 손아람 작가와, 세월호 참사로 동생을 잃은 최윤아 씨의 대화를 주선했다. 공감과 소통, 그리고 치유는 다른 말이 아니다. 이들의 대화를 통해 우리가 어디쯤 서 있는지 가늠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 최윤아 씨(왼쪽)와 손아람 작가(오른쪽). ⓒ프레시안(최형락)

20140416, 그리고 1000일


프레시안 :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1000일이 됐다. 각자에게 어떤 1000일이었나.

손아람 :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바다에 가라앉는 것을 본 이후 동생 생각을 먼저 했다. 동생도 그즈음 제주도에 갈 계획이었다. 만약 동생이 그날 세월호를 탔다면? 30년을 함께한 동생이 그와 같은 일을 당했다면? 동생과도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느낌이 좀 아득했다.

윤아 씨에게는 이런 생각과 느낌이 일상이었던 1000일이었을 것 같다. 가장 가까운 가족을 보내야 하는 동시에 보낼 수 없었던 1000일이기도 했을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고통을 덜어낼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니까. 주변에 형제자매를 잃은 친구는 의식적으로 빨리 잊으려 하더라. 윤아 씨에게는 1000일이 이런 걸 극복해온 과정이었을 수도.

최윤아 : 1000일은 굉장히 긴 시간이다. 그런데 많은 일이 있었으면서도 아무 일도 없었던 기간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나라가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이 나라가 피해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기자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야만적인지, 사람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 상대방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등을 알게 됐다. 또 서명을 받으러 다니거나 1인 시위 및 도보행진도 하고, 노래하고, 그림 그리고, 이런 인터뷰도 하고 정말 많은 것을 했다. 하지만, 얻은 것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극복'이라기보다는 '그냥 받아들였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다. '극복'은 사건을 딛고 일어서야 하는 것인데, 아직 딛고 일어서지 못한 것 같다. '이겨 내겠다'가 아니라 '동생을 잃은 슬픔도 내 사랑의 한 방향이야'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였더니, 마음이 훨씬 편하다. 동생과 함께하며 느꼈던 감정도 사랑이고, 그때를 떠올리며 슬퍼하는 것도 사랑이다. 이런 감정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친구와 놀다가,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눈물이 나면 참지 않고 그냥 운다. 잘 울고 잘 웃고, 그렇게 1000일을 동생을 사랑하고 있다.

노란 리본, 그리고 촛불

프레시안 : 세월호 참사 1주기 때까지는 같이 슬퍼하며 아픔을 나눴던 것 같다. 그러다 2주기 즈음에는 자신이 속한 계급이나 집단에 따라 감정적 괴리가 나타났다. 하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촛불 정국이 이어지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손아람 : 세월호 참사 얼마 뒤, 경기도 하남에 갈 일이 있었다. 같은 경기도지만, 하남은 안산과 꽤 떨어져 있다. 하남시 곳곳에서 추모 분위기가 느껴졌다. 거리를 지나가는 이들도 세월호 이야기를 했다. 어린 시절이 생각나며 감정 이입이 됐다. 하남에서 일을 보고 서울 강남으로 이동했는데, 지리적으로는 안산과 더 가까운 곳으로 왔는데, 도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돌아가고 있었다. '인간이 계급적으로 분화하더니, 공감 능력마저 다른 종으로 분화한 건가?' 하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이번 촛불집회를 보면서 당시 두 도시에 대한 인상이 굉장히 섣부른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시민들이 주말마다 촛불을 드는 데에는 세월호 참사부터 백남기 사망 사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등 분명한 연결고리가 있다. 청와대 100m 앞 행진이 처음으로 허용된 지난해 11월 12일 촛불집회 때 세월호 유가족들이 방송 차량을 몰고 오자, '박근혜 하야'를 외치던 시민들이 일제히 길을 열어줬다. 그동안 스스로 분열하기도 하며 사람들의 공감 능력이 분화된 듯한 인상도 받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모든 시험을 이겨냈다'는 생각에 감동 받았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사람들이 '세월호, 그거 지나간 거 아냐? 끝났잖아. 일상으로 돌아가야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놓지 못하고 있었던 무언가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다 아주 사소한 일이 기폭제가 돼 표출된 것 아닐까?

