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인공지능 개발 역시 가속도가 붙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기후변화든 인공지능이든 모두 일자리 축소로 이어질 것이라고 한다. 이미 곳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고, 적지 않은 이들이 벌써부터 암울한 미래를 기정사실화하며 패배의 분위기에 젖어든다. 인류 역사에서 처음 겪는 변화 앞에서 노동조합 같은 '낡은' 무기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선고에 감히 맞서는 목소리를 듣기 힘든 형편이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의 전부는 아니다. 이 그림에서 벗어나는 현실은 없다고 철석같이 믿게 하려는 체제 측의 온갖 전략에도 불구하고 틈들은 있다. 아니, 지금도 곳곳에서 틈새를 열려는 노력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노력들은 '틈이 있음'을 알아봐주는 눈길이 쏠리는 것만으로도 전에 없던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틈을 벌리려고 분투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같은 시도에 나선 동시대인의 모든 움직임을 빠뜨리지 않고 주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지금 이탈리아에 바로 그런 이들이 있다. 벌써 2년 전에 네오파시즘을 계승한 극우 포퓰리스트 정부가 들어선 나라에서, 드라마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며 새로운 길을 찾아 과감히 발을 뗀 이들이 있다. 대규모 감원에 맞서 장기 투쟁을 이어가면서 노동자가 주도하는 생태 전환의 생생한 사례를 만들어내려 하는 GKN 노동자들이다.
노동 탄압용 대량해고에 맞서 공장을 점거하다
무대는 피렌체 시에서 20km 떨어진 소도시 캄피 비센조(Campi Bisenzio)다. 이탈리아 중부의 다른 많은 소도시처럼 이곳에서도 대다수 일터는 종업원이 5인을 넘지 않는 작은 사업장이다. 하지만 저 유명한 자동차회사 피아트(FIAT)가 오래 전에 설립한 'GKN 드라이브라인' 공장은 예외다. 이 공장에서는 수백 명의 노동자가 액슬 샤프트[차축] 같은 자동차 부품을 생산해왔다.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피아트가 1994년에 공장을 영국 업체 GKN에 매각하고 2018년에는 다시 GKN이 기업구조조정 전문 투자기업 멜로즈(Melrose)에 인수되는 우여곡절 속에서도 노동자들은 묵묵히 차량 부품을 제작했다.
그러나 2021년 7월 9일, 이 일상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됐다. 이날 GKN의 캄피 비센조 공장 노동자들은 이메일로 대규모 감원 계획을 통보 받았다. 구조조정 대상에는 422명의 직접고용 노동자만이 아니라 80명의 하청 노동자(청소, 경비, 식당 등)도 포함되었다. 구조조정 사유는 전기차 생산으로 전환하고 공정을 디지털화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생산성 문제"가 확인됐고 이에 따라 유휴인력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였다. 더구나 구조조정 계획 발표 시점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2020년대의 첫 두 해에 이탈리아 역시 팬데믹의 격랑에 휩쓸렸다. 당시 연립정부를 이끌던 '오성운동(M5S)' 소속 주세페 콘테 총리는 비상조치 중 하나로 해고 중지령을 내렸다. 팬데믹이 끝날 때까지 정리해고를 일체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오성운동'은 이념, 정책이 모호한 포퓰리즘 정당이었지만 콘테는 중도좌파 성향이 뚜렷한 인물이었고, 이후 콘테가 주도하는 '오성운동'은 점차 좌파로 기울었다.
한데 비상시기에 단행한 이 제한적인 조치마저 자본에게는 참을 수 없는 굴레로 다가왔다. 해고 중지령은 재계와 주류 언론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됐다. 그리고 마침내 2021년 벽두에 연립정부가 무너지고 전 유럽중앙은행 총재 마리오 드라기를 총리로 내세운 테크노크라트 정부가 들어섰다. 드라기 정부는 해고 중지령을 연장하길 거부했고, 이에 따라 다시 정리해고를 할 수 있게 되는 시점이 2021년 7월 1일이었다. GKN 사측은 해고 중지령이 시효를 마감하기만 기다리다 전광석화처럼 감원 계획을 발표했던 것이다.
