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코 한 코 나와 세상을 엮다

[작은책] 다큐 <야근 대신 뜨개질>

저는 회사라고 불리는 곳에서 일해 본 경험이 없습니다. 28살에 공중파 방송국에서 계약서도 안 쓴 채 3개월간 일용직으로 일한 경험은 있지만, 정규직 사원들이 만들어내는 신분제 질서에 놀라서 얼른 나왔습니다. 안정적인 직장에서 정규직으로 살아가는 친구들은 가끔 저를 찾아와 "우리는 떠나왔지만 너는 여전히 꿈을 좇고 있구나" 하고 격려해 주며 맛있는 음식을 사 주곤 합니다. 그런 대접을 받을 때마다 저는 부끄럽습니다. 불편함도 아닌 부끄러움. 박소현 감독의 <야근 대신 뜨개질>(2016) 덕분에 저는 이 부끄러움의 이유를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기업 '트래블러스 맵'을 다니는 주인공 나나는 거의 매일 야근을 합니다. 어느 토요일, 휴일에도 출근한 나나와 주이, 빽은 이런 생활이 무언가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야근 대신 무언가 재미있는 걸 해 보기로 합니다. 그렇게 '야근 대신 뜨개질(이하 야뜨질)'이 시작됩니다. 헌 티셔츠를 잘라 만든 실로 뜨개질을 해서 삭막한 도시를 알록달록 물들여 보자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모두가 잠든 새벽에 '도시 테러'라 이름 붙인 퍼포먼스를 벌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피식 웃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려고 한 코 한 코 정성 들여 만든 뜨개질 천들은 곧장 쓰레기로 처분됩니다. 영화는 시작부터 그녀들의 노력이 결코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합니다.

▲ 다큐멘터리 <야근 대신 뜨개질>(박소현 감독, 2015) 중 한 장면. ⓒ(주)영화사 진진

첫 코 뜨기, 겉뜨기, 안뜨기, 털실 풀어내기, 그리고 다시 시작하기, 코 막음하기, 이어붙이기. 영화는 뜨개질의 각 단계를 소제목으로 나나를 비롯한 야뜨질 멤버들의 시도들을 촘촘하게 보여 줍니다. 편하게 몰입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닙니다. 무표정한 출근길을 알록달록하게 물들여 보겠다는 그녀들의 첫 시도가 단 한 사람의 눈길도 끌지 못한 채 스러질 때, 뜨개질로 뭐가 변할까, 뜨개질이 세상에 한 치의 균열이라도 낼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밀양에 대한 영화를 본 후 밀양송전탑투쟁 지지 방안을 고민하고, 세월호 투쟁에 연대하기 위해 삐라를 넣은 풍선을 날릴 계획에 대해 논의하는 모습들을 보노라면, 그녀들과 세상은 그녀들의 뜨개질처럼 한 코 한 코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 다큐멘터리 <야근 대신 뜨개질>(박소현 감독, 2015) 중 한 장면. ⓒ(주)영화사 진진
그리고 나나는 노동조합을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나나는 공정여행을 표방하는 '트래블러스 맵'의 창립 멤버입니다. 10명 남짓한 인원으로 시작했던 회사는 이제 40명이 넘는 큰 조직이 되었고 서로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아주던 분위기는 이제 옛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나와 주이는 이사진들에 대해 "다른 언어를 쓴다"라고 표현합니다. "다른 회사 같으면 우리 인원의 반만으로도 업무를 해낼 수 있다"라는 대표의 말은 공정여행에 대한 열망으로 머리를 맞대던 초창기 시절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왔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모르는 새에 업무 규칙이 바뀐 것에 대한 질문을 했을 뿐인데, 날카롭게 반응하며 임금협상 운운하는 이사를 보며 나나는 스스로의 노동자성(勞動者性)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야근 대신 뜨개질>은 사회적 기업 최초의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나나의 노력과 밀양, 세월호 같은 싸움과의 연대를 고민하는 야뜨질 멤버들의 시도를 씨실과 날실 삼아 촘촘히 짜 내려갑니다.

나나와 대표이사 변의 독대가 인상적입니다. "우리끼리 행복할 거면 그냥 뜻 맞는 사람끼리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만 잘 하면 되"겠지만, 공정여행의 가치를 세상에 각인시키고 싶은 변은 그 단호한 목표를 위해 직원들에게 "경주마처럼 눈 양옆에 가리개를 하겠다"고 천명합니다. '네가 갈 길은 저기이니 저기 보고 가자'라고 할 때 따라오는 직원들과만 같이 일할 수 있다는 변의 태도는 사실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합니다.

누군가는 목표를 천명하며 앞서 나가고 누군가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야근을 밥 먹듯이 합니다. 그래서 주이가 말하죠. "물어오는 사람 따로 있고 야근하는 사람 따로 있으면 어느 순간 승진하는 사람도 따로 있겠지." 그러면서도 밖에 나가 보면 '내가 참 좋은 회사에 다니고 있다'라고 느낀답니다. 그 마음 또한 십분 이해되죠. 대안적 삶과 진보적 운동을 고민하며 함께 시작했지만, 어느새 비윤리적인 조직 논리를 답습하고 있다거나, 조직의 발전을 위해 개인의 욕망은 잠시 접어 두라거나, 조직이 어려운데 절차상의 합리를 말하는 것에 대해 '해일 앞에 조개를 줍는 격'이라고 비판하는 일은 지금도 여전히 너무나도 자주 반복되고 있는 일이니까요. 결국 나나와 주이는 퇴사를 결심합니다.

▲ 다큐멘터리 <야근 대신 뜨개질>(박소현 감독, 2015) 중 한 장면. ⓒ(주)영화사 진진

일상의 모든 순간을 자신이 정한 원칙에 비추어 보고 조근조근 의견을 말해 가며 때론 설득하고 때론 싸우는 나나의 모습에 반했습니다. 그리고 왜 제가 친구들 앞에서 부끄러워지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 번도 나나처럼 열심히 싸워 보지 못했거든요.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현재의 자리 이전에 몇 개의 직업을 거치면서 저는 제가 원치 않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늘 조용히 물러났습니다. 길을 만들기 위해 싸우지 않았습니다. '이 길이 아닌가 봐. 그럼 다른 길로 가면 되지.' 그렇게 먼 길을 떠돌아다녔습니다. 저처럼 떠도는 사람들은 길을 만들지도, 어느 한 곳에 머물지도 못하죠. 저는 그렇게 나나를 통해 저의 지난 시간을 돌아볼 수 있었고 자기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나나의 모습에 감동하였습니다. 포기할 수 없는 원칙과 타협할 수 있는 선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어떻게든 최선을 다했기에 나나의 퇴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됩니다.

세상의 진보와 대의명분만큼이나 일상의 디테일이 중요하다는 것도 나나는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한 코 한 코 뜨는 뜨개질처럼 일단 그렇게 시작한 후에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나나와 야뜨질 멤버들의 다음이 기대됩니다. 일상의 잔물결에 몸을 맡기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 물결을 찬찬히 살펴보게 만드는 <야근 대신 뜨개질>은 11월 17일에 개봉하여 현재 극장 상영 중입니다.

(공동체 상영 문의 : 영화사 진진 02-730-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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