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어두운 날 희망이 싹틉니다

[김형찬의 동네 한의학] 동지를 지나며

올 한 해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원숭이마냥 우리 사회에 여러 일이 있었습니다. 그 어려움은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래서인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연말이지만, 거리의 풍경은 그저 겨울의 추위만을 담은 것 같습니다. 진료실을 찾은 환자의 모습에서 한 해를 잘 살아내었다는 보람보다 삶의 고단함이 유독 많이 느껴지는 까닭은, 우리 모두가 이 어려운 시국을 나눠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고단함 속에도 작은 희망의 씨앗을 발견합니다.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만 봐도 위안이 됩니다. 환자가 전하는 삶의 이야기에 제가 감화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의사는 환자를 통해 보람을 얻고 자신을 성장케 하라는 숙제를 받은 사람 같기도 합니다.

올 여름 무더위가 한창일 때, 물에 젖은 솜뭉치와 같은 모습으로 오신 분이 있습니다. 일 때문에 많은 시간을 걸어야 하는데, 무릎이 아파 힘들다고 하셨지요. 몇 해 전 유방암 수술을 받은 후, 약물을 복용하면서 힘겹게 버티는 상황이었습니다. 치료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분께 잠시 쉴 것을 권했습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이 선을 넘으면 안 될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지요. 환자 자신도 막연하지만 인지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현실적인 상황 때문에 휴식을 미루던 이 분은 가을 들어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는 그림을 배우시라 적극 권했고 환자도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예전에 상담하면서 '시간과 건강이 허락하면 뭘 하고 싶냐'는 질문에 학생 때 조금 배우다 그만 둔 그림을 다시 해보고 싶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한두 달 시간이 흐르면서 환자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팽팽한 현과 같았던 몸은 부드러워지기 시작했고, 얼굴 표정이 바뀌었고, 치료 반응도 좋아졌지요. 그러면서 복용 중이던 약물도 줄여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환자 스스로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은 있지만, 이제는 쫓기듯 살기보다는 천천히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일하겠다고 말합니다. 비록 휴직도 중요했지만, 저는 이 분의 변화에 그림을 배운 것이 주요했다고 생각합니다. 환자도 동의하고요.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걱정이나 근심이 없고 마냥 즐겁답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조급함이나 불안도 줄어들기 시작한 것 같다고 합니다. 앞으로 다시 일을 시작해도 그림을 멈추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언제고 전시회를 여시면 꼭 초대해 주시라고 했지요.

몇 해 전부터 말만 하면 귀가 막혀서 괴롭다는 분도 기억에 남습니다. 증상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오랫동안 대화하기 힘들고, 아이 돌보기도 어려워서 지치고 예민해졌다는 분이었지요. 치료과정에서 시행착오도 겪었고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이제는 오랜 시간 대화할 수 있습니다. 덕분에 아이들에게도 너그러워졌다고 합니다. 과거에 몸이 좋아지면 하고 싶은 일을 잔뜩 정해뒀지만 그간 못했는데, 지금은 이 중에 무엇부터 해야 할지가 고민이랍니다. 이 분께는 앞으로 건강을 다지는데 시간이 필요하므로,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하나씩 실행하시라 당부했지요.

상담하고 치료하면서 건강과 행복에 관한 생각을 자주 합니다. 마음과 몸의 건강은 행복을 위한 아주 중요한 조건입니다. 삶의 무게에 눌려 나의 행복을 잊었을 때 몸은 병이란 이름의 신호를 보내는 것은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동지.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입니다. 그런데 옛사람들은 이 날을 주역 복괘(復卦)의 뜻을 빌려 일양래복(一陽來復)이라 표현합니다. 가장 어둠이 긴 겨울날에 따뜻한 양의 기운이 돌아온다니 참으로 멋진 말입니다. 밤과 겨울이 아무리 길어도 그 어둠과 추위 속에서 새로움은 싹튼다는 희망의 말입니다.

올 한해도 이제 손가락으로 헤아릴 만큼 남았습니다. 이 시간을 일 년 동안 잘 살아온 자신에 대한 감사와 행복의 점검, 그리고 새로운 희망으로 채우며 건강하게 보내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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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찬

생각과 삶이 바뀌면 건강도 변화한다는 신념으로 진료실을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텃밭 속에 숨은 약초>, <내 몸과 친해지는 생활 한의학>, <50 60 70 한의학> 등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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