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것도 잠시. 산란실(?)에서 알을 품고 있는 어미 닭의 품에서 또다시 조그마한 병아리가 삐악거리며 나왔다. 와! 갓 태어난 병아리 새끼를 보다니. 아내도 신기해서 아이들을 부르고 아이들도 달려왔다. 아이들은 "어디? 어디?"라며 닭장 안을 기웃거렸지만, 병아리는 이내 다시 어미 닭의 품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거의 한 달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알을 품었던 결실을 드디어 본 것이다.
우리 집엔 까막돼지와 닭이 함께 산다. 물론 함께 산다는 것이 같은 우리에서 지낸다는 건 아니다. 철망을 옆에 두고 사이좋게 축사 한 칸씩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 잠깐! 흔히들 축사라고 하면 높고 넓은 축사를 떠올리겠지만 우리 집은 옛날 말로 돼지마구, 닭장 수준이다. 평수로 따져 봐야 아홉 평이 조금 넘는 공간이니까.
그곳에 까막돼지가 들어온 건 5월 29일. 어미젖을 떼고 며칠 지나지 않은 포동포동한 놈들이었다. 불알을 깐 수놈 한 마리와 암놈 한 마리. 지역에서 건강하게 돼지를 키우는 형님에게서 받아 온 놈들이었다. 그리고 수탉 한 마리와 암탉 네 마리가 우리 집에 들어온 건 6월 6일. 이렇게 자그마한 동물농장을 꾸리면서 산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돼지 밥을 주는 것. 그리고 돼지가 밥을 맛있게 먹는 동안 돼지마구로 들어가 똥을 치워 닭장으로 던져 준다. 그러면 닭들은 돼지 똥을 발로 헤집으면서 돼지가 미처 소화시키지 못한 청치(현미에 섞인, 덜 여물어 푸른 빛깔을 띤 쌀알)나 파리가 깐 구더기를 쪼아 먹곤 한다. 닭과 돼지를 함께 키운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작은 순환 때문이었다.
집에서 나온 음식물 쓰레기와 함께 쌀겨·보릿겨·깻물·발효한 청치를 섞어서 돼지의 밥을 주고, 돼지 똥은 다시 닭의 밥이 되고, 닭똥은 다시 퇴비가 된다. 그리고 사시사철 나오는 지역의 농산물은 훌륭한 간식거리가 된다. 참외, 오이, 복숭아, 단호박, 포도 껍질 등. 곶감을 깎고 난 감 껍질과 배추, 시래기 등이 끝나는 11월 말까지는 다양한 농산물 또한 버려지지 않고 돼지와 닭밥으로 사용한다.
이런 순환 농업을 시작하게 된 건 지역에 내려와서 지역의 형님(?)들을 만나면서 이런 농사를 알게 되었고, 단순하게 아이들에게 건강한 고기를 주고 싶었고, 또 조금이나마 동물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농작물을 키우는 것과는 다르게 동물을 키우면서 얻는 교감과 정서적 만족은 덤을 넘어서 가장 훌륭한 교육의 장이기도 해서다.
그 같은 생각으로 시작한 동물 기르기의 원칙은 간단하다. 정말로 키울 수 있을 만큼만, 그리고 내가 먹고 남는 것은 팔기보다 이웃과 지인들과 나눌 수 있을 만큼만 기른다는 것. 또 공장식 사료가 아닌 집에서 나는 것과 지역에서 나는 것으로만 만드는 자가 사료를 먹이는 것. 그래야만 다시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돼지와 닭 또한 공장식 밀식사육이 아닌 조금이나마 더 나은 환경에서 키우기 위해 흙바닥에서 충분히 흙을 파고 놀 수 있게 해 두었고, 사방은 뚫려 있어 환기가 잘되고 햇빛과 그늘을 적절히 선택할 수 있는 지붕재(材)를 골랐다. 닭은 아침이 오기가 무섭게 풀어놓고 따로 모이를 주진 않는다. 해 질 녘이 되어서야 닭장 안으로 들어가면, 그때 청치와 쌀겨·깻묵을 조금 섞어 준다.
작은 동물농장이지만, 집안에 이런 것들이 있어 정말 농장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아침마다 돼지 똥을 치우는 일은 어렵진 않지만 귀찮은 일이다. 닭을 함께 기르는 것도 그런 이유 중의 하나다. 달걀을 자급하는 것도 있지만, 돼지우리에 꼬이는 파리 떼를 청소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돼지우리 바로 옆에 있는 닭장 문을 열면, 닭이 돼지우리로 갈 수 있게 해 놓았다. 그리고 닭을 조금씩 몰아서 돼지우리에 넣었다. 그러면 닭들은 왕겨숯이 깔린 돼지 똥 자리(다들 아시겠지만, 돼지는 잠자리와 똥 자리를 확실히 구분한다)를 헤집으며 구더기를 쪼아 먹는다. 그런데 이 돼지란 놈이 심심한 지, 우리에 들어온 닭을 막 쫓아다닌다. 그러면 닭은 도망치다가 잠잠해지면 다시 똥 자리를 헤집고….