최윤아 : 최근 '세월호 참사가 수면 위로 다시 올라왔다' '사람들이 다시 주목하고 있는데, 기분이 어떠냐?'라는 얘기를 많이 듣는데, 세월호 유가족들은 그동안 잊히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는 '여기 있어요' '아직 안 끝났어요'라고 계속 외쳤다. 단지 이슈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한편, 지금의 관심이 약간 걱정된다. 한 번 외면했던 사람이 다시 봐주는 경우라, '언제 또 외면할까?' 우려된다. 사람들이 세월호 참사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적도 있다. 심지어 유가족들의 활동을 나쁜 방향으로 왜곡하는 세력도 있지 않았나. 동시에 '지금이 기회다. 지금이야말로 사람들에게 좀 더 알릴 수 있는 기회일 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든다.

'빛의 바다'와 '아리랑 축전'

프레시안 : 촛불, 희망일까? 불안일까?

손아람 : 희망이다. 단, '희망'은 너무 미래적인 표현이라 촛불은 오히려 '증명'에 가까운 것 같다. 하나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 200만 명이 한 공간에 모인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비폭력 저항운동'이라는 게 질량만으로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 것 아닌가. 더욱이 이런 믿음이 좌절됐을 때의 경험도 작용한 것 같다.

촛불의 시작을 2002년으로 본다면, 당시 촛불은 '대통령 노무현'이라는 흐름을 만들었다. 이에 시민사회는 큰 자신감을 얻었고, 진보정당이 전성기를 맞았다. 반대로 2008년에는 가시적인 성과가 없어 상실감이 엄청났다. 이때 진보정당 역시 몰락한다. 이후 사람들은 질량만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공화정에 매달렸다. '세상을 바꾸려면 양당제, 즉 공화 정치를 통하는 방법밖에 없구나'라며 민주당에 몰렸다.

이번 촛불은 국민의 힘을 증명했다. 특히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믿음을 증명했다. 이제 대통령의 거취가 어떻게 결정되느냐에 따라 촛불은 다른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최윤아 : 촛불을 1000일 가까이 봐왔지만, 지금과 같은 몇 백만 명이 모이는 촛불집회는 매주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12월 10일 촛불집회에서 인권선언문 낭독 차 무대에 올랐는데, 집회 참가자들이 발언자 한 마디 한 마디에 촛불을 흔들어 줬다. 작은 촛불 하나하나가 광장을 가득 메운 모습에 감탄했다. 무대 위에서 본 촛불은 하늘 위에서 별을 내려다보는 느낌이었다. 아니, 빛으로 넘실대는 바다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민주주의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게 촛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척 추운 날이었는데, 빛의 바다에서는 온기도 느껴졌다.

손아람 : 정말 촛불은 굉장히 작다. 그런데 한 번은 촛불 소등 행사를 하는데, 광화문 광장 주변 특급 호텔과 <조선일보>, <동아일보> 건물도 일제히 불을 끄더라. '대단하다'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알고 보니, 촛불이 꺼지면서 건물 외벽에 반사된 불빛이 사라지자 더 어두워진 것이었다. 작은 촛불이 오히려 큰 건물을 밝히고 있었던 셈이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소설가 이문열 씨는 "그 촛불 시위의 정연한 질서와 일사불란한 통제 상태에서 '아리랑 축전'에서와 같은 거대한 집단 체조의 분위기까지 느껴지더라는 사람도 있었다”며 소등 행사에 대해서도 "으스스한 느낌마저 들었다"고 표현했다.(2016년 12월 3일 자 <조선일보> 기고)

손아람 : 그렇다면, 사람들이 해가 뜨면 일어나 일정한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고 해가 지면 자는 것도 전체주의다. 전체주의를 피하려면, 누군가는 지각도 하고 주말이 아닌 평일에도 사람을 만나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프레시안 : 북한의 '아리랑 축전'은 조직화된 것이다. 그리고 촛불집회는 누가 시켜서 광장에 나오는 게 아니지 않나.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광장에 펼쳐진 '빛의 바다'를 보고 어떤 이는 무서워서 눈물 흘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손아람 : 그럴 수 있다. 200만 명이라는 숫자는 군대가 명령해도 동원하기 어려운 수치다. 대한민국 육군 60만 명보다 많다. 군대처럼 명령권자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같은 생각을 가진 200만 명이 한날 한 장소에 모인다는 것은 섬뜩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촛불집회는 '인간을 진정으로 지배하는 게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네가 그런다고 안 바뀌어. 윤아야"

프레시안 : 촛불을 보고 공포를 느끼는 쪽에서는 세월호 참사는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최윤아 : 할아버지가 6.25 한국전쟁 참전 용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존경하는 새누리당 지지자다. 이분이 손녀를 잃고 처음에는 무척 슬퍼하셨다. 그런데 가족들이 세월호 진상규명 활동을 시작하자 '나라에 반하는 짓'이라며 거세게 반대하셨다.

