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섯 '흙수저'가 침팬지를 만났을 때

[월요일의 '과학 고전 50'] <인간의 그늘에서>

1960년 7월 16일, 금발의 백인 여성이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곰베에 도착했다. 나이는 스물여섯. 박사 학위는커녕 석사 학위도 없었던 그녀는 비서 학교를 졸업한 터였다. 그의 '유일한' 후원자였던 스승 루이스 리키는 그녀에게 곰베에서 10년 정도 침팬지와 지내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그녀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고작해야 2~3년 정도면 충분할 거라고….

그런데 정말로 10년이 걸렸다. 그리고 그녀는 여든두 살이 된 지금까지 곰베 또 침팬지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바로 세계 최고의 영장류 과학자 제인 구달의 이야기다. 구달이 1971년 펴낸 <인간의 그늘에서>(최재천·이상임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는 바로 그녀와 침팬지와의 질긴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생생히 그린다.

그녀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구달이 곰베에서 침팬지를 관찰하며 10년간 쓴 기록을 엮어서 쓴 <인간의 그늘에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우선 전 세계를 흥분에 빠트리고, (박사 학위도 없었던) 구달을 세계 최고의 영장류 과학자로 등극시킨 중대한 발견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 책은 생생히 증언한다.

▲ <인간의 그늘에서 : 제인 구달의 침팬지 이야기>(제인 구달 지음, 최재천·이상임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구달은 침팬지를 관찰한 지 '다섯 달 만'에 두 가지 중요한 발견을 한다. 첫째, 구달은 침팬지가 대형 포유류를 사냥해서 잡아먹는 육식 동물 뺨치는 잡식 동물이라는 사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그 전까지 과학자를 비롯한 세상 사람은 침팬지가 바나나나 좋아하는 채식 동물이라고 생각했다. (침팬지의 포악함을 놓고는 구달 이후로 수많은 연구가 이뤄졌다.)

두 번째 발견은 더욱더 중요하다. 구달은 침팬지가 흰개미 둥지에 긴 식물줄기를 밀어 넣어, 거기에 묻어 나온 흰개미를 맛있게 먹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은 심지어 '효율성'을 높이고자 나뭇잎을 떼어 내며 정성껏 작은 가지를 다듬기까지 했다. 인간의 정의 가운데 하나였던 '호모 파베르(Homo Faber)' 즉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 신화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구달의 스승 루이스는 이렇게 답장을 썼다. 널리 인용되는 그의 반응은 아래와 같다.

"나는 이런 정의(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다)를 고수하는 과학자들이 이제 다음의 세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고 생각한다. 인간을 다시 정의하든가, 도구를 다시 정의하든가, 정의상 침팬지를 인간으로 받아들이든가…."

그녀는 왜 침팬지에 이름을 붙였을까?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인간의 그늘에서>를 놓고서 "20세기 학계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극찬했다. 실제로 <인간의 그늘에서>는 20세기 과학사를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저작 가운데 하나다. 왜냐하면, 이 책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새로운 발견'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과학 방법 자체를 혁신했기 때문이다.

우선 구달 이전까지, 동물 행동학을 연구하는 과학자 사이에서 연구 대상에 이름을 붙이는 일은 금기였다. 예를 들어, '침팬지 1', '침팬지 2', '침팬지 3'으로 연구 대상을 불러야지 구달처럼 '데이비드' '플로' '플린트'라고 침팬지를 불러서는 안 되었다. 이런 호칭의 차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구달 이전의 동물 행동학에서 동물의 개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침팬지 전체, 침팬지 수컷, 침팬지 암컷, 침팬지 새끼가 중요하지 침팬지 한 마리, 한 마리는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침팬지 한 마리, 한 마리에 고유한 이름을 부여하고 관찰 대상으로 삼은 구달의 접근은 이런 기존의 접근을 뿌리째 흔드는 시도였다.

이런 차이는 구달이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 논문 심사를 받을 때, 주류 학계의 과학자와 끊임없이 부딪치는 계기가 되었다. (구달은 루이스의 후원으로 석사 학위 없이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 논문 심사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하지만 결국 구달이 승리했고, 그는 영장류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여성 과학자가 되었다.

구달은 1965년 박사 학위를 받고 나서 곰베로 돌아가서도 과학계의 금기를 계속해서 깨트렸다. 예를 들어,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고통 받는 늙은 침팬지를 돌보다 고통을 덜어주고자 안락사를 시켰다. 또 침팬지가 아플 때는 항생 물질을 주사한 바나나를 제공했다. 과학자가 자신의 연구 대상의 삶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흥미롭게도 구달의 고민은 오지의 원주민 사이에 들어가 '참여 관찰'을 수행하는 인류학자의 고민과 맞닿아 있다.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서 어린아이가 죽어갈 때, 그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의약품을 제공하는 것과 같은 개입 없이 제3의 위치에서 기록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일까?

구달은 <인간의 그늘에서> 이후에 펴낸 초기 26년간의 침팬지 연구를 정리한 <곰베의 침팬지>(1986년)에서 이렇게 썼다. 그녀는 이미 곰베의 침팬지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었다.

"자연은 마땅히 그런 과정을 거쳐 소멸하게 마련이라면서 이러한 행위에 눈살을 찌푸리는 과학자도 있다. (…) 나는 인간이 여러 장소에서 많은 동물에게 이미 상당 정도로, 그것도 대개는 아주 '부정적인' 방식으로 개입을 해 왔기 때문에 일정한 정도의 '긍정적인' 개입은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침팬지 이야기가 아니다

당시로서는 금기시되었던 연구 대상에 대한 '감정 이입' 더 나아가 곰베의 침팬지 사회에 대한 적극적 개입은 구달의 이후 행보를 예고한다. 구달은 1986년 이후부터 침팬지 보호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루이스의 또 다른 제자였던 다이앤 포시가 일찌감치 총을 들고 고릴라 보호 운동에 나서다 1985년 살해된 걸 염두에 두면 늦은 감이 있었다.)

그녀는 침팬지 밀렵과 서식지 파괴를 경고하는 한편, 실험실이나 동물원에 갇힌 침팬지 보호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선다. 그리고 그는 이제 침팬지를 넘어서 전 지구적으로 파괴되고 있는 종 다양성을 지키는 환경 운동의 상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침팬지를 안고 있는 사진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교감을 상징한다.

사족 하나. 뜬금없는 얘기 같지만, 오랜만에 다시 읽은 <인간의 그늘에서>는 침팬지에 관한 책이 아니었다. 나는 이 책을 '열정' 빼고는 아무 것도 없었던 20대 젊은이가 어떻게 침팬지와 교감하면서 성장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성장기'로 읽었다. '내면으로 침잠하는' 수많은 그렇고 그런 에세이보다 이 책이 훨씬 더 감동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 성장기에 타자(침팬지)와의 교감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인간의 그늘에서>를 읽고 나서 사이 몽고메리의 <유인원과의 산책>(김홍옥 옮김, 르네상스 펴냄)도 읽어보자. 이 책에는 구달의 이야기만큼 감동적인 다이앤 포시와 고릴라 또 비루테 골디카스와 오랑우탄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고백하자면, 나는 구달보다 다이앤 포시 또 비루테 골디카스를 더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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