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의 포스트 시즌, 한국판 '피버 피치' 그려질까

[이종훈의 영화 같은 스포츠] '엘롯기 동맹' 극복한 LG의 가을 야구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어바웃 어 보이>의 원작자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 닉 혼비가 쓴 <피버 피치(Fever Pitch)>는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축구팀 아스널을 광적으로 사랑하는 열혈 축구팬의 사랑과 삶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 자전적 소설이다. 이 소설은 두 가지 버전의 영화로 제작됐다. 하나는 데이비드 에반스가 감독해 1997년 영국에서 개봉한 콜린 퍼스, 루스 겜멜 주연의 <피버 피치>다. 또 다른 하나는 2005년에 미국에서 개봉한 패럴리 형제 감독, 지미 펠론, 드류 베리모어 주연의 <피버 피치>(국내 개봉명은 '날 미치게 하는 남자')다.

전자는 거너스(Gunners: 아스날의 애칭)의 열혈 팬의 삶을 그린 닉 혼비의 원작을 고스란히 스크린으로 옮겼다. 반면, 후자는 남자 주인공을 거너스가 아니라, '밤비노의 저주'에 걸린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팀 보스턴 레드삭스의 열혈 팬으로 바꾼 리메이크작이다. 이런 종목 변경 때문에 영국에서 제작된 소위 '미국인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영화'는 미국으로 건너가 영국인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영화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두 가지 버전의 <피버 피치>를 보면서 "직장과 애인은 바꿀 수 있어도 응원하는 팀은 바꿀 수 없다"는 스포츠 광신도들이 영국과 미국, 나아가 전 세계에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1970~80년대 영국에서 아스널 팬으로 산다는 것과 1980~90년대 미국에서 보스턴 레드삭스 팬으로 산다는 것은 불행이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화려한 공격에 중점을 둔 팀이라는 평가를 받는 지금과 달리, 당시 아스널의 별명은 '지루한 아스널(Boring Boring Arsenal)'이었다. 소위 말하는 '뻥 축구' 외엔 할 줄 아는 게 없는 팀이었다. 성적도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세기말 보스턴 레드삭스 팬으로 지낸다는 것 역시 아스널 팬의 삶만큼 끔찍했다. 2004년 월드시리즈 우승 전까지, 이 팀은 스타들을 모아놓고도 매번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라이벌 뉴욕 양키스가 잘 나가던 것과 크게 대비됐다. 1918년 우승 이후 86년이나 이어진 '밤비노의 저주'에 팬들은 매번 쓴 눈물을 삼켰다. 시즌 내내 기쁨과 환호성보다는 실망과 한숨이 더 컸다.

팬은 '그깟 공놀이' 때문에 스트레스만 잔뜩 쌓이는 삶을 매년 반복해서 살아야 했다. 응원하는 팀은 오랜 시간 우승하지 못하면서 가끔은 다른 팀 우승의 들러리, 가끔은 승점 자판기로 전락했다. 팬은 주위 사람들에게 "왜 하필 그런 팀을 좋아해?"라는 비웃음 섞인 질문을 숱하게 듣는 삶을 감내해야만 했다. 더 무서운 건, 아스널과 레드삭스의 한심함 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는 날이 계속 되어도, 그들은 결코 팀을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닉 혼비의 표현처럼 '사슬에 묶인 운명'이기 때문이다.

▲ 영화 <피버 피치>(1997)의 한 장면. 영화에서 주인공 폴은 우연히 경기를 본 후 사랑에 빠져버린 아스널의 한심함에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을 어쩌지 못해 더 괴로워한다.

