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젠더 감수성

[민들레] 페미니즘, 뿔 달린 여성의 외침이 아니다

그 친구를 (그 사건을) 대하는 법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우리 반에는 좀 특별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평소에는 굉장히 의젓하고 유난히 한자에 박식한 아이였다. 다만 아홉 살 답지 않은 어른스러운 말투를 사용했고, 가끔 혼자 중얼거리거나 이상한 소리를 내는 등 예상치 못한 돌발 행동을 했다. 지금 생각하니 일종의 자폐증이었으리라 생각되는데, 어린 나이에는 그게 무섭기도 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자연스럽게 반 아이들은 거리를 두게 되었고, 그 친구는 선생님과 가까운 맨 앞자리에 혼자 앉아 수업을 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은 더럽다거나 병균이 옮는다며 그 친구를 더더욱 멀리했고, 몇몇 짓궂은 친구들이 그 아이를 괴롭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불편함과 즐거움 사이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당시 우리 반 마흔네 명의 아이들 중 단 한 명도 그 친구를 같은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

비겁한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 누구도 우리에게 그 친구가 어떤 상태인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학교도, 교사도, 부모들도 분명히 그 친구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 존재를 애써 무시하는 것, 혹은 크게 자극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둔 채 일 년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20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것이 한국사회에서 '다름'을 대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대화하고, 이해하고, 공부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을 들이는 대신 무시하고, 배제하고, 쫓아내기가 훨씬 쉽고, 효율적으로 조직을 보전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 이 사회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중학교에서도 고등학교에서도 군대에서도 사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이런 사고방식 속에서 다름에 대한 이해, 삶의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가지는 것이 가능할까.

중학교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기숙형 대안학교였는데, 졸업을 앞둔 학기 말 성폭력 사건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학교가 사건을 풀어나갔던 방식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최소한이라 할 수 있는 피해자를 위한 치유와 회복, 가해자에 대한 적절한 징계,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논의하고 시스템을 세우는 것,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피해자 본인이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고백하게 했던 모습은 제삼자인 나에게도 평생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우리 사회는 성 문제를 제대로 다루어 본 경험치가 사실상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진보적인 집단일지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아마 학교도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가해자들는 한 달 뒤에 학교를 졸업했고, 이 사건이 어떻게 종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기억나는 것이 없다. 피해는 고스란히 피해자들 개인이 감내해야 하는 몫이었고, 13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짐으로 남겨져 있다.

3년 전 대안학교 졸업생을 연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또 한 번 놀란 것은 대부분의 졸업생들이 여전히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 역시 기억나는 것이라고 해봐야 1년에 한 번 임신 과정과 피임법에 대해 배운 것이 전부였다. 많은 대안학교에서 말하는 '대안'이 입시교육이나 소비문화 탈피, 생명평화나 탈핵 같은 큰 가치를 지향하고 있었을지는 몰라도 한국 사회의 낮은 '젠더 감수성'까지는 품고 있지 못했던 것 같다. 문제는 그런 낮은 젠더 감수성이 고스란히 대물림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 채 대학을 거치고, 군대를 거치고, 직장을 거치면 낮은 젠더 감수성은 더욱 고착되거나 강해진다. 특히 젠더 감수성에 무뎌진 남자아이들이 자라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술은 여자가 따라야 맛있다" "여자 나이 서른이면 상장폐지다"와 같은 폭언에 가까운 성적 농담을 일삼고, 수시로 유흥업소에 드나드는 소위 '개저씨(개+아저씨)'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 트위터 '젠더 감수성' 검색 이미지.

