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 상황 부풀리고 꾸며내고…홀로코스트를 훔쳐간 사기꾼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21]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49

[희망의 끝이 보이듯, 그날 아침 겨울이 찾아왔다. 씻으려고 막사를 나간 순간 우리는 그것을 알았다. 첫새벽에 일을 하기 위해 점호 마당에 모였을 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첫눈발이 휘날리는 것을 보고 우리는 작년 이맘때, 이 수용소에서 다시 겨울을 맞을 거라고 그들(경비대원)이 말해줬다면 아마도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을 건드려보려 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희망의 잔재가 남아있지 않다면, 지금도 철조망 쪽으로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2007, 189-190쪽).

위에 옮긴 글은 이탈리아 화학자 프리모 레비(1919-1987)가 전쟁 끝 무렵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의 지치고 힘든 마음을 그려낸 대목이다.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의 한계 상황을 증언한 여러 귀한 기록들을 남겼다. <이것이 인간인가>(초판 1947),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초판 1986) 등은 독자들로 하여금 삶과 죽음, 선과 악의 문제 등을 곰곰 생각해보도록 이끈다. 레비에 따르면, 수용소 사람들의 목숨을 이어가도록 만든 것은 '희망'이었다. 언젠가 살아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사람은 '무슬림'(삶을 포기한 사람, 수용소의 은어)이 돼 얼마 못가 죽었다.

레비, "살아남았기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1945년 1월 하순 소련군 제60군 제100사단을 선두로 3개 사단이 아우슈비츠 수용소 쪽으로 다가갔다. 수용소 경비와 운영을 책임진 나치 친위대(SS)는 시신 소각장 등 시설물들을 폭파하고 불태웠다. 전쟁범죄의 증거를 없애려는 시도였지만, 서둘러 도망치느라 다 없애진 못했다. 경비대원들은 수감자 가운데 걸을 수 있는 5만 8000명을 데리고 떠났다(이송 과정에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많은 이들이 죽었기에 '죽음의 행진'이란 이름이 붙었다).

1945년 1월27일 오후 소련군이 아우슈비츠를 접수했을 때, 그곳엔 병약해 곧 쓰러질 듯한 수감자 7000명이 누더기를 걸친 채 남아 있었다(그들 가운데 몇 백 명은 그 뒤 며칠 안에 숨을 거두었다). 그 7000명 가운데 한 사람이 프리모 레비였다. 친위대가 아우슈비츠에서 떠날 무렵 몸이 아파 병실에 누워있었기에 '죽음의 행진'을 피할 수 있었다.

위에 옮긴 글처럼, '희망'을 품고 고난을 견뎌온 레비였다. 하지만 막상 아우슈비츠가 해방되던 날, 말을 타고 온 소련군 선발대 4명과 마주쳤을 때 레비의 감정은 달랐다. 그 병사들을 보고 '이젠 살았다'는 안도감보다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가 말하는 '독일인들은 모르는 부끄러움'은 이러했다.

[가스실로 보내질 인원 선발이 끝난 뒤, 그리고 매번 모욕을 당하거나 당하는 자리에 있어야 했을 때마다 우리를 가라앉게 만들었던 그 부끄러움, 독일인들은 모르던 부끄러움, 타인이 저지른 잘못 앞에서 올바른 자가 느끼는 부끄러움, 그리고 그런 잘못이 존재하는 세상 속에 돌이킬 수 없이 자신이 끌어들여졌다는 것에, 그리고 자신의 선한 의지가 아무것도 아니거나 턱없이 부족하고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는 것에 가책을 느끼게 만드는 바로 그 부끄러움이었다](프리모 레비, <휴전>, 돌베개, 2010, 19-20쪽).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남들처럼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에 나름의 죄책감을 지녔다. 가스실로 누군가가 보내질 때 나는 살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숨을 들이켰던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다. 고향인 이탈리아 토리노로 돌아와서도 아우슈비츠의 고통스런 삶과 동료 수감자들의 죽음에 대한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가끔 무서운 꿈을 꾸었다. 수용소 안에 갇혀 있는 꿈이다. 꿈속에서 그는 익숙한 어떤 목소리를 듣는다. 아우슈비츠의 새벽에 늘 두려움 속에 듣던 명령 소리다(프리모 레비, <휴전> 328쪽).

