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도, 안철수도, 억울하지 않다

[기자의 눈] 촛불, 정치의 역할을 묻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앞둔 '정치의 주'가 시작됐다. 오는 9일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표결될 국회 본회의까지 팽팽한 긴장감이 이어질 것이다. 지난 주까지 '촛불 민심'을 앞에 놓고 혼란에 빠졌던 야권도 자세를 다잡고 있다.

지난 주 야권이 직면했던 문제는, 대통령이자 동시에 피의자인 박근혜가 11월 29일 3차 대국민담화에서까지도 '자진 하야' 입장을 명확히 밝히지 않으면서 시작됐다. 야당은 '스스로 내려오지 않겠다면 탄핵해 주마'라고 나섰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12월 2일 탄핵안 표결 처리 여부를 놓고 야권 내에 이견이 생겼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은 지난 2일 본회의에서 탄핵안을 표결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국민의당은 '9일에 하자'고 맞섰다. 결국 신문과 뉴스는 '국민의당 반대로 2일 탄핵 처리 불발'이라고 제목을 뽑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국민의당은 '탄핵 반대 세력'으로 지목됐다.

탄핵안 표결을 2일에 할 것이냐, 9일에 할 것이냐를 놓고 '언제 하는 게 가장 가결 가능성이 높으냐'의 이치를 따진 게 '탄핵 반대'로 매도된 것에 안철수·박지원 등 국민의당을 이끄는 의원들은 억울해했다. 심지어 현재 국면에서 보면, 9일로 하는 게 결과적으로 나았다. 지난 주말의 거대한 230만 '촛불 민심'을 보고, 흔들리던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들이 '박근혜가 4월 하야 일정을 밝혀도 탄핵에 동참하겠다'고 밝히고 나선 것이다. (☞관련 기사 : 먼길 돈 非朴 "찬성표 35~40명" 낙관)

국민의당에 비판적이었던 조국 교수조차 "안철수 의원과 국민의당, 억울한 점이 있다"며 "국민의당은 계속 퇴진·탄핵을 주장해 왔다"고 페이스북에 썼다. 대표적인 '2일 표결파'였던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도 "국민의당이 '탄핵 반대'로 몰린 것은 저도 굉장히 억울하겠다고 생각한다. 국민의당이 탄핵에 반대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 지난 일이지만, 지난 주에 국민의당은 왜 '9일 표결'을 주장했나? 이들의 주장은 이랬다.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려면 200표가 필요하다. 그런데 야당 소속 의원이며 야권 성향 무소속 표를 다 합쳐도 171석에 그친다. 29명이 모자란다. 이 격차를 메우려면 새누리당 비박계의 동참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비박계는 11월 29일 박근혜의 3차 대국민담화를 보고 흔들리고 있었다. '스스로 내려오겠다는데 탄핵부터 밀어붙이는 건 부담스럽다. 대통령이 진퇴 문제를 국회에 논의해 달라고 했으니, 1주일을 시한으로 일단 여야 협상을 하자. 만약 친박계 여당 지도부가 무리한 요구를 해서 12월 8일까지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9일 탄핵 표결에는 참여하겠다'는 게 당시 알려진 비박계의 입장이었다. 그러니까 시간을 두고 이들을 설득해서 동참하도록 하는 것이 탄핵이라는 중대 거사를 성사시키는 유일한 '현실적 방법'이라는 게 국민의당의 주장이었다.

그러면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은 왜 '2일에 그냥 하자'고 주장했나? 지난 주 시점에서 이들은 3일 촛불집회에 무려 232만 명이 참석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만약 촛불집회 인원 수가 줄어들면, 비박계의 동요는 더 심해질 거라고 이들은 봤다. 비박계 내에서도 김무성 의원 등 일부는 '여야 간 대통령 사퇴 일정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도, 대통령이 4월에 물러나겠다고 공식 발표하면 탄핵에 동참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빠져나갈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 9일에 해도 부결 가능성이 높은 것은 마찬가지라고 이들은 봤다. 게다가 민심은 박근혜가 대통령직을 하루라도 더 유지하는 것에 대해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만약 2일에 표결을 했을 때 비박계가 동참하지 않아 탄핵이 무산되면 그것은 비박계를 포함한 새누리당 전체가 책임을 질 일이 된다. 그러면 '촛불 민심'과 함께 새누리당을 압박하는 길로 나가는 게 '국민의 명령'을 따르는 야당으로서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가결 가능성을 좀더 높이기 위해 이치를 따진 국민의당이나, 촛불 민심에 좀더 충실하게 호응하고자 했던 민주당·정의당이나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다. 대의민주제를 채택한 한국에서, 정치란 △유권자의 요구를 반영해 △현실을 바꿔 나가는 것이다. 국민의당은 '현실'에, 민주당은 '유권자의 요구'에 좀더 중점을 뒀다.