한 번은 할아버지가 전화로, "윤아 너는 활동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에 너무 화가 나 처음으로 할아버지에게 대들었다. "할아버지 손녀가 죽었는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냐?"고.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네가 불이익을 당할까 봐 겁이 난다"고 하셨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 나는 이렇게 해서라도 나라를 바꾸고 싶어. 잘못했으면 사과하는 게 당연한 거잖아. 어떻게든 사과하게 만들고 싶어. 잘못했다고 계속 말하고 싶어. 그 사람이 잘못한 거지. 내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

할아버지에게 울면서 하소연하듯 말했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네가 활동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거듭 말씀하셨다. 그래서 "할아버지, 세월호에 탔던 304명이 죽었는데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라고 물었더니,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다가 그러셨다.

"네가 그런다고 뭐가 바뀔 것 같아? 네가 그런다고 안 바뀌어. 윤아야."

▲ 단원고 2학년 최윤민 양의 언니 최윤아 씨. ⓒ프레시안(최형락)

손아람 : 아, 충격적이다.

프레시안 : 본인이 살아온 경험에 근거해서 현실적으로 판단한 것일 수도.

최윤아 : 한편으로는 잔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슴 아픈 대화였다. 나중에 '내가 잘못한 걸까? 과연 내 잘못일까?' 생각에, 대화를 곱씹어 봤다. 그렇게 아픈 걸, 왜 곱씹는지. 할아버지도 이 상황이 잘못됐다는 걸 안다. 나에게 죄가 없다는 것도 안다. 단지, "네가 그런다고 안 바뀌어"라는 말처럼 그런 생각으로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잘못은 알지만 개인적인 불이익이 있을 수 있고, 해도 바뀌지 않고 상처만 받을 테니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의 말씀이 굉장히 이기적으로 들렸다. 오히려 '안 바뀐다고? 사람들이 가만히 있어서 이 세상이 이렇게 된 거 아닐까? 할아버지 같은 사람들 때문에 더 엉망진창이 된 것은 아닐까? 그럼, 누구 한 사람이라도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더 열심히 활동했다. 할아버지와 싸우고 진짜 열심히 활동했다.(웃음)

손아람 : 소설 <소수의견>을 쓸 때도 어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재개발 강제 철거 과정에서 한 아이가 죽어 작업이 중단된다. 하지만 동네 어른들은 아이의 죽음은 아랑곳없이 하루빨리 작업을 재개하라고 소리친다. 이 장면에서 '저분들도 사실은 피해자다. 자기 자식이 희생당하기 전까지는 우리 세계의 실제 모습이 생각해 볼 수 없는 사람들이라, 저분들도 피해자다'라고 썼다. 그런데 윤아 씨 말 대로라면, 손녀를 잃었는데도 세계관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 아닌가.

친인척 중에 "그런 글만 쓰면 세상의 절반을 적으로 돌리는 것"이라며 "왜 네 글을 읽어줄 사람들이 널 증오하게 만드는 그런 글을 쓰느냐. 너 자신의 가능성을 헤치고 너 자신을 어디에 가두는 글을 쓰지 마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영화 <소수의견>으로 청룡영화상 각본상을 받은 뒤, "<조선일보>가 준 상이다. 그러니 말씀이 잘못됐다고 인정하라"고 따졌다.(웃음)

"저는 세월호 유가족입니다"

프레시안 : 윤아 씨도 <소수의견>를 영화로 봤다고 들었다.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

최윤아 : 세월호 참사 뒤에 봐서 그런지, 영화 장면을 현 상황과 비교하게 되더라. 특히 '우리 부모님도 저렇게 법정에 선다면'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손아람 : 소설을 쓸 때는 참사 전이었지만, 국가 폭력으로 희생된 점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등 세월호 참사를 연상하게 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용산 참사와 세월호 참사 모두 사건이 발생한 직후, 사람들은 놀라고 슬퍼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그러다 사건이 정치적으로 윤색이 되면, 사람들은 가슴이 아닌 머리로 판단하기 시작한다. '이 사건은 이미 정치적 쟁점으로 비화됐고, 인간적인 감성으로 이야기할 단계는 넘어섰다'는 식으로. 그 순간부터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감정을 무화(無化)시키기 위해서 반인륜적 행태가 나타난다.