그러나 GKN 노동자들은 대량 해고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만 하지는 않았다. 이탈리아 노동법에 따르면, 기업은 감원 계획을 발표하고 75일이 지난 뒤에 이를 실행할 수 있다. 50일 뒤에 정리해고를 실행할 수 있게 되어 있는 한국에 비해서는 조금이나마 더 여유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GKN 노동자들은 단 하루도 기다리지 않았다. 회사로부터 이메일을 받은 그날, 400여 명의 노동자가 20여 명의 경비업체 용역들을 뿌리치고 공장을 점거했다.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은 '영구 총회'를 선포했다. 이것은 한국의 1987년 노동자대투쟁만큼이나 거대한 대중파업운동이었던 1969년 '뜨거운 가을' 이후 이탈리아 노동운동에 자리 잡은 투쟁 전술이다. 사업장 안에서 노동자 총회를 개최할 수 있다는 노동법(전 세계에서 가장 친노동적이라는 이 노사관계법 자체가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노동자투쟁의 성과다) 조항에 따라 '무기한 총회'라는 이름으로 점거파업을 이어가는 것이다. 동시에 GKN 노동자들은 사측의 감원 계획을 '부당 해고'로 법원에 제소했다.
GKN 노동자들이 이렇게 발 빠르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공장별 단결모임(Factory Collective, 이하 '단결모임')'이라는 조직을 이미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7년에 사측이 주말 근무 방침을 제시하자 GKN 노동자들은 치열한 내부 논쟁을 거친 뒤에 강경반대파를 중심으로 교섭대표를 교체하고 별도로 단결모임을 결성했다. 이탈리아 제1노총(CGIL) 산하 금속노조(FIOM)를 통해 사측과 교섭하되 기업 내 조직인 단결모임을 따로 만들어 사측에 맞서는 현장 내 대항력을 확보한 것이다.
이후 GKN 노동자들은 단결모임을 통해 투쟁의 기풍을 다졌다. 주말 근무 방침을 철회시킨 것은 물론이고 일부 하청 직무를 직접고용으로 전환시키기도 했다. 또한 공장 담벼락 바깥으로 뻗어 나가는 연대에도 앞장섰다. 특히 노동법의 사각지대로 남아 있으며 대개 이주민으로 이뤄진 영세 섬유업체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어쩌면 GKN 경영진을 좌우하는 멜로즈 자본이 굳이 캄피 비센조 공장에 해고 공세를 퍼부은 진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적자를 내기는커녕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지원금까지 받아 값비싼 새 기계들을 들여놓은 공장을 놀려둘 만큼 소중한 그 이유란 십중팔구, 지난 한 세대 동안 후퇴를 거듭해온 이탈리아 노동계급에게 '안 좋은' 선례가 되고 있는 GKN 노동자들을 무릎 꿇리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GKN의 감원 계획이 "노동조합을 공격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부당 해고'에 해당한다는 법원 판결이 이를 확인해준다.
"아래로부터의 재산업화"를 위한 녹색 전환 계획
그날 이후, 캄피 비센조의 GKN 공장에서는 더 이상 액슬 샤프트 제품이 나오지 않는다. 대신, 법원 판결로 시간을 번 노동자들은 차가운 기계 옆에서 다른 일들로 분주해졌다. 우선 이들은 '노동자 맥주'라는 이름으로 수제 맥주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지극히 전통적인 생산물이었고, 여러 모로 액슬 샤프트보다는 지구에 덜 해로운 제품이었다. 또한 이는 점거파업 중에 공장을 춤과 음악, 빵과 포도주로 가득 채웠던 1936년 여름 프랑스 노동자들의 기억을 되살리는 장면이기도 했다.
공장 문은 닫히기는커녕 오히려 전보다 더 활짝 열렸다. 단결모임은 자신들의 투쟁에 '인소르자모(Insorgiamo, "봉기하자!")'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 '인소르자모' 운동에 공장 담벼락 바깥의 수많은 민중을 초대했다. 피렌체 인근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곳곳에서 투쟁의 대의에 공감하는 이들이 GKN 공장을 방문했다. '순례' 행렬이 이어졌고, 대규모 연대 시위도 수시로 개최됐다. 피렌체 시가 나치 독일 점령군에게서 해방된 8월 11일에는 파업 지지 시위대가 1944년 당시 봉기의 시작을 알렸던 베키오궁의 종을 다시금 울렸다.
