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어리그, 웰컴 투 '쪽박 월드'!

[이종훈의 멘붕 스포츠]<2> EPL와 대한민국 중산층, 과즙기 속 '오렌지'

축구,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사업

"당신이 만약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축구클럽의 구단주가 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참고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현재 세계 최고의 리그라고 불리며, 올해부터 2016년까지 향후 세 시즌 동안 TV 중계권료만으로도 5조400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수입이 들어올 예정이다. 이런 이유로 K리그와 한국의 스포츠 마케팅 종사자들에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선망의 대상이자 배워야 할 대박 성공 사례로 인식되고 있다.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가?

하지만, 이 꿈이 현실이 된다면 그 순간부터 당신은 과즙기 속에 들어가 껍데기만 남을 때까지 단물을 짜내야 하는 오렌지 신세가 될 것이다. 멘붕인가? 하지만, 이 말은 영국에서 맨몸으로 1조 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 영국 여왕으로부터 'Sir' 호칭을 부여받은 토트넘 훗스퍼의 전 구단주 앨런 슈거경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니, 믿어도 좋을 것이다.

프리미어리그의 구단주가 되는 일이 왜 과즙기 속에 들어간 오렌지가 되는 일일까? <사커노믹스>(사이먼 쿠퍼·스테판 지만스키 지음, 오윤성·이채린 엮음, 21세기북스 펴냄)의 한 구절을 빌리면, "축구는 돈을 벌 수도 없고, 돈을 벌어서도 안 되는,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사업"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당신이 프리미어리그 팬이라면, '축구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사업"이라는 이 말에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당신은 "중계권료로 5조4000억 원이 들어오고, 매 경기마다 경기장을 가득 메워주는 열혈 축구팬들이 넘쳐나는 프리미어리그가 돈을 벌 수 없는 곳이라니?"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앨런 슈거의 말을 빌리면, 방송국에서 프리미어리그에 돈을 얼마나 많이 줄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그 돈은 선수들의 주급으로 다 싸질러 버릴 돈이다. 그 돈은 당신과 당신의 구단이 잠시 맡아두는 돈이지, 결코 당신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높은 중계권료는 착시에 불과하다.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영국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인기팀이다. 맨유는 지난 17일(현지시간) 런던 업튼 파크 스타디움에서 열린 웨스트 햄과의 경기에서 2-2 무승부를 펼쳤다. 사진은 웨스트 햄의 앤디 캐롤(왼쪽)과 맨유의 레만자 비디치(오른쪽)가 공중 볼 다툼을 벌이고 있는 장면이다. 맨유는 한국시간으로 23일 오전 4시 예스턴 빌라와의 경기를 앞두고 있다. ⓒAP=연합뉴스

EPL, 적자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

"지난 시즌에 8개 구단이 흑자를 기록했다. 이들처럼 사업하듯이 축구단을 운영하거나, 분수에 맞게 운영하면 될 것 아닌가?"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흑자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 프리미어리그에서 분수에 맞는 운영을 하면서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 프리미어리그의 구조적 문제 때문이다. 프리미어리그에는 비록 팀이 재정적으로 파탄 직전이라고 할지라도 우승을 위해서 몇 백 억, 아니 몇 천 억을 쓸 때 비로소 "제대로 된 결정을 했다"고 말하며 열광하는 팬들과 미디어로 가득하다. 또 로만 아브라비치 첼시 구단주와 같이 우승컵만 가질 수 있다면 돈은 얼마든지 들어가도 좋다고 생각하는 라이벌들이 널려 있다.

이런 구조 아래서 합리적인 재정계획을 세우고, 분수에 맞게 축구 클럽을 운영한다는 것은 곧 선수 영입에 돈질을 아끼지 않는 라이벌 클럽들에게 밀려 더 낮은 성적을 기록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구단은 이를 감내할 수 있을지 몰라도, 팬과 미디어는 이를 감내하지 못한다. 따라서 팀 성적이 우승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팬들과 미디어 역시 해당 클럽과 멀어지게 되고, 그 결과로 클럽의 수입이 감소하고, 재정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 앨런 슈거 시절의 토트넘이 대표적인 사례다. 앨런 슈거는 사업적 마인드로 무장하고, 분수에 맞지 않는 비싼 선수 영입을 기피하며 합리적인 운영을 해 온 인물이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앨런 슈거가 토트넘 구단주 자리를 꿰차고 있던 1991년부터 1998년까지 프리미어리그는 입장 관중 수가 29%나 증가하는 황금기를 보냈지만, 토트넘은 오히려 같은 기간 입장 관중 수가 5%나 감소하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토트넘은 앨런 슈거의 사업적 마인드와 합리적인 재정지출 계획 덕분에 축구도 못하고, 사업도 못하는 2류 클럽으로 인식되었다.