나치 수용소에 관한 깊은 성찰을 담은 여러 권의 책들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지만 레비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1987년 아파트 4층 난간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자살할 무렵엔 뇌졸중으로 쓰러진 노모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더해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남긴 트라우마로 심한 우울증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 1938년 12월 독일 작센하우젠 수용소의 수감자들. 굳은 얼굴 표정에서 겨울의 혹독한 수용소 환경이 전해진다. Ⓒ위키미디어

5000권으로 추정되는 증언집, 회고록

프리모 레비와 같은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모두 얼마나 되는지는 논쟁거리다. 유대인 단체들은 독일과 스위스로부터 배상금을 받아낼 때 (독일과 스위스 사람들의 눈에는 터무니없을 만큼)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 규모를 부풀렸다. 나치수용소와 게토에 갇혀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뿐 아니라, 나치 박해를 피해 일찍이 독일을 떠났던 이들을 '홀로코스트 생존자' 속에 포함시켰다(이 주제에 대해선 곧 다시 살펴본다).

나치 수용소나 게토에서 살아남은 '진짜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얼마나 될까. 예루살렘 야드 바셈 박물관 쪽 자료는 20~30만 명이다. 이보다는 작게 보는 연구자들도 있다. 베를린 출신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역사학자 헨리 프리들랜더(Henry Friedlander, 1930-2012, 뉴욕시립대)는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 규모를 10만 명쯤으로 잡는다. 다른 연구자들은 10만~20만 사이로 추정한다(1995년 미 워싱턴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이 여러 홀로코스트 연구자들의 글을 모은 책자인 <Darkness and Dawn in 1945: The Nazis, the Allies, and the Survivors>, 11-35쪽 참조).

1945년 전쟁이 끝난 뒤 "내가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증언집과 회고록이 출판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수용소에 갇혔던 어린이 생존자들의 증언을 담은 책들도 여러 권 나왔다. 이들을 모두 합치면 많게는 5000권쯤의 분량이고, 증언을 받아 기록한 구술사 모음집은 1000개쯤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미출간으로 대학이나 홀로코스트 기념관 또는 박물관 아카이브에 보관중이다.

문제는 홀로코스트의 상품화다. 위에서 살펴본 이탈리아 화학자 프리모 레비처럼 깊은 성찰을 담은 생존자들의 기록들도 있긴 하지만, 적지 않은 책들이 허위 또는 과장으로 진실과는 거리가 있는 허접한 내용들로 채워졌다. 없던 일을 마치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처럼 지어낸 얘기, 나치의 잔혹성을 실제보다 크게 부풀린 얘기들 따위다. 자극적이고 원초적인 폭력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관심을 모아 책 판매 부수를 늘리려는 상업적인 동기가 깔려 있다. 유대인들은 이를 알면서도 눈감아준다. '중동의 깡패국가'란 욕을 먹는 이스라엘을 (지난날의 홀로코스트를 면죄부처럼 내세워 팔레스타인에서 저지르는 전쟁범죄를 흐리는 쪽으로) 감싸주는 부수적인 효과 때문이다.

안네 프랑크를 둘러싼 이권 갈등

나치 독일의 유대인 박해와 관련된 책으로 가장 많이 팔린 것은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1929-1945)가 남긴 <안네의 일기>다. 1947년 초판이 나온 이래 7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돼 3000만부 이상 팔렸다. 2억부 이상 팔린 것으로 알려진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보다는 못하지만, 대단한 판매량이다.

작가가 되는 꿈을 꾸었던 10대 사춘기 소녀 안네는 섬세하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험한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위의 프리모 레비처럼) '희망'을 잃지 않으려 했다. 그런 소녀의 순수함이 독자들의 마음에 다가갔기에 그렇게 많이 읽혔다. 2년 1개월가량 숨어 지내다 1944년 8월에 붙잡혀 1945년 초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티푸스 전염병에 걸려 죽은 안네의 이야기는 홀로코스트 상업화의 긍정적인 성공 사례다.

