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레스트 검프> 같았던 레스터 시티의 우승 신화

[이종훈의 영화 같은 스포츠] 레스터, 축구의 새로운 승자

박태환 선수의 놀라운 복귀 무대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올 시즌 시작 전 "레스터 시티가 잉글리시 프리미어 무대에서 우승할 것"이라는 말을 믿은 사람이 지구상에 얼마나 있을까요.

스포츠 무대에서는 영화와 같은 일이 일어나곤 합니다. 스포츠를 인생에 비유하고, 스포츠에서 삶의 원초적인 영감을 얻는 이가 많은 이유는 예측할 수 없는 연극적 요소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란이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미국을 꺾은 경기는 자연스레 두 나라의 외교적 갈등과 겹쳐집니다. 이런 장면은 영화로도 못 만들 스펙터클을 주기 마련입니다.

스포츠 현장에서 일했고, <프레시안>을 비롯한 다수 매체에 오랜 기간 글을 쓴 이종훈 평론가가 새 코너 '이종훈의 영화 같은 스포츠'를 선보입니다. 독자 여러분께서 한 편의 영화와 스포츠 사건을 엮은 이야기에서 진한 휴머니즘과 깔끔한 삶의 지혜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이종훈의 영화 같은 스포츠'는 격주 금요일 발행됩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우리 선수들은 포레스트 검프와 같다. 천천히 대충 뛰는 레스터는 레스터가 아니다."

2015/2016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우승 팀이자 전 세계에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안겨준 레스터 시티의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의 말이다. 레스터 시티는 꼭 11개월 전만 해도 강등을 걱정하던 팀이다. 주전 선수 11명의 몸값을 다 합쳐도 손흥민(토트넘 홋스퍼)의 이적료 2200만 파운드를 약간 웃돈다. 이런 팀이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출범 후 여섯 번째로 우승컵을 든 승리자가 됐다.

영화에서 주인공 포레스트 검프는 뛰고 또 뛴다. 그는 아이큐 75에 불과하지만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생각으로 세상을 헤쳐 나간다. 베트남 전쟁에 같이 참전한 친구의 부탁으로 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새우잡이를 하고, 그렇게 번 돈을 전쟁에서 다리를 잃은 댄 중위에게 맡겨 애플 등에 투자해 큰 성공을 이룬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전자상거래 업체 알리바바의 창업자인 마윈은 한 강연회에서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거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음부터 고래잡이를 꿈꿔서는 돈을 못 번다. 하지만 포레스트 검프처럼 새우잡이의 꿈을 꾸준히 지키면 돈을 벌 수 있다."

포레스트 검프처럼 고래잡이가 아닌 새우잡이를 꾸준히 한 것, 이것이 레스터 시티 기적의 비결이다. 레스터 시티 선수들은 시즌 내내 라니에리 감독의 말처럼 전력을 다해 뛰고 또 뛰었다. 그들은 포레스트 검프처럼 화려한 공격에 집중하기보다, 런닝과 압박이라는 새우잡이를 했다.

FC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맨체스터 시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스날, 첼시, 위르겐 클롭 감독 부임 이전의 리버풀 등 이른바 빅 클럽들은 볼 점유율과 패스 성공률을 마치 진리인양 중요시한다.

팀이 공을 더 오래 소유하고, 더 정확한 패스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퀄리티가 높은 선수들, 즉 비싼 몸값의 선수들이 가득해야 한다. 이 선수들의 활약 여부에 따라 팀의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 바로 이것이 빅 클럽의 성공 방식, 고래잡이다.

