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1일 게시판엔 '퇴사자' 명단이…

[작은책] 노동과 삶·② 기자 출신의 강남 월급쟁이

"하나만 생각해. 치열하게 살지 않기 위해 서울을 떠난 건지, 제빵사가 되기 위해 서울을 떠난 건지."

네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조언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정답을 몰라서 고민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 왠지 저 위에 내가 쓴 말을 자꾸 읽어 보게 된다. 낱말 한둘만 바꾸면 바로 내 얘기가 되기도 하니까.

매달 1일에는 회사 그룹웨어 게시판에 인사발령 공고가 떠. 내 생각에 그룹웨어 게시물 가운데 제일 열독률(?) 높은 게시물이 아닐까 싶어. 특히 관심 있는 건 '퇴사자' 명단. 대개 누가 나간다고 하면 환송회도 해 주고 미리 인사들을 하기 마련이지만, 간혹 '깜짝 퇴사'를 하는 사람도 있거든.

지난달에는 A 대리가 퇴사를 했더군. 공고가 나기 일주일 전쯤에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카더라' 소문이 돌았는데, 정말이었어. 환송회도 없이, 아는 사람들한테만 비밀리에 인사하고 떠난 모양이야. 회사에서는 약간 '모난 돌' 같은 캐릭터였기 때문에 이런저런 의혹들이 생겼는데, 아무도 속 시원히 말해 주는 사람은 없었지.

30대 남자들끼리 아주 가끔 술을 한 잔씩 하는데, 나랑은 그런 자리에서 한두 번 정도 얼굴 본 사이였어. 다만 올해 초였나, 술자리에서 A 대리가 했던 얘기가 잠깐 다시 생각날 뿐이었어.

"최 대리님(그때는 대리였어), 근데 왜 최 대리님은 아무것도 안 해요? 난 기대했는데."

술이 그렇게 많이 취한 것 같지는 않았고, 웃으며 얘기하긴 했지만 꽤 진지했지. 뭘 기대했다는 건가 의아했는데, 곧이어서 얘기하더군.

"최 대리님은 노동 쪽에서 왔잖아요. 진보 언론 기자였고. 우리 회사에서 노동조합도 만들고 우리 같은 사람들 위해서 뭔가 좀 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물론 정확한 말은 아니야. 기억을 최대한 살려서 쓴 거지. 원망하는 말투는 분명 아니었고, 웃으면서 이야기했어. 내가 노동자 잡지와 진보 성향의 신문사에서 왔다는 걸 알거든. 그래서 내가 회사에서 뭔가 '노동 쪽'으로 움직일 거라고 기대했나 봐. 노동조합도 만들고 회사에 좀 대들기도 하고 그럴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나는 뭔가 장황하지만 아무 알맹이도 없는 대답을 한 것 같아. '예스'도 아니고 '노'도 아니지만, 뭔가 지금까지 계속 '노'로 남아 있는 대답.

우리 회사에는 노동조합이 없어. 노동문제에 대한 이슈가 없어서 노동조합이 없는 건지, 노동조합이 없어서 이슈가 안 생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법을 대놓고 어기지는 않겠다는 회사와, 이 정도라도 법을 지키면 된 거 아니냐는 직원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타협을 유지하고 있다고나 할까.(회사에서 만든 '페이퍼 노조'(이름만 있는 노조)가 있다는 말도 있고.)

하지만 그렇다고 불만이 없을 수는 없지. 가장 큰 건 야근이야. 먼저 쓴 편지에서도 몇 번 얘기한 것처럼, '저녁이 없는 삶'은 우리한테 일상이지. 오죽하면 한 달에 하루 정시에 퇴근하는 날을 '패밀리 데이'(family day)라고 정해서 기념일처럼 챙기겠어.(그마저도 눈치 보여서 안 지키는 사람들 때문에 이 소박한 기념일도 없어질 것 같아 불안해.)

직장인들이 익명으로 회사 '뒷담화'를 올리는 스마트폰 앱이 있다는데, 거기 우리 회사 직원들이 올리는 글은 열에 아홉이 야근 이야기래.