그러고 나서 3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에 GKN은 캄피 비센조 공장을 멜로즈의 기업 인수 자문역이었던 인물이 이끄는 업체에 매각했고, 새 소유주는 공장 재가동을 위한 노사협상에 진지한 경영 계획이라고 하나도 내놓지 못하면서 정부 지원금만 챙기려 들었다. 노동자들은 법원으로부터 한 번 더 해고 집행 유예 판결을 받아내 어찌어찌 이 긴 시간을 버텨냈다. 100명이 훨씬 넘는 동지들이 생계 문제 탓에 대열에서 이탈해야 했지만 말이다.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장면들도 있다. 이탈리아 특유의 노동법 덕분에 점거파업이 지금까지 3년 넘게 지속될 수 있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또 다른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다. 3년의 시간 동안 단결모임은 원직 복직에만 모든 것을 걸지는 않았다. 애초에 GKN 사측이 내세운 정리해고 사유는 "전기차 생산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유휴인력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생산의 '전환'이 근거였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하고, 그 결론을 뒤집길 바랐다. "대량해고를 필요로 하지 않는 '다른' 전환은 있을 수 없는가? 있다면, 그 구체적인 방향은 무엇인가?"
실은 40여 년 전에도 같은 고민을 한 노동자들이 있었다. GKN과 마찬가지로 영국 업체이고 생산품도 역시 자동차, 항공기 부품이었던 '루카스 에어로스페이스'의 노동자들이었다. 이들도 1970년대 중반에 회사로부터 대량해고 계획을 통보 받았고, 이에 맞서려 했다. 루카스 노동자들은 판로가 막힌 기존 제품 대신 대안적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고용을 지키려 했다. 그래서 현장 노동자들의 지혜를 짜 모아 '루카스 플랜'이라는 대안생산계획을 수립했다. 이들이 제안한 대안 제품은 오늘날 누구나 필수품이라 인정하는 태양광 패널, 풍력 발전 터빈 같은 것들이었다. 마거릿 대처의 보수당 정부에 의해 이 계획은 결국 묵살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루카스 노동자들의 꿈이 헛되이 사라져버린 것은 결코 아니다. 한 세대 뒤에 GKN 캄피 비센조 공장 노동자들 사이에서 이 꿈은 되살아나고 있다. 점거파업이 시작되고 반 년 정도 지난 2021년 12월에 단결모임은 대학의 연구자들과 함께 과학기술위원회를 설립해 생산품목 전환 계획을 짰다. 초기에 타진한 것은 개인 승용차가 아닌 대중교통용 전기차와 그린 수소 생산용 기계를 제작하는 방안이었다. 로봇 생산 연구기관이나 직업훈련기관으로 전환하는 방안도 검토됐다. 이런 방안들은 GKN 공장을 국유화하거나 최소한 공공이 상당한 지분을 소유하는 기업으로 전환하는 것을 전제했다.
하지만 정치 상황이 너무 나빠졌다. 2022년 9월 총선으로 조르자 멜로니 총리의 극우 연립정부가 들어섰다. 국유화나 공공 투자의 꿈은 이제 접어야 했다. 그렇다고 대안 기업으로 나아가려는 희망 자체를 접을 수는 없었다. 단결모임은 "아래로부터의 재산업화"라는 표어 아래 과학기술위원회를 재편하고 좀 더 실현 가능성이 높은 품목에 주목했다.
그 첫 번째는 화물 운송용 자전거(cargo bike)다. 일찍이 이반 일리치가 공생공락(conviviality)을 실현할 교통수단으로 주목한 자전거에 개인 사업자나 일반 가정을 위한 물품 운송 기능을 더한 것이다. GKN 노동자들은 기존 설비로만으로도 곧바로 생산에 돌입할 수 있는 화물 운송용 자전거의 시제품을 두 대 선보였고, 이 모델은 자전거 전문 저널에 소개돼 호평을 받았다. 이 자전거의 생산에 착수할 경우에 고용될 수 있는 초기 인원은 110-120명으로 평가된다.