▲ 레스터 시티는 '우승 못하는 명장' 라니에리 감독의 지휘 아래 주급 5만 원을 받던 7부 리그 출신의 골잡이, 이적료 7억 원으로 영입한 측면 공격수, 프로 입단 테스트에서도 탈락했던 미드필더로 팀을 구성해 몸값 수백 억 원에 달하는 스타가 넘치는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의 승리자가 됐다. 영화라고 이야기해도 믿기 힘든 신데렐라 스토리다. ⓒyoutube.com

하지만 레스터 시티는 이런 선수들로 팀을 채울 수 있는 클럽이 아니다. 유럽의 많은 중소클럽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다. 이들은 큰 돈을 들여 초호화 선수 영입 경쟁에 혈안이 된 빅 클럽들과 함께 고래잡이 경쟁에 뛰어들 것이냐, 아니면 고래잡이를 포기하고 새우잡이를 선택할 것이냐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들 중 일부는 어설프게 빅 클럽을 따라하며 고래잡이 시장에 참전한다. 하지만 레스터 시티나 (리그에서는 상대적으로 작은 덩치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같은 팀은 고래잡이를 포기하고 새우잡이를 선택한다.

라니에리 감독이 과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지휘한 영향인지 레스터 시티의 축구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축구와 유사한 점이 많다. 두 팀은 한물갔다고 평가받은 4-4-2 포메이션을 구사한다. 두 팀 모두 공을 가진 시간에 집착하지 않고, 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황의 플레이를 중시하며, 공을 소유하지 않고 승리하는 방식을 추구한다. 때문에 이 두 팀에 중요한 건 볼 터치 횟수와 패스 성공률이 아니라, 런닝과 압박이다. 빅 클럽이 보기에 라니에리 감독의 방식은 시대 흐름에 뒤처지는, 아이큐 75짜리 백치나 선택할 만한 허술하고, 낡고, 아름답지 못한 방식이다.

실제로 이번 시즌 레스터 시티의 볼 점유율은 44.7%로 50%가 채 안 된다. 볼 점유율면에서 본다면 레스터 시티는 프리미어리그 전체 20개 팀 중 18위로 강등권 수준이다. 패스 성공률 역시 70%에 불과해 리그 꼴찌다.

볼 점유율과 패스 성공률을 중요시하는 현대 축구의 시각으로 본다면 공을 소유하는데 집중하지 않고, 공이 있든 없든 오로지 뛰고 또 뛰는 레스터 시티는 참 폼이 안 나는 단순 무식한 팀이다. 비웃음을 사기에 딱 좋다. 하지만, 레스터시티는 맨체스터 시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스날, 리버풀, 첼시 등 소위 빅5를 모두 제치고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레스터 시티와 유사한 축구를 구사하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어떤가?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이 이끄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프리메라리가에서 리오넬 메시의 FC바르셀로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레알 마드리드라는 세계적인 거함들과 매 시즌 우승 경쟁을 이어간다. 퍼거슨, 무리뉴, 벵거 감독 등 세계적 명장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축구 경기"라고 입을 모으는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에 성공해 구단 역사상 최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놓고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와의 일전을 앞두고 있다.

유로파리그로 눈을 돌려보자. 이번 시즌 챔피언스리그와 유로파리그를 통틀어 비 스페인 팀으로는 유일하게 결승전에 오른 리버풀은 볼 점유율과 패스가 아니라 런닝과 압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위르겐 클롭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이후 확 달라진 팀이다.

이 모든 것이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낡고, 아름답지 못한 방식을 추구하는 팀들이 만들어낸 결과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와 레스터 시티의 우승을 보면서 남들이 보기에 초라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틈새를 선택하고, 그 안에서 우직하게 전력을 다해 뛰고 또 뛰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더불어 이번 시즌 레스터의 여우들에게 제대로 한방 먹은 유럽의 빅클럽들이 다음 시즌에는 어떤 전략과 반격을 보여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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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훈

제가 만난 스포츠 스타들은 셀 수 없이 많은 패배가 자신을 승리자로 만들어 줬다고 말합니다. [이종훈의 더 플레이어]를 통해 수많은 이들을 승리자로 만들어 준 '패배와 실패'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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