왼손은 거들 뿐


다 지난 일이라면서도 지난 주의 논란에 대해 길게 설명한 것은 이유가 있다. 야당이 이같은 혼란에 빠진 것은 '민심의 요구'를 모순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현재 국면에서 정치의 역할이 무엇이냐는 질문과도 연관된 부분이다.

민심은 대통령의 '즉각 하야'를 요구한다. 그런데 '하야'는 제도적으로 보장된 방법이 아니다. '어떠어떠한 경우에 대통령은 하야해야 한다'는 법 규정 같은 것은 없다. 제도적 방법은 탄핵뿐이다. 그런데 탄핵은, 설사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다고 해도 대통령이 좀더 버틸 수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또 낙관적 관측에서도 1월 말까지, 비관적으로 보면 최장 180일 동안 진행될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박근혜가 하루라도 빨리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기를 원하는 입장이라면, 오히려 '탄핵 따위 절차는 필요 없다. 국회의원들도 전원 광화문으로 나와 박근혜 즉각 퇴진 요구에 동참하라'고 요구하는 게 논리적으로 맞다. '2일에 탄핵안을 표결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은 이와는 전혀 다른 맥락이다.

그런데 지난 3일 전국 촛불집회에서는 '2일 탄핵안 표결을 성사 못 시켰다'는 이유로 제도 정치권 거의 전체가 난타를 당했다. 안철수는 대구 촛불집회에 나갔다가 "안철수는 빠져라"는 등 야유를 듣고, 사회자로부터도 "흔들리지 말고 탄핵에 나서라"는 당부까지 받았다. 문재인도 애초 광주 촛불집회에 참석해 발언을 할 예정이었으나, 탄핵 표결 연기에 실망한 주최 측이 '정치인들의 자유 발언을 제한하겠다'고 나서 준비했던 발언을 하지는 못했다. 다만 문재인은 집회 사회자와의 인터뷰 형식으로 말할 기회는 주어졌다.

이를 모순이라고 본다면, 사실 황교안 총리 문제도 마찬가지다. 촛불집회에서 확인된 민심 중 하나는 황교안이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는 것은 용납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면, 황교안은 직무 대행을 맡게 된다. 일각에서는 '탄핵부터 하고 총리를 바꿔도 된다'고 주장하지만, 대통령 직무 대행자인 총리가 자신의 후임자인 차기 총리를 임명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대부분의 법률 전문가들은 부정적으로 본다. 직무 대행은 현상을 유지·관리하는 업무만 할 수 있고, 인사 등 새로운 일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이런 점 때문에 '황교안 대통령 직무대행' 사태를 크게 우려하는 몇몇 야당 의원들이 '탄핵을 하더라도 총리부터 바꿔 놓고 하자'고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이들은 '박근혜·새누리당과 총리 자리 놓고 협상이나 하는 정치꾼'들로 찍혔다.

개헌 문제도 그렇다. 지금 국면에서 개헌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것이라는 데에는 야권과 시민사회는 대체적으로 의견 일치를 봤다. JTBC 뉴스 인터뷰에서 개헌을 언급한 박지원은 대번에 조리돌림 수준의 욕을 먹었다. 하지만 사실 문재인 등 대부분의 정치인들도 개헌 자체에는 찬성 입장이다. 다만 '대통령의 거취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개헌 등 다른 문제가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선을 긋고 있을 뿐이다. (참고로 박지원도 개헌을 '지금 당장 하자'고 주장한 건 아니었다.) 만약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이후라면? '대통령 거취 문제 해결'이라는 조건이 갖춰졌다고 판단한 정치인들 일부는 바로 개헌을 주장하고 나설 것이다.