두 번째는 태양광 패널과 배터리다. 이를 위해 단결모임은 2022년 12월부터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는 스타트업 기업 한 곳과 협의에 들어갔다. 이 스타트업 기업은 콩고 등 남반구 국가들에서 노예노동으로 채굴되는 리튬, 실리콘, 코발트 없이도 작동되는 태양광 패널을 연구, 개발하고 있다. 단결모임은 이 기업이 개발한 기술을 바탕으로 캄피 비센조 공장에서 대안적인 태양광 패널과 배터리를 생산하려 한다. 또한 이들은 공장 전체를 태양광 발전소로 만들어 생산에 필요한 모든 전력을 자체 생산하고 남는 전력을 지역사회에 제공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이 모든 계획을 실현하려면, 결국 돈이 필요하다. 국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된 GKN 노동자들은 파업 동지의 생계 지원을 위해 시작한 상호부조사업에서 힌트를 얻었다. 단결모임은 수많은 시민의 성금과 출자를 바탕으로 공장을 인수하여 노동자 협동조합으로 재출발하기로 결정했다. 마침 이탈리아에는 노동자의 기업 인수를 지원하는 법률이 이미 존재한다(1985년에 제정된 Marcora law). 단결모임은 이를 근거로 2023년 3월에 공장 인수를 위한 크라우드펀딩 캠페인을 개시했고, 2주만에 1억 원 가량을 모았다. 모금 사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기후위기 대응을 중심으로 대안생산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GKN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투쟁뿐만 아니라 기후운동의 열렬한 투사가 됐다. 지난 2년 동안 피렌체의 기후운동 시위는 항상 젊은이들과 GKN 파업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역으로, 국제적인 청년 기후운동 단체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s for Future)'은 GKN 공장 인수를 위한 크라우드펀딩 캠페인의 주된 협력자다.
"최근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한 노동자 투쟁"
GKN 노동자들의 공장점거 파업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300여 명의 노동자가 이탈리아 역사상 최장기라 할 투쟁을 이어가는 중이다. 달리 말하면, 투쟁의 결말이 여전히 열려 있다. 단결모임이 공장 인수에 성공해 대안 품목을 생산하는 노동자 협동조합이 출범할 수도 있고, 끝내 실패해 어디에서나 으레 그렇듯 공장 부지가 부동산 투기용으로 팔려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펼친 투쟁만으로도 충분히 높은 평가를 받을만하다. 단결모임의 지도자 다리오 살베티(Darioi Salvetti)가 자평한 것처럼, "최근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한 노동자 투쟁"이다.
무엇보다 지난 두 세기 동안 노동자 투쟁이 도달한 가장 높은 수준의 이상과 실천이 이 투쟁을 통해 한꺼번에 부활하는 광경은 놀랍기만 하다. 캄피 비센조 노동자들의 오랜 선조인 토리노의 피아트 노동자들이 100년 전인 1919-1920년에 감행한 선구적 공장점거, 마치 축제와도 같았던 1936년 프랑스의 점거파업 물결, 루카스 에어로스페이스 노동자들의 대안생산계획 수립, 가장 최근에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전개된 아르헨티나와 그리스의 노동자 자주관리기업 실험 등등, 이 모든 기억이 기후위기와 기술 변화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현재순간으로 되살아난다.
여기에서 우리는 문명의 붕괴를 재촉하는 자본주의의 시간이 우리에게 허용된 유일한 시간이라는 숨 막히는 현실이 어쩌면 파열될 수도 있음을 감지한다. 200만 당원을 자랑하던 공산당도, 20세기 후반에 가장 전위적인 좌파였던 아우토노미아 그룹도 더는 그대로 이어지지 않는 이탈리아이지만, 이들의 시간들은 결코 헛되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의 숱한 위기들에 감히 맞서기로 한 이들 사이에서, 그런 노동자들의 결단과 역량 속에서 그 시간들은 동시에 돌연 부활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때에, '유일한' 시간으로 강요되던 자본주의의 지배와 위기의 시간은 비로소 무너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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