지난 6월 말, 그날도 그렇게 돼지우리 쪽으로 닭장 문을 열어 닭을 몰아넣고 나왔다. 그런데 오후 4시쯤인가. 아내가 심각한 목소리로 전화했다. "돼지우리 안에 닭이 죽어 있어."
달려가 보니 닭 한 마리가 죽어 있었고, 목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돼지가 자꾸 쫓아오고 괴롭히니까 달아나려다가 창살에 머리를 부딪쳐 뇌진탕(?)으로 죽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게 쓰러진 닭의 머리를 돼지들이 뜯어 먹었으리라 생각하니, 맘이 착잡했다.
동료 닭을 떠나보낸 후유증인지, 암탉 한 마리는 다음날부터 알을 품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말했다. "전쟁 통에 자식을 많이 낳은 것이나 흥부네가 자식들을 많이 나은 것이랑 비슷하지 않아?"라고. "죽음을 가까이서 본 녀석들이 필시 번식의 유전자를 발동하여 알을 품기 시작한 것"이라고. 아내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했지만, 어쨌든 내 맘대로 추측이라 검증받을 이유도 없었고 자연계의 누구라도 그렇게 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닭은 알을 품기 시작했다. 다른 녀석들이 나은 알도 자기 품속에 넣어 오랜 시간 식음을 전폐하며 새끼를 깐 것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새끼들을 키우다 보니, 당연히 실수가 생겼다. 알을 품으며 중간마다 다른 녀석들이 낳은 알까지 가로채서 품다 보니, 어느 것이 처음 것이고 어느 것이 섞여 들어간 것인지 분간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 나온 병아리는 병아리대로, 아직까지 품고 있는 달걀은 달걀대로, 어미 닭은 어느 것에도 집중할 수 없는 듯했다. 물론 어미 닭은 병아리가 위험에 처하면, 철저히 알은 버리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삐악 거리며 돌아다니고는 병아리를 다른 암컷이 콕콕 쪼아대며 물어가거나, 다른 닭에 밟혀 죽었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병아리는 그렇게 하늘로 가고, 그 후로 어미 닭은 남은 달걀을 포기한 채 닭장 밖 너른 풀밭에 심취해 버렸다. 결국 먹지도 못하고 부화가 되다 만 달걀은 또다시 돼지의 먹이가 되어 순환 경제를 이뤘지만 말이다.
흔히들 집에서 동물을 키우면 집에 매이기 때문에 여간 번거롭고 성가신 게 아니라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외박하는 일은 큰맘을 먹어야 하고, 끼니때가 되면 밥을 챙기고 똥 자리를 보고, 문도 확인하고. 그만큼 신경 쓰는 일이 없기도 하지만, 실제로 농사일에 비하면 들어가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식을 키우는 듯 묘한 만족감이 있다. 우리 집 꺼먹돼지는 우리 안에 들어가서 등이나 옆구리를 쓰다듬어 주면 벌렁 드러누워 눈을 감고 아주 편한 자세를 취하는데, 그걸 보고 있으면 자식들이 곤히 잠들어 있는 것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돼지의 쌍꺼풀은 어찌나 예쁘던지….
하지만 결국 저 녀석들은 언젠가 내 배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돼지를 키워서 잡아먹을 거라고 하니, 큰딸인 다경이가 말했다. "아빠, 돼지 잡아먹을 거면 우리 집에서 먹이지 마." 그러기에 나는 "왜? 너도 돈가스도 먹고, 고기도 먹잖아." 그러자 다경이 왈, "그 돼지랑 저 돼지는 다르잖아"라고 한다. 아내 역시도 정성스럽게 애지중지 키운 돼지를 잡아야 한다는 것에 벌써 걱정이 크다.
나도 다른 사람들이 돼지를 잡을 때 몇 번 따라다녔지만, 그때마다 주인장의 애처로움이 보였다. 나도 그럴 테지? 그렇지만, 그렇지만 말이다. 그렇게 '내 손으로 키우고 잡고 그러다 보면, 조금이라도 고기 섭취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우리, 그렇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렇게 조금씩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자급의 영역을 넓히고자 한다. 먹을거리부터 생활 기술, 문화, 교육 등으로…. 시간은 걸리겠지만, 모든 인간은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고 믿는다. 나도,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고만고만하게 굶어 죽지 않게 벌며 일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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