문제는 홀로코스트 희생자 안네를 둘러싼 경제적 이해관계의 다툼이다. 이를테면 <안네의 일기> 저작권을 둘러싼 갈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저작권은 당사자가 숨진 뒤 70년 동안만 보호받는다. 안네가 1945년에 숨졌으니 2015년 12월31일부로 저작권은 소멸된다. 1963년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스위스 바젤에 세운 '안네 프랑크 기금(Anne Frank Fonds)'은 2015년 오토가 <안네의 일기>의 공저자라고 주장하면서, 1980년 오토가 사망했으니 저작권은 2050년까지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기금' 쪽 주장에 따르면, 아버지 오토가 <안네의 일기>를 처음 펴낼 때 일기의 일부 내용(사춘기 소녀의 성적 호기심, 남을 흉보는 내용 등)을 빼고 편집을 했기에 공저자라는 얘기다. 이를 두고 '편집 행위가 창작 수준의 공동저작으로 볼 수 있느냐'는 비판이 일었다(이즈음 출판계 사람들은 일기의 저작권이 만료된 것으로 여긴다).

안네와 관련된 단체로는 '안네 프랑크 기금' 말고도 1960년에 문을 연 '안네 프랑크 하우스'가 있다. 안네가 숨어 지냈던 암스테르담 비밀 별채를 박물관으로 운영하는 단체다. 안네 프랑크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두 개 단체는 오랫동안 미묘한 긴장관계를 이어왔다. 둘 다 홀로코스트의 교훈을 널리 새기고 다양한 교육 및 자선활동을 편다고 말한다. 공익을 내세우는 둘 사이의 해묵은 긴장은 결국은 경제적 이해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홀로코스트 희생자 안네를 내세워 누가 더 많이 돈을 챙기는가다.

네델란드 '안네 프랑크 하우스'는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아있다. 연간 수입이 4000만 달러(540억 원)이 넘는다고 알려진다. 2019년 130만 명의 관람객이 들어왔고, 코로나 탓에 조금 주춤했다가 2023년 120만 명이 기념관을 둘러봤다. 1인당 성인 입장료가 16유로(2만 원쯤)이므로 박물관 입장료로는 결코 싼 편이 아니다. 안네의 아버지 오토는 '안네 프랑크 하우스'가 문을 여는 데 깊이 관여를 했으나 곧 손을 뗐고, 3년 뒤 스위스에 '기금'을 만드는 데 앞장섰다. 여기엔 결국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의 문제가 깔려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기금'은 'Anne Frank'를 고유한 브랜드를 상표등록하려 했다. 안네 프랑크라는 이름을 단 출판물, 교육자료, 연극과 영화, 이런저런 상품(굿즈)의 로열티를 챙기겠다는 발상에서였다. 이런 움직임은 암스테르담의 '안네 프랑크 하우스'에겐 큰 위협으로 여겨졌다. 스위스 '기금' 쪽에서 암스테르담에서 사용하는 콘텐츠의 수수료를 받아내려고 나서자, 갈등이 빚어졌다. '하우스' 쪽에선 "안네 프랑크라는 이름은 인류 공동의 기억이며 그 누구도 독점해선 안 된다"고 맞섰다.

상표등록을 둘러싸고 법정 다툼마저 벌어졌고 아직도 논란 중이다. 공식적인 법적 판결이나 합의가 이뤄졌다는 소식은 없다. 겉으론 공익을 말하는 두 단체의 미묘한 갈등은 홀로코스트 상업화의 그늘이다. 소녀 안네가 무덤에서 나와 말을 한다면 어떤 의견을 낼까. "나를 놓고 제발 이권다툼일랑 하지 마세요"라고 질타할 것이다.

▲ 베를린 시내에 있는 ‘안네 프랑크 센터’ 입구.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안네 프랑크 기념관처럼 입장료 수입이 짭짤하다. Ⓒ김재명

검증이 요구되는 증언 기록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남긴 증언록이나 회고록 가운데는 차마 믿기 어려운 내용들이 많다. 판매 부수를 올리려는 꼼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사기 마련이다. 홀로코스트 상업화의 부정적인 측면이다. 엄격한 검증이 요구되는 보기를 하나 들어보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다가 살아남은 프랑스 유대인 심 케셀(Sim Kessel)은 <아우슈비츠의 교수형(Hanged at Auschwitz)>(초판 1972)이란 책을 냈다. 그 책에 따르면, 심 케셀은 아우슈비츠에서 교수형을 받았으나 살아남았다고 했다.

직업이 권투선수였던 케셀은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2년 동안 몸담았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친위대에 붙잡혀 아우슈비츠로 이송됐다. 가스실에서 죽을 차례를 기다리던 중 동료 권투선수가 그를 빼내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수용소 탈출을 꾀하다 붙잡혀 교수형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바로 숨지지 않자 나치 경비대원은 총으로 그를 쐈다. 그런데도 기적적으로 그는 살아남았다고 한다. 죽을 고비를 넘겨 다행이긴 하지만, 독자들이 곧이곧대로 믿기가 힘든 얘기다.