"21세기의 직원들에게 20세기의 임원들이 19세기의 노동강도를 강요한다."

정확한 것은 아닌데, 언젠가 페이스북에 어떤 기사를 공유하면서 쓴 말이야. 한국 노동자들의 기나긴 노동시간에 대한 기사 아니었을까 싶어. 그런데 당시 회사 대표님(지금은 대표가 바뀌었어)이 댓글을 단 거야. '그걸 그렇게만 볼 게 아니다'라는 요지로.

놀랐지. 댓글 내용은 별로 놀랍지 않은데, 직원의 페이스북에 대표님이 직접 댓글로 의견(감정은 섞이지 않은 점잖은 의견이었어)을 달았다는 게 놀라웠지. 내 계정을 팔로우하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뭘 얼마나 보고 있는지는 신경 안 썼거든. 나를 직접 이 회사에 채용했고, 초고속 승진(특혜라고 여겨질 만큼)을 시켜줄 정도로 나와 우리 팀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 나를 편하게 생각해서 댓글을 단 것 같아. 나도 그동안 어렵게 생각하진 않았는데, 그 뒤로는 어려워졌어.

최근에는 포괄임금제에 대한 기사를 페이스북에 공유한 적이 있어. 대기시간과 근로시간을 엄격히 구분하기 어려운 감시단속직 노동자 등이 아닌 경우, 대개의 일반 사무직 노동자들에게 포괄임금제로 야근수당을 '퉁 쳐서' 주는 건 불법이라는 기사였지. 우리가 그래. 연봉 계약서에는 야근수당이 얼마라고 딱 정해져 있어. 그런데 그게 실제로 받아야 할 야근수당보다 적을까 많을까? 상상에 맡길게.

그 기사를 페이스북에 공유하는데, 문득 주저하게 되더라. 공유 버튼은 눌러놓고, 뭐라고 써야 하나 생각했어. 내 페이스북을 누군가가 보고 있을 것 같은 생각 때문에. '노동 쪽 출신 최 대리는 왜 아무것도 안 할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보고 있을 것 같고, '야근을 그렇게만 볼 게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보고 있을 것 같고. 그래서 나는 결국 '일단 공유'라는 쓰나 마나 한 네 글자만 남겼을 뿐이야.

그래도 우리 회사는 "상대적으로 괜찮은 편"이라는 말, 직원들 사이에서도 종종 들어. 맞는 말이지.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 앞에는 어떤 말들이 붙기 마련이야. "야근을 많이 시키지만 상대적으로 괜찮은 편", "월급을 안 올려 주지만 상대적으로 괜찮은 편", "모성보호는 안 해 주지만 상대적으로 괜찮은 편", "성과연봉제는 도입했지만 상대적으로 괜찮은 편" 이런 식이지.

대체 그 '상대'가 되는 회사는 얼마나 나쁜 회사인 거야? 그럴 때 모두가 동일한 상대를 기준으로 판단하라고 법을 만들어 놓는 건데, 어째 이럴 때는 법이 참 멀고도 멀다. '엄정한 법질서'라는 말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만 적용되고 근로기준법에는 적용이 안 되는 건가? 상대적이라는 말, 생각할수록 참 편리한 말인 것 같아.

A 대리는 결국 그 술자리에서 내가 한 장황하고 모호한 말만 기억한 채 회사를 나갔어. 그리고 나는 이 편지에 또 그 장황하고 모호한 대답을 반복한 셈이고. 페이스북에는 기껏 네 글자를 남겨 놓고, 애꿎은 편지에는 괜한 분통을 터뜨리고 있잖아. 부당함을 모른 체하지도 않지만 부당함에 맞서 싸우지도 않는 상태. 더 비겁한 사람보다는 덜 비겁한 상대적 비겁함. 나도 매일 이렇게 '상대적'이라는 말 뒤에 숨고 있어. A 대리는 대체 왜 회사를 나갔는지, 나중에라도 꼭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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