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잘못이 아니야, 자책하지 마"

[작은책] 의지하라? 남자들이 만든 주문

강남역 인근에서 한 여성이 '여자라는 이유로' 한 남성에게 죽임을 당했다. 딱히 다른 이유도 없이 가해자는 기다렸다가 공용화장실에서 만난 첫 번째 여자를 살해했다고 한다. 강남역에서 촛불 추모와 발언이 이어지고, 신촌에서 '여성 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가 진행됐다. 한국여성민우회의 페이스북에서 필리버스터가 생중계되었다. 밤중에 혼자 스마트폰으로 그 동영상을 봤다. 여성들은 한국 사회에서 자신이 여자라서 겪은 차별과 폭력을 증언했고, 여성 혐오를 멈추라고 직접적으로 요구했다. 그건 여자인 내게도 낯익은 이야기들이었다. 그 자리에 직접 참석하지 못한 나도 하고 싶은 말이 꾸역꾸역 생각났다.

ⓒ연합뉴스

나는 저녁이 되면 밖에 나가지 않는다. 혼자 돌봐야 할 식구가 있기 때문이지만, 어둔 밤이 두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밤에 혼자 나갔다가 무슨 일이 생겨 집에 돌아오지 못하면,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어진다는 것이 무섭다.

그러나 집도 안전하지 않다. 내가 한부모라는 것을 안 같은 건물의 남성 세입자들은 참견을 한다. 일이 있어 가끔 늦게 집에 들어가는 나를 보면 그들은 쉽게 반말을 한다. "밤에 어딜 갔다 이제 들어와?" 그들은 내가 혼자 산다는 이유만으로 거리낌 없이 훈수를 둔다. 희롱인 셈이다.

계약할 때 집주인은 내가 남편과 같이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방을 주기 싫다고 대놓고 말했다. 고장 난 보일러를 교체할 땐, 집주인은 보일러 수리공이 있는 앞에서 내게 생색을 냈다. "여자 혼자 사니까 특별히 해 주는 거야!" 그때 집주인은 술을 마셔서 얼굴이 불콰했다.

이사 올 때는 집에 남편이 없다는 걸 눈치챈 이삿짐 일꾼들이 갑자기 내게 함부로 말했다. "내 누이동생 같아서 말해 주는 건데, 세탁기 수도꼭지가 고장 났네." "난 요 앞집에 살아요." 내 돈을 주고 부리는 사람들이고 얻은 집이건만, 난 그들의 시선이 두려웠다. 집주인과 관공서와 직장의 남자들과 부대끼면서 정직함이나 겸손, 배려, 친절은 나에게 해로운 것이라는 걸 배웠다. 나는 더 방어적이고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했다. 하지만 그건 집에 남편이 없어서 생긴 일이 아니라 여성을 차별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혼자 사는 여자라 하면 아무 남자나 달려들 거다." 아버지가 말할 땐 그 내용보다 나이 든 아버지의 편견이 더 미웠다.


대학생 때 야학 활동을 해서 자정이 넘은 시간에 자취방으로 돌아올 때는 골목길에서 늘 신경이 곤두섰다. 한밤중 트럭이 다가와 한 남자가 자기 차에 타라고 한 적도 있었다. 거절했고, 차가 갔기에 망정이지 위험한 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엠티(MT)에 갔다가 비 오는 밖에 잠깐 나갔는데, 두 남자가 차를 세워 놓고 서 있었다. '저쪽으로 가면 다시는 못 돌아온다'는 예감이 스쳐 그들과 반대쪽으로 걸었는데, 그들이 갑자기 "아가씨, 거기에 서!" 하면서 차에 시동을 거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마구 뛰었다. 차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아무리 뛰어도 곧 잡힐 것이다. 도로 곁은 덤불이었다. 덤불 아래로 몸을 굴렸다. 다시 미친 듯이 달렸다. 차 소리가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것을 들었고 가겟집의 불빛이 보였다. 연락을 받고 온 일행 앞에서 울면서 말했다.


"여자로 태어나서 재수 없어." 그때 선배 언니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래, 여자라서 당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그즈음 나는 방 안에 주로 틀어박혀 있었다. 안전해야 된다는 생각은 나를 지켜 줄 남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한 남자 선배를 사귀었다. 그 선배는 거리낌 없이 내 자취방에 와서 밥을 해 달라고 하고 잠도 자고 갔다. 내 감정과 의견은 상관없이 이기적으로 굴었다. 나는 그 선배가 싫으면서도 이 선배밖에 관계 맺을 사람이 없을 것 같아 어쩔 줄 몰랐다. 그러니까 세상은 무섭고 남자들은 나에게 폭력적으로 굴 수 있으니 나를 지켜 줄 남자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왜 남자가 나를 지켜 준다는 세상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을까.

그 선배와 결별하고 다른 남자를 만났다. 그를 만난 이유는 여성적이기 때문이었다.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늘 조용하게 뒤에 있고 감성적인 그를 나는 좋다고 여겼다. 난 몰랐다. 사람은 때와 상황과 관계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틀은 정해진 게 아니라는 것을….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려면 남자로서, 여자로서 어떻게 하라는 문화적 고정관념과 지난하게 분투해야 한다는 것을…. 남자가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일상이, 여자에게는 곤혹스러운 고통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것도, 의지하라는 것도, 다른 여성과 나를 구분하라는 것도 남자들이 만든 세상의 주문일 뿐이다. '좀 더 용기를 내었다면, 좀 더 자립적이었다면, 좀 더 다른 이들과 연결되어 있었다면 잘못된 관계 속에 나를 그렇게 오래 방치하지 않았을 텐데…' 하고 후회했다. 후회는 이혼 후에도 이어졌다.

"난 내가 용서가 안 돼." 말했을 때 친구가 말해 주었다. "니 잘못이 아니야. 자책하지 마."

일터에서 만난 이십 대 여자 동료들이 말했다. 여자로 사는 게 하루하루 아슬아슬하다고. 강변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풀숲에 숨어 있던 남자가 확 밀어뜨려 넘어졌다고. "이 새끼야!" 하고 발딱 일어나 고함쳤다고. <살인의 추억> 영화도 정말 싫었다고. 여자라서 줄줄이 죽이는 그 영화를 보고 나서 기분이 나빠져서 집에 차 타고 가는데도 무서웠다고. <은교> 영화도 너무 싫었다고. 나이 든 남자가 젊은 여자를 그려 내는 시선이 싫었다고. 밤중에 모르는 남자가 불쑥 따라오고 때리기도 해서 사는 게 두렵다고도 했다.

ⓒ연합뉴스

"왜 죽였느냐?" "여자라서 죽였다"는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하고, 매스컴은 이를 선정적으로 전한다. 그런 말을 태연하게 듣고 있는 우리가 부끄럽다.

차별에는 이유가 없다. 불평등이 극심해질수록 차별과 혐오와 폭력이 강해진다. 차별받는 이들은 어떤 이유로든 배제될