케셀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관심을 끌고 책을 많이 팔려고 그런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케셀이 아우슈비츠 수감자였던 것은 사실이고 죽을 고비를 기적적으로 넘겼으니 다행이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아우슈비츠든 어디든 수용소에 있었다는 것을 내세워 상황을 크게 부풀려 없던 얘기를 지어내거나, 또는 수용소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사기꾼이 마치 홀로코스트 생존자인양 그럴듯하게 '소설'을 써서 이름을 알리고 돈을 챙기려 든다면 문제다. 그로 말미암아 속은 독자들은 진실을 못 듣게 되고, 홀로코스트 생존자나 유족들은 마음의 상처를 입기 마련이다.

또 다른 보기 하나. 기젤라 펄(Gisella Perl, 1907-1988)은 헝가리계 유대인 산부인과 의사 출신의 생존자다. 1944년 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뒤 그곳 '의사 수감자'로 일하면서 비밀리에 수백 명의 여성들에게 임신 중절을 해준 것으로 알려졌다(임산부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처형되거나 악명 높은 나치 의사 요제프 멩겔레의 가학적 실험에 희생되기도 했다).

펄은 1948년 미 뉴욕에서 펴낸 책 <나는 아우슈비츠의 의사였다>(I Was a Doctor in Auschwitz)에서 아기를 밴 여자들이 난폭한 경비대원들로부터 무참하게 두들겨 맞으며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바로 가까이에서 봤다고 썼다. 그런 뒤로 죽음의 공포감을 느끼기보다는 삶의 의지를 굳게 다지는 계기가 됐다고 하니 좋은 일이지만, 펄이 남긴 기록들은 매우 자극적이다.

[그들(임산부들)은 곤봉과 채찍으로 얻어맞고, 개들에게 물어 뜯겼고,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려 다니면서 발길로 배를 걷어 차였다. 그러고 나서 여자들이 쓰러지자 산 채로 화장터의 불 속에 던져졌다. 나는 땅바닥에 못 박힌 채 움직이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달아나지도 못 하고 서 있었다. 그러는 동안 공포감은 서서히 반감으로 바뀌었다. 이 반감은 나의 무력감을 떨쳐내고 타는 것 같은 삶에 대한 욕망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살아남아야만 했다](Gisella Perl, <I Was a Doctor in Auschwitz>, International Universities Press, 1948, 80-81쪽).

기젤라 펄은 "내가 살아남아야 내 손으로 다른 수감자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썼다. "뾰족한 수가 없다면 뱃속의 아이를 사산시켜서라도 임산부를 살리고 싶다"고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잠시 생각해보자. 여자를 화장터 불길에 던져 넣었다는 등의 서술은 너무나 끔찍하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자주 일어나기나 했을까 의구심이 들 만하다.

나치 독일의 폭력성을 강조하느라 사실을 부풀리거나, 서로의 암묵적 양해 아래 출판사가 가필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독일 역사가 안드레아 루도프(프리츠 바우어 연구소 연구원) 같은 이들은 기젤라 펄이 멩겔레의 아우슈비츠 의학연구실에 함께 있지도 않았다며 책 속의 일부 증언에 의구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변태적 성적 고문 그린 '문학 사기꾼'

나치 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증언은 언제 누가 들어도 높은 관심과 긴장감을 일으킨다. 죽음의 수용소에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나름의 극적인 요소를 지녔다. 그런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에겐 "당신은 데이비드 어빙을 닮은 나치 홀로코스 부정론자냐?"는 삿대질이 쏟아지기 십상이다(데이비드 어빙에 대해선 연재 120 참조). 문제는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삼아 뭔가를 써내면 돈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용한 사기꾼들이 슬며시 홀로코스트 산업(holocaust industry)에 끼어든다는 점이다.