포스트시즌의 열기가 점점 뜨거워지는 지금 우리 프로야구에서는 LG 트윈스가 가을 야구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와 함께 LG의 가을야구를 상징하는 '유광잠바'의 물결 또한 거세지고 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LG선수들과 LG팬들이 유광잠바를 입을 기회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LG가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준우승을 차지했던 지난 2002년 이후 10년 동안 LG는 '엘롯기 동맹(2000년대 초중반 LG와 롯데, 기아가 만년 하위권을 형성해 만들어진 신조어)'이라는 비웃음 섞인 농담이 나올 정도로 우승은 고사하고 가을야구도 어려운 하위권 팀의 대명사였다. 이 시기 LG의 야구는 LG팬의 입을 더 거칠게 만들었다. 이에 더해 다른 팀 팬들은 LG 야구의 한심함을 비웃어 댔다. LG 팬들은 스트레스의 한계치를 연일 갱신하는 삶을 이어가야 했다. 결국 많은 LG팬이 유광잠바를 장롱 깊숙이 감춰두고, 음지로 숨어 들어갔다.

하지만, 아스널과 레드삭스 팬이 그랬듯이 LG 팬 역시 LG를 떠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매해 LG의 경기와 관련 뉴스를 챙겨보며 좌절하고, 정규시즌 후반 LG의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가 확정되면 '김성근의 저주'를 이야기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2003년부터 2012년까지 LG팬의 삶은 한국판 <피버 피치>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영국판 <피버 피치>는 1989년 아스널이 18년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미국의 <피버 피치>도 2004년 레드삭스가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86년만의 우승을 차지하며 끝난다. 2013년 LG가 정규시즌 2위로 11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을 때 LG팬들은 "김성근의 저주가 깨졌다"며 환호했다. 그들은 강산이 변하는 시간을 지나 유광잠바를 다시 입는 감격을 맛봤다. 그리고 올 시즌, LG는 정규시즌 후반기에 거침없는 9연승을 질주하며 극적으로 가을야구 티켓을 따냈다.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기아 타이거즈를 꺾은데 이어 준플레이오프에서 넥센 히어로즈까지 꺾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만나는 상대들을 연이어 격파했기 때문일까? 아직 NC 다이노스와의 플레이오프가 시작되기도 전인데도 불구하고 LG의 고참 불펜투수 이동현을 비롯한 LG 선수들은 1994년 우승 이야기와 2002년 한국시리즈 이야기를 꺼낸다. 설레발의 무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고참 선수들까지 이렇게 말한다. 자신감의 표출이다.

"난 오늘을 위해 18년을 기다렸어. 18년을!"

영국 영화 <피버 피치>에서 아스널이 리버풀과 18년만의 우승을 놓고 마지막 대결을 펼치기 직전, 주인공 폴(콜린 퍼스)은 차마 함부로 우승을 기대하지 못하리라는 불안함과 그간의 한이 뒤섞인 명대사를 내뱉는다. 닉 혼비의 원작 소설에는 없는 이 대사는 스포츠 팬의 정서를 응축해 보여준다.

"난 오늘을 위해 22년을 기다렸어. 22년을!"

LG팬들은 과연 이 말을 외칠 수 있을까? 흔히들 포스트시즌 경기에는 당일 선수들의 컨디션, 선수단 분위기, 부상자 등과 같은 경기 내부적 요인과 더불어 운과 '우주의 기운' 같이 예측 불가능한 온갖 변수가 존재한다고 한다. 때문에 그 누구도 포스트시즌 경기 결과를 정확히 예상할 수 없다. 오죽하면 미국 최고의 통계 분석가로 불리는 네이트 실버조차도 "포스트시즌 야구는 전쟁만큼이나 예측하기 어렵다"고 말할 정도다.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포스트시즌이 한국판 <피버 피치>로 만들어질지 궁금하다.

▲ 포스트시즌 플레이오프를 하루 앞둔 지난 20일 오후 경남 창원 마산종합운동장 올림픽기념공연장에서 열린 미디어데이. LG 유강남(왼쪽부터), 이동현, 양상문 감독, NC 김경문 감독, 이종욱, 김태군이 서로 승리를 다짐하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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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훈

제가 만난 스포츠 스타들은 셀 수 없이 많은 패배가 자신을 승리자로 만들어 줬다고 말합니다. [이종훈의 더 플레이어]를 통해 수많은 이들을 승리자로 만들어 준 '패배와 실패'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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