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날 바보로 취급해달라'는 박근혜

[기자의 눈] 유권자는 '금치산자'의 푸념을 들을 의무가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씨의 잘못을 인정하고, 본인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는 모양새다. 예측됐던 상황이다.

박 대통령은 '바보의 길'이냐, '국정 책임자'의 길이냐, 갈림길에서 전자를 택했다. 박 대통령은 스스로 '바보'가 돼야 한다. 그게 '피의자'로서 방어권을 행사하는 길이다. 이런 상황을 접하게 된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간 박 대통령의 행동을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다만 무척이나 슬픈 일이다.

박 대통령이 최근 청와대 참모들에게 "나와 눈도 못 마주치던 사람이었는데, 대체 어떻게…"라고 푸념을 했다고 한다. 또한 박 대통령은 탄핵 직후 주변 사람들에게 "최 씨는 내 시녀같은 사람인데, 그런 사람 때문에 나라가 이렇게 됐다"는 말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박 대통령은 최 씨에게 배신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면서 "너무나 기가 막히고 억울하다는 취지의 언급을 여러 번 했다"고 말했다. 그런 사람이 지난 4년간 청와대를 들락날락했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08년 청와대 양식 조리장에 발탁돼 2016년, 올해 6월 말까지 근무한 전 청와대 조리장 한상훈 씨의 증언에 따르면 "청와대에서 나오기 직전까지도 최 씨가 매주 청와대를 출입"했다고 한다. "매주 일요일이면 (1인분 이상 음식을 마련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도 증언했다. 4년 가까이 대통령 최순실의 배신을 몰랐다는 말을 어느 누가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이 됐나, 자괴감이 든다"는 말이 유명해진 이유가 있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 직을 '쟁취'한 것으로 보고 있다.

상식적으로라면 "국민들이 이런 꼴을 보려고 나를 대통령으로 선택해줬나, 자괴감이 든다"라는 문장이 돼야 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대통령 직을 본인이 "됐다"고 생각하고 있다. '적극적 행위로 그 자리에 드디어 올라섰다', '숱한 역경을 딛고 내 능력으로 고지에 깃발을 꽂았다' 이런 의미다.

이런 인식을 가졌으니, '최순실에게 농락당했다'는 발언도 가능하다. 어디 감히, 일개 "시녀"에 "눈도 못 마주치던" 최순실이라는 사람이 '나의' 대통령직을 능멸하다니.

박 대통령의 고백들을 종합하면 "그래서 최순실을 처벌해야 한다. 나는 최순실이라는 티를 떼 내면 여전히 대통령직을 쟁취한 사람 그대로다"는 의미로 들린다.

박 대통령은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본인 스스로 잘못을 깨닫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기대다. '촛불 민심', 그리고 '여론조사'를 토대로 가늠할 수 있는 그 민심은 일찍이 이런 상황을 간파했다. 그래서 탄핵을 요구했다. 국회는 뒤늦게 탄핵을 받아들였고, 박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끝장냈다. 헌법재판소 심판이라는 법적 절차가 남았지만, 정치적 사형 선고는 형태상으로 이미 완결됐다.

최순실 씨와 박 대통령의 관계를 유권자들이 뻔히 아는데, 박 대통령은 '바보'의 길을 스스로 택했다. 이것만큼 자괴감을 들게 하는 말이 없다. 대통령의 고백을 그대로 믿는다면, 그는 물증으로 드러난 안종범 전 수석비서관,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에 대한 지시의 의미조차도 알고 있지 못한 것 같다. 박 대통령이 일개 기업의 CEO였다거나, 예를 들어 돌아가신 아버지를 '교주'로 둔 사학의 이사장 같은 직책에 있었던 상황이었다면, 그래서 사기꾼에게 속은 것이라면 그나마 인간적인 이해를 구할 수는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 구성원들에게 중죄를 저지른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박근혜의 죄는 그가 대통령이었다는 점이다. 본인만 스스로 '쟁취'했다 생각한 것이지, 대한민국 유권자라면 어느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자리다. 유권자들은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당사자다. 그리고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만인지상 국정 운영 주체였다. 그런 사람이 본인의 입으로 시녀에게 당했다느니, 눈도 못 마주쳤던 사람에게 당했다느니 하고 아무렇게나 내뱉는 푸념을 왜 유권자들은 듣고 있어야 하는가. 2012년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표 수가 1570만 표다. 1570만 명을 이렇게 모독해야 하나?

박 대통령은 2차 가해를 하고 있는 중이다. 더이상 헌법을, 그 헌법이 규정한 대통령직을 그가 모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떳떳하게 알았지만 손을 쓸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게 맞다. 유권자는 자신들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금치산자가 된 모습을 볼 의무가 없다. 책임 지느니 바보가 되겠다는 길을 택한 그를 보며 든 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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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열

정치부 정당 출입, 청와대 출입, 기획취재팀, 협동조합팀 등을 거쳤습니다. 현재 '젊은 프레시안'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쿠바와 남미에 관심이 많고 <너는 쿠바에 갔다>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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