'홀로코스트 문학 사기꾼' 가운데 폴란드 유대인 저지 코진스키(Jerzy Kosinski, 1933-1991)를 뺄 수 없다. 그가 밝힌 이력에 따르면, 폴란드 우치에서 태어났고 6살 때인 1939년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으로 부모와 헤어져 전쟁고아처럼 여기저기 떠돌았다. 전쟁이 끝난 뒤 실어증에 걸린 상태에서 부모와 극적으로 다시 만났다. 그 무렵 우연한 사고로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됐고, 우치대학교를 졸업한 뒤 24살 때인 1957년 서류를 위조해 폴란드에서 미국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영어를 못했던 코진스키는 트럭운전사 등으로 고된 육체노동을 하면서 영어를 익힌 뒤 작품을 내기 시작했다. 포드재단의 장학금으로 폴란드 바르샤바대와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밟기도 했다. 그러면서 '조셉 노박'이란 필명으로 수필집과 소설 등을 써내 '스타 작가'로 이름을 얻게 됐다. 그가 쓴 소설 <계단>은 전미도서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사실들이 하나둘씩 드러났다.

특히 코진스키의 자전적 기록을 담은 <색칠 당한 새>(Painted Bird, 1965)가 도마 위에 올랐다. 그는 전쟁 중 유대인 부모와 헤어져 전쟁고아로 살았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쟁 내내 부모와 함께 지냈다. 폴란드 농부들이 그의 가족이 유대인임을 알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숨겨주었는데도, 그의 자전적 기록에는 그 폴란드 농부들이 사디스트 성향을 지닌 반유대주의자로 그려졌다. 문제의 책 <색칠 당한 새>에서 특히 독자들의 눈길을 끈 대목은 폴란드 농부들의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성적 고문이었다.

<색칠 당한 새>는 베스트셀러로 각종 문학상을 받았고, 여러 나라 말로 번역 소개돼 대학교 문학수업의 필수 교재가 됐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책 내용은 사실이 아니었다.그의 상상 속 창작품이었다. 글 가운데 상당 부분은 영어권에 알려지지 않는 폴란드 책 내용을 표절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영어를 잘 하는 폴란드 출신의 대필 작가를 고용했다는 의혹도 따랐다. 심장이 좋지 못했던 데다 표절 의혹에 휩싸이자 끝내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죽고 4년 뒤인 1995년 영국 BBC 다큐의 제목이 '섹스, 거짓말, 저자 코진스키'였다(진실성이 의심받는 작가의 책인데도 국내에는 여러 권의 번역본이 나와 있다).

▲ 베를린 ‘안네 프랑크 센터’ 내부. 홀로코스트 교육장으로 쓰이는 이곳엔 해마다 많은 청소년 관람객들이 몰려든다. Ⓒ김재명

독일인의 가학성 강조한 '가짜 유대인'

유대인이 아닌데도 유대인인 척 하며 돈을 번 작가도 있다. 홀로코스트 기념문학상과 전미유대인 도서상, 쇼아 기념상 등을 받은 <파편들: 전쟁기 어린 시절 회고록>(Fragments: Memories of a Wartime Childhood, 1995)의 작가 벤저민 윌코미르스키(Binjamin Wilkomirski, 1941-)다. 이 증언 작품도 <색칠 당한 새>처럼 말을 못하는 고아가 뒤늦게 자신이 유대인임을 깨닫는 '외로운 소년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그려냈다.

<파편들>엔 수용소를 지배하는 나치의 잔혹함이 강렬하게 묘사돼 있다. 친위대 소속 경비대원들은 하나같이 미치광이 같은 가학적 인물로 나온다. 수용소에서 태어난 아기의 두개골을 깨트려 죽이는 악마처럼 그려졌다(홀로코스트 연구자들이나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경비대원들이 실제로 모두 사디스트는 아니었다. 가학 성향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책에선 독일인의 가학성이 두드러져야 잘 팔린다고 믿었기 때문일까, 윌코미르스키의 책에는 광신적 반유대주의자들이 넘쳐난다.

진실을 밝히자면, 윌코미르스키는 유대인이 아닐뿐더러 수용소 근처에도 간 적이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내내 그는 스위스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의 책 내용이 워낙 충격적이었다. 세 살 때 수용소 경비원의 팔을 입으로 물고 내동댕이쳐지지 않게 매달렸다고 한다. 세 살 아이의 턱 힘이 경비원을 맥 못 추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발가벗긴 채 독가스로 죽은 시신들이 콘베어 벨트에 실려 시신 소각실로 옮겨질 때 그 위에 던져졌지만, 불에 타 죽기 바로 앞서 누군가의 손에 들려져 살아남았다는 대목도 눈길을 끈다.