같은 곳에 살고 있지만 서로 다른 곳에 서 있는

아마 상병 때였을 것이다. 휴가를 나와 서울에서 자취하는 여동생 집에 며칠 묵게 되었다. 늦은 시간까지 놀다가 지하철 막차를 타고 내려 집으로 가는데, 내 앞에 한 여성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 여성은 뒤에서 나는 내 발소리가 신경 쓰였는지 걷다가 이따금 힐끔힐끔 뒤를 돌아봤다(휴가 나온 군인이라 짧은 머리에 후드티,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었는데 확실히 내가 생각해도 좋은 인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성은 점점 속도를 내더니 집 앞 골목 가까이 다다르자 황급히 자기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당황스럽고 괜히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 기분이 나쁘기도 한,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러고 나서 동생의 자취방으로 들어갔는데, 이번엔 동생이 잠결에 인기척을 느끼고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닌가. 아마 불이 꺼져 있었고, 미리 연락을 주지 않고 간 터라 더 그랬을 것이다. 난 아직도 그때의 동생 목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20년 넘게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공포와 두려움의 목소리. 뭔가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순간 '만약 내가 아니라 정말 괴한이 침입한 상황이었다면'이라는 생각이 스쳐 가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깨닫게 된 사실 두 가지. 하나는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남성'이라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 또 하나는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일상이 생각보다 더 쉽게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그로 인한 불안이나 두려움이 크다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대한민국은 치안이 잘 되어 있는 나라였다. 밤늦게 다녀도, 외박을 해도, 자취를 해도, 혼자 여행을 다녀도 내겐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내 동갑내기 여자 친구들은 상황이 달랐다. 같이 술을 마셔도 밤 10시가 넘으면 어김없이 부모님의 전화를 받아야 했고, 밤늦게 택시를 타는 것도, 그리고 계산을 위해 기사에게 카드를 내미는 것도 그들에겐 위험하고 불안한 일이었다. 성폭력 사건은 신문이나 뉴스에서나 볼 수 있는 나와는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내 주변에 있는 여성 중에 상당수가 크고 작은 성폭력 경험들로 인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다.

몇 년 전 여동생이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을 엄마가 알게 되었을 때, 엄마는 펄펄 뛰면서 반대했다. 난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동생도 성인이다, 내가 담배를 피웠어도 그렇게 반대했을 거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너는 남자고 동생은 여자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단지 '여자'라는 이유가 꽤 많은 경우에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 근거가 되곤 한다. 여동생과 여자 친구들. 그들과 나는 같은 곳에 살고 있었지만 그동안 서로 다른 곳에 서 있었던 것이다.

내 안의 작은 젠더 감수성 깨우기

나 역시 몇몇 경험을 통해 그 미지의 영역에 이제 막 발을 들여놓았으니, 대체 '젠더 감수성'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더듬더듬 물어가며, 조금씩 깨우쳐가며, 천천히 가는 수밖에 없다. 내가 이 과정에서 작게나마 깨달아가는 것이 있다면, 페미니즘이란 어떤 뿔 달린 여성들의 외침이 아니라는 것과, 젠더 감수성이란 소수의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수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 역시 일상의 작은 의문에서부터 출발했던 것 같다. 왜 명절날 그 많은 설거지와 음식들은 엄마들이 다 하는 걸까? 내가 일하는 업계의 신입들은 분명히 여자가 훨씬 많은데, 왜 10년 차 이상의 경력직부터는 여성이 거의 없는 걸까? 나는 누군가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루에 몇 번이나 할까? 이런 의문들 속에서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고 지극히 평범했던 일상들이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프로 불편러'라는 표현이 있다. 매사에 불편하고 예민한 사람들을 비꼬는 표현인데, 사실 더 큰 문제는 '프로 안 불편러'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상처받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그게 뭐가 문제야, 나랑은 상관없는데, 난 잘못한 거 없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 한국사회에서는 상처를 받아봐야 아픔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는 이상한 논리가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는 원망과 트라우마로 남는다.

과유불급이라지만, 적어도 성 불평등의 구조로 오랜 세월을 지나온 한국에서는 젠더 감수성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하거나 불편한 것이 맞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기준치가 서로 다 다르다고 한다면, 가장 낮고 작은 목소리가 그 기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나의 경우, 젠더 감수성을 깨우기 위한 가장 좋은 계기는 역시 연애였다. 연애는 나와 다른 상대방을 가장 깊이 들여다보며, 이해해볼 수 있는 관계임과 동시에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부족하고 한심한지 밑바닥을 보여주는 자아비판의 계기였다. 연애란 영원불멸하지 않기에, 헤어지고 난 뒤 잘 회고하고 반성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내가 언제 상대방을 서운하게 했는지, 어떤 말들이 해서는 안 될 말이었는지, 어떤 이유에서 우리가 헤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긴긴밤 잠 못 이루던 그 처절한 기억을 떠올려보면 그것이 바로 젠더 감수성을 키워가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오늘도 개저씨가 되지 않겠다고 발버둥치며 살아가고 있지만, 밀려드는 무력감과 초라함을 견뎌 내기 힘들 때가 많다. 각자도생 대한민국에서는 젠더 감수성마저도 스스로 깨우치는 수밖에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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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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