나아가서는 차기 대선 문제 역시 그렇다. 야권 대선 주자들이 활발하게 나서서 발언을 하면 '자기가 대통령 되고 싶어 저런다'고 하고,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 답답하다며 '고구마'라는 조롱을 받는다. 문재인은 자신이 '고구마', 성남시장 이재명이 '사이다'에 비겨진다는 말에 "사이다는 금방 목이 마르다. 탄산음료가 밥은 아니다. 고구마는 배가 든든하다"(2일 TBS 라디오 인터뷰)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탄핵안이 가결된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각 정당은 차기 대선 준비를 할 수도 없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이상한 처지에 빠지게 된다." (5일 <한겨레> 성한용 칼럼)

이를 '모순'으로 인식한다면 그야말로 억울할 것이다. 하지만 냉혹하게 말하자면, 이것을 '억울하다'고 받아들이면 정치인 자격이 없다. 대선 주자라고 불리는 '큰 정치인'들은 이미 민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안철수는 5일 밤 JTBC <뉴스룸>에 나와 '우리는 9일 표결을 주장했을 뿐 탄핵에 반대한 적이 없다'고 변명하지 않았다. 대신 "미숙했다.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문재인은 같은 날 밤 '국민과 함께하는 여의도 촛불' 집회에 나와 "황교안 총리는 권한대행을 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라고 밝히면서도 "총리 문제 때문에 탄핵을 늦춘다든지 탄핵 전선을 혼란스럽게 할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 '억울'한 것은 정치가 아니라 민심이라는 것을. 대통령은 저렇게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이 추운 겨울날에 232만 명이 거리로 나왔는데도 왜 물러나지 않는지 촛불을 든 대중은 '억울'하다. 그러면 국회라도 나서서 당장 대통령을 끌어내려 주면 좋겠는데, 표결도 다음 주에야 한다고 하고, 국회에서 가결돼도 최소 두 달은 가야 헌재가 결정을 내린다니 이것도 억울하다. 기껏 탄핵이 가결돼도 직무대행이 황교안이라니 너무나 억울하다.

헌법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정하기는 했지만, 주권자의 의사를 표현할 방법은 사실 4년마다의 총선, 5년마다의 대선 이외에는 광장에서 촛불을 드는 정도밖에 없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국민소환제 등의 보완 장치가 있었거나, 정당이 본연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억울하게도'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정리하자면, 대중이 '즉각 하야'를 요구하는 지금 국면에서 탄핵 등 제도정치적 방안은 '거들 뿐'이다. 대통령이 끝까지 버틸 경우를 대비한 일종의 '보험'인 셈이다. 만약 탄핵안이 가결된 이후에도 촛불 민심이 사그라들지 않는다면, 민심은 제도 정치를 통한 탄핵을 보조적 수단으로 격하시키고 직접적 행동을 통해 대통령의 사퇴를 계속 압박하는 길로 나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일견 모순돼 보이는 민심의 질타도 이해가 된다. 어차피 보조적 수단에 불과한 탄핵마저도 제대로 못 한다면, 도대체 정치의 역할은 뭐냐는 것이다.

제도정치에 대한 민심의 신뢰는 이미 너무나 낮은 상태다. 5일 발표된 '리얼미터' 조사에서, 민주당과 국민의당의 정당 지지도는 동반 하락했다. 이들이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잘못하고 있다'는 응답을 하는 90%(갤럽 조사), 하야·탄핵해야 한다는 80%(중앙일보 조사)의 여론을 대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정당 정치의 전통이 취약한 한국의 상황까지 감안하면, 이들 80%의 유권자들이 문제 해결을 정치에 믿고 맡길 만한 명분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9일 탄핵안 표결은 '최소한'이다. 정치가 유권자들의 억울함을 풀고 싶다면, 탄핵안을 우선 가결시키고 봐야 한다.

이후에도 대선주자 개인의 이해관계, 각 정당 간의 경쟁관계를 앞세워서는 난망하다. 여야 대선주자 지지도를 다 합쳐도 80%가 안 된다. 야권 대선주자 문재인·안철수·이재명·박원순·손학규 등의 대선주자 지지도를 다 합쳐도 60%가 안 된다. (11월, 갤럽 조사) 이들이 모두 나서서 손잡고 뭔가를 같이 한다고 해야 '촛불'이 지지를 보낼 최소한의 조건이 만들어지는 정도일 것이다. 억울하다는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 "요즘 정치권은 겨우 가능한 것만 하고 있지만 진짜 정치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이 대학교 졸업 연설에서 했다는 말이다.

다만 이들 정치인들을 부리는 '주인'의 입장인 유권자 대중도, 스스로의 요구를 현명하고 지혜롭게 표현할 수 있다면 물론 더 좋을 것이다. 만화 <슬램덩크>의 유명한 대사다. "왼손은 거들 뿐." 현재 국면에서 지금까지 정치는 '왼손'의 역할에 머물고 있다. 힘을 빼야 한다. 반면 골을 넣는 것은 오른손이다. 겨냥을 정확하게 하고, 힘차게 던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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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훈

프레시안 정치팀 기자입니다. 국제·외교안보분야를 거쳤습니다. 민주주의, 페미니즘, 평화만들기가 관심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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