"홀로코스트를 도둑질했다"

<파편들>에 담긴 이런 얘기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나치의 잔혹성에 치를 떨게 하기에 충분했다. 홀로코스트 문학의 고전으로 격찬을 받았고, 10여개 국가의 언어로 번역됐다. 윌코미르스키의 책이 불티나게 팔리면서, 유대인 사회는 그를 이용해 후원금을 더 많이 받아내려 했다. 미 워싱턴에 본부를 둔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미국 곳곳에서 기념 강연회를 열어 기금 마련 기회로 삼았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홀로코스트 박물관도 마찬가지로 그를 강연자로 모셔 후원금을 챙겼다.

언젠가 진실은 드러나는 법이다. 미 지식인들이 많이 보는 주간지 <뉴요커>는 1999년 6월 '기억 도둑'(Memory Thief)이란 제목 아래 "홀로코스트를 도둑질했다"면서 윌코미르스키의 사기성을 폭로했다. 문제가 되자 독일 출판사는 "윌코미르스키는 유대인 고아가 아니다. 스위스 태생이고 본명은 브루노 도에세커"라고 밝히면서 서점가에서 그의 책들을 거두어들였다. 그런데도 정작 당사자는 "내가 바로 벤저민 윌코르미스키란 말이요!"라고 버텼다. 홀로코스트의 상업화 이용에 비판적인 유대인 연구자 노먼 핀켈슈타인에 따르면, 홀로코스트 연구의 선구자로 꼽히는 라울 힐베르크(1926-2007)는 윌코르미스키를 받아들이고 이용해온 유대인 사회를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라울 힐베르크 같은 저명한 역사가들은 초기부터 윌코미르스키의 <파편들>을 사기극으로 못 박았다. 힐베르크는 그의 거짓이 드러난 뒤에도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이런 책이 출판사에서 회고록으로 출간될 수 있을까? 어떻게 미국의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과 명망 있는 대학들이 윌코미르스키를 초빙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출간을 위해 홀로코스트 자료를 평가하면서 질적인 관리가 이처럼 부실할 수 있었을까?](노먼 핀켈슈타인, <홀로코스트 산업>, 한겨레신문사, 2004, 100쪽).

▲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책들. 왼쪽부터 <안네의 일기>, <색칠 당한 새>, <파편>. 오른쪽 두 권의 책은 거짓투성이로 드러났다.

"나치 잔혹성 알렸으니 그걸로 됐다"

윌코미르스키의 사기성이 드러난 뒤로 유대인 사회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많은 유대인들에게 윌코미르스키가 사기꾼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전쟁 중에 스위스 별장에 있었는지 수용소에 있었는지는 문제가 안 됐다. 그가 지어낸 나치의 잔혹성, 유대인의 고난이 대중에게 알려졌으니 그걸로 됐다는 식이었다.

예루살렘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인 야드 바셈의 관장 이스라엘 구트만은 한술 더 떴다. "그는 사기꾼이 아니다. 그런 이야기를 자신의 영혼 깊숙한 곳에 담아두고 있는 사람이고, 그의 고통은 진실한 것"이라고 감쌌다(노먼 핀켈슈타인, 101쪽). 앞의 독일 출판사와는 달리, <파편들>을 처음 펴낸 미국 출판사 발행인(유대인)은 "우린 이 책을 소설로 분류해 다시 출판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진실보다 돈이다. 홀로코스트의 상업화 변질을 보여주는 사례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은 이런 사기극이 드러날 때마다 환호성을 지른다. "그것 봐라! 내가 뭐랬어? 홀로코스트는 사기라고 했잖아!"라는 식이다. 누군가의 거짓말이나 사기가 홀로코스트의 진정한 희생자와 그 유족들에게는 2차 가해라는 아픔을 안겨 준다. 홀로코스트의 진실성을 의심 받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의 상업화 흐름이 낳는 부작용이다.

흥미로운 것은 홀로코스트 사기극을 벌여 돈을 챙기려던 이들은 사과를 하면서도 하나같이 궁색한 변명을 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잊어가는 것 같아 그랬다"는 투다. "솔직하게 말해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 그랬다"며 용서를 비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출판사의 대응도 문제다. 거짓이 드러나면 서점가에서 책을 회수하고 폐기해야 마땅한데도, 표지갈이만 해서 '소설'로 장르를 바꿔 다시 내보내곤 한다. 그들에게 홀로코스트는 그럴듯한 고상한 의미나 교훈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돈벌이 수단일 뿐이다. 다음 주에 홀로코스트 산업의 문제점에 대해 좀 더 살펴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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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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