이런 일이 몇 년간 지속되면, 구단주는 팬들과 미디어로부터 클럽을 매각하고 떠나줄 것을 강요당한다. 그리고 실제로 쫓겨나기도 한다. 자신이 투자한 돈을 모두 날리고, 빈손으로 클럽에서 쫓겨나 법정소송을 벌이고 있는 리버풀의 토마스 힉스 전 구단주처럼 말이다. 구단주의 입장에서 이런 일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돈과 신용이 모두 바닥날 때까지 선수와 에이전트에게 천문학적인 돈을 계속해서 퍼붓는 것뿐이다. 따라서 프리미어리그의 구단주가 된다는 것은 프리미어리그라는 과즙기 속에 들어가 선수들과 에이전트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달콤한 과즙과 단물을 모두 짜주고, 정작 자신은 껍데기만 남게 되는 오렌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프리미어리그 구단주가 된다는 것은 웰컴 투 '쪽박 월드'다.

대한민국 중산층, 또 다른 과즙기속 오렌지

프리미어리그의 이런 과즙기, 웰컴 투 '쪽박 월드' 구조는 대한민국 중산층이 살고 있는 구조와 매우 유사하다. 세계적인 컨설팅기업 매킨지가 지난 14일 발표한 '제2차 한국보고서 신(新) 성장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중산층들은 주택 구입 대출금을 상환하는 데 매달 막대한 돈을 지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더 많은 사교육비를 내고 있기 때문에 재무 상황이 극도로 악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살고 있다.

프리미어리그 구단주들이 새로 지은 홈구장 때문에 빚에 허덕이듯이, 대한민국 중산층은 어렵게 마련한 '마이 홈(My Home)'으로 인해 빚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 프리미어리그 구단주들이 부채로 인해 고통 받으면서도 '팬들을 위해' 선수들과 에이전트들의 호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준다면, 대한민국 중산층은 대출금 상환에 허덕이면서도 '자식들을 위해' 학원과 사교육 관계자들의 호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주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의 대한민국은 교육이 부와 계급을 대물림하는 도구가 되면서 자식 교육이라면 돈은 얼마가 들어도 아깝지 않다는 사교육판 '로만 아브라모비치'들을 양산하고 있다. 때문에 대한민국 중산층은 사교육비 영역에서 마치 프리미어리그 구단주들처럼 슈퍼 리치들과의 출혈 경쟁도 불사해야 하는 처지다. 덕분에 대한민국 중산층은 '다른 지출은 줄여도 사교육비만큼은 줄일 수 없다'는 각오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교육비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돈이 없어서 내 자식을 2류로 키우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불안감과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대한민국 중산층은 사교육이라는 과즙기 속에서 학원과 사교육 관계자들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달콤한 과즙을 모두 짜주고, 정작 자신은 껍데기만 남게 되는 과즙기 속 오렌지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젊은 세대가 출산을 포기하는 이유 역시 사교육비로 인해 껍데기만 남는 오렌지가 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나만 정신 바짝 차리고 살면 돼?

지금 프리미어리그에서는 무분별한 선수 영입에 따른 적자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구단주들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가장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는 클럽은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가 과즙기 속 오렌지 신세를 면키 어렵다는 위기감은 이제 세계 최고의 축구클럽이라고 불리는 맨유마저도 움직이게 만들고 있다. 동시에 맨유가 움직인다는 것은 조만간 프리미어리그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만드는 부분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과즙기 속에 갇혀 있는 대한민국 중산층에게는 아직 이렇다 할 변화의 움직임이 없다. 박근혜 정부가 남은 5년 동안 어떤 해법들을 내놓을지 모르겠지만, 주택과 사교육비 문제는 경제·일자리·교육·복지 등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와 맞물려 있는 것이라 딱 떨어지는 해법이 나오기는 어렵다.

그래서 모두들 말한다. '개개인이 정신 바짝 차리고 사는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이는 궁극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 프리미어리그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에 '나라도 정신 바짝 차리고 살자'는 생각은 앞에서 말한 앨런 슈거의 실패를 답습할 뿐이다. 결국 대한민국 중산층이 과즙기에서 벗어나려면, 지금의 프리미어리그처럼 구조를 바꾸려고 나서야 한다. 구조를 바꾸는 첫걸음은 과즙기 속 중산층이 정부와 사회를 향해 '아프다'고, '힘들어 못 견디겠다'고, '바꾸자'고 다 같이 함께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프리미어리그의 부자 구단주들도 지금 '아프다'고 소리 내어 말하고, '바꾸자'고 큰 소리로 외치고 있다. 이들보다 수천 배는 더 가난한 우리가 목소리를 내지 못할 이유는 없다.

스포츠평론가 이종훈은…

'무한경쟁과 승리의 스포츠'보다는 '힐링의 스포츠', '내가 응원하는 스포츠'보다는 '나를 응원해주는 스포츠'에 관심이 더 많은 자칭 비주류 스포츠평론가이다.

현재 MBC 라디오 <왕상한의 세계는 우리는>과 팟캐스트 <공짜 가라사대, 오빠가 쏜다!> 등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 위의 글은 <공짜 가라사대, 오빠가 쏜다!>의 코너인 [멘붕 스포츠]를 기사로 옮긴 것입니다. <공짜 가라사대>는 여행, 레저,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상품을 공짜로 나눠주는 팟캐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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