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탄핵, 조건은 무르익었다

'100만 촛불집회', 비박까지 탄핵 동조…민주당은?

지난 12일 1987년 6월 항쟁과 맞먹는 인파의 광화문 촛불집회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민심이 확인됐다. 미국의 정치학자 에리카 체노웨스(Erica Chenoweth)가 20세기 시민혁명 사례 323개를 분석한 데 따르면 국민의 3.5% 이상이 시위에 참여한 경우, 그 시민혁명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100만 명이면 국민의 2%다. 우리의 경우, 그에 근접해 가고 있다. 우리 국민의 3.5%는 175만 명이다.

여기, 과학적이지는 않지만 몇 가지 고무적인 사실들이 흩어져 있다. 당시 광장에 없던 시민들은 오후 7시부터 3분간 소등하는 것으로 집회 참석을 대신했다. 촛불집회 상황을 생중계하는 매체들의 트래픽은 폭등했다. 전국에서는 비공식적으로 수많은 집회가 열렸다. 무엇보다 당일 촛불집회 인근 도심 지하철 이용자는 172만 명을 기록했다. 평시보다 100만 명가량이 늘었다고 하지만, 평시 지하철 이용자의 마음을 다 읽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처럼 국민적 열망이 무르익은 만큼, 이제 탄핵 절차에 돌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박근혜 아바타' 총리 교체 후 탄핵정치적 요건은 무르익었다

그간 제기돼 왔던 '탄핵 반대론'의 요체는 이렇다. 새누리당 의원들의 반대로 탄핵안 가결 자체가 불가능하고, 탄핵 이후 대통령 직무를 '박근혜 아바타' 황교안 총리가 이어받을 것임이 분명하며, 탄핵에 이은 헌법재판소의 결정까지 정국 혼란 상황이 지나치게 길어질 것이라는 이유였다.

몇 가지 상황 변화가 있다. 먼저 지난 12일을 기점으로 새누리당 비박 진영의 태도가 변했다는 것이다. 김무성 전 대표는 13일 새누리당 비박 진영이 주최한 비상시국회의에 참석해 "국민의 이름으로 탄핵의 길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 참석한 현역 의원 수만 해도 42명이다. 새누리당 비박 진영이 탄핵의 운을 띄운 상황이라 더불어민주당의 부담은 가벼워졌다. 부결되더라도 새누리당 책임론이 부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야권 성향 의원들을 모두 합하면 171명이다. 비박 진영에서 29명만 참여하면 탄핵은 가능하다. 현 상황이 지난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당시의 상황과 비교 불가라는 점도 작용한다. 노 전 대통령 탄핵과 달리 박 대통령은 구체적인 범죄 행위에 연루돼 있다. 오는 19일로 예상되는 검찰의 중간 수사 결과 발표 때 박 대통령의 범죄 연루 여부가 최 씨 공소장에 기재될 경우 탄핵 정국은 급물살을 탈 수도 있다.

'박근혜 아바타'로 불리는 황교안 국무총리가 대통령직을 승계하도록 돼 있는 부분도 조정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새 국무총리를 먼저 내세운 후 탄핵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날 언론 인터뷰에서 "황교안 총리가 재임하면 중립거국내각이 아니고, 박근혜 대통령 정권의 연속"이라며 "탄핵을 위해서도 시일이 필요해 먼저 대통령의 탈당을 기초로 해서 3당 대표들과 영수회담을 통해 중립적인, 능력 있는 총리가 합의 결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탄핵 추진에서 완료까지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일단 19일 검찰의 중간 수사 결과가 나오면 본격적으로 추진될 박 대통령에 대한 특검 도입이 시급해 보인다. 지금 상황에서도 박 대통령 주변에서는 증거 인멸이 이뤄지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26일에 예정된 두 번째 대규모 민중총궐기대회도 '탄핵 모멘텀'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탄핵 절차에 착수하면 일은 다소 복잡해진다. 특히 12월은 예산안 정국과 맞물려 있다. 탄핵안 발의를 위해 비박 진영과 의견 및 시점을 조율하는 과정 역시 따져봐야 한다. 황교안 총리 후임 인선도 완료해야 한다. 탄핵안을 처리했다고 하더라도, 헌법재판소 결정에 걸리는 시간을 6개월 정도 잡으면 내년 중반쯤에나 박 대통령의 거취 관련 최종 결론을 낼 수 있다.

현재 대안은 별로 없다. 박 대통령이 하야를 완강히 거부하며 "탄핵할 테면 해 보라"는 태도로 나오는 이상, 헌법이 명확히 절차를 규정하고 있는 탄핵 외에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이미 대통령 탄핵을 진행해 봤기 때문에 그에 관한 사례들도 축적돼 있다. 2004년 상황에 비한다면 시행 착오나 정국 혼란도 최소화할 수 있다.

추미애의 '알파고 한수'일까?'추미애 리스크' 재현되나?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현재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결국 더불어민주당이다. 국민의당은 수차례 박 대통령 탄핵 가능성을 내비쳤고, 새누리당 내 비박 진영에서도 탄핵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더불어민주당의 발걸음이 현재로선 가장 느리다. 2004년 '노무현 탄핵 정국'에 대한 '트라우마'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새누리당 비박 진영이 탄핵을 요구하고 나섰지만, 당내에서는 여전히 '부결 공포'가 있다"고 토로했다.

이런 가운데 추미애 대표가 14일 박 대통령에게 영수회담을 전격적으로 제안한 배경을 두고 여러 추측이 나오고 있다. 민주당 관계자는 이번 영수회담 제안의 성격을 "최후 통첩"으로 규정했다. 최종적인 협상안을 제시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곧바로 행동에 돌입한다는 의미다. 국민의당, 정의당의 반발을 무릅쓰고 독자 행동에 나선 것도 탄핵 절차 돌입을 이미 상정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즉 '탄핵 반대론자'들을 설득할 '명분 쌓기'라는 것이다. 또한 탄핵에 미온적인 민주당 내부 기류 변화의 '모멘텀'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이는 추 대표의 도박이다. 일각에서는 '추미애 리스크'의 악몽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다. 지난 2009년 환경노동위원장을 지내던 시절 비정규직 법안을 새누리당과 단독처리해 역풍에 직면했던 사례가 있다. 대표 취임 직후 전두환 전 대통령 예방을 추진하다 거센 역풍에 부딪힌 적도 있다. 이번에도 추 대표의 사실상 독단적 행동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박 대통령과 회동 자리에서 어정쩡한 협상안을 받아쥐고 온다면 추 대표의 리더십은 통째로 흔들리게 된다. 야2당과의 공조를 깨뜨렸다는 책임도 온전히 추 대표의 몫이 된다. 무엇보다 회동이 정치적 실패로 돌아갈 경우, 촛불 정국 속에서 박 대통령의 살길을 터줘 시민들의 투쟁 동력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비난도 그가 감당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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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열

정치부 정당 출입, 청와대 출입, 기획취재팀, 협동조합팀 등을 거쳤습니다. 현재 '젊은 프레시안'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쿠바와 남미에 관심이 많고 <너는 쿠바에 갔다>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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