'일베(일간베스트)'조차 진짜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라 너그러운 것인지 모르겠지만, 가급적이면 누군가를 '악(惡)'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다. 여전히 개선이 가능한 희망이 있는 구조적인 사람들이 사회에 있지만, 한 발씩은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관이 뿌리부터 흔들릴 것 같다.

윤아 씨의 할아버지도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손녀의 죽음은 슬프지만, 본인이 평생을 거쳐 쌓아온 세계관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 아닐까? 세계관의 붕괴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찾은 합의점이 감정을 닫아 버리는 결과가 나타났을 것이다. 반인륜적 행태는 할아버지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 손아람 작가.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결과적으로 나타난 사회의 부조리, 반인륜적 행태는 인간 본성의 문제가 아닌 시스템의 문제라고 이해된다. 할아버지의 경우, 손녀의 죽음으로 자신이 변화한다고 가정할 때 어떤 불안함이 엄습했을 것이다.

손아람 : 우익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감정팔이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정작 감정에 호소할 때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사건을 머리로 또 정치적인 문제로 해결하려고 할 때 나온다. 감정이 아닌 이성적 해결을 시작하려 할 때 차가운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감정을 닫아야 한다'는 식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일베'에 나름대로 많은 키워드를 넣어 봤다. 처음에는 '패륜 코스프레'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소방관, 경찰관, 군인 등 '희생'에 대해 매우 공감할 수 있는 직업군이 다수였다. 이들 역시 '마음의 문'을 닫았던 것 아닐까? 특히 국가에 공무하는 군인의 희생이 아닌, 민간인의 희생이 정치적 쟁점이 됐을 때는 민간인이 국가를 위협한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마음을 닫아 버린 것 아닐까?

물론 '일베'가 가장 극단적인 형태지만, 많은 사람들이 머리와 마음 사이 어딘가에서 그런 과정을 반복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사 당일 놀란 마음에 슬펐고 동시에 가족을 떠올렸으나, 스스로 믿는 국가관이나 세계관이 위협당하거나 흔들린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감정을 닫아버린 것 아닐까.

최윤아 : 피해자 위치에 있어 그런지, 생각이 좀 다르다. 시스템의 문제가 아닌, 사람들의 인식이 문제인 것 같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유신독재 정권에 이르기까지 지배계층은 피해자의 행동을 철저하게 제한하고 막았다. 그런 경험이 쌓여 어떤 이미지가 생긴 것이다. 피해자가 무엇인가를 요구하면, '가만히 있지 않고 왜들 저래?'라며 '빨갱이'라고 손가락질한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활동적인 피해자'는 없었다. 그래서 세월호 진상규명 활동이 더 힘들었다. 어느 순간 '돈 몇 푼 쥐여주고 끝내려고 하는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건 돈이 아니다'라고 말하자, 사람들은 '돈을 밝힌다'며 '더 달라고 저러는 것'이라고 하더라. 한마디로, '피해자답지 못하다'는 비난이다. 그 결과 '순수 유가족'이라는 말까지 나오지 않았나.

그동안 대형 참사 피해자들 대부분이 이민을 가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해 피해자가 아닌 척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피해자'로부터 도피를 한 셈이다. 그런데 세월호 유가족들은 적극적으로 무엇이 잘못됐는지, 우리가 요구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렸다. '활동적인 피해자'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바뀌고 있지만, 아직 과도기라고 생각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1년 정도 세월호 진상규명 활동을 하다가 다른 곳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세월호 유가족이라는 사실을 밝힐 이유는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세월호 이야기를 하게 됐고, 그 자리에서 "저 유가족입니다"라고 말했다. 유가족이 아닌 척 피해자가 아닌 척 넘어갈 수도 있지만, 그러면 스스로 이중적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 같았다. 어떤 피해자든, 피해자들이 좀 더 당당해졌으면 좋겠다.

ⓒ프레시안(최형락)

손아람 작가와 최윤아 두 사람의 이야기, 곧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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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열

정치부 정당 출입, 청와대 출입, 기획취재팀, 협동조합팀 등을 거쳤습니다. 현재 '젊은 프레시안'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쿠바와 남미에 관심이 많고 <너는 쿠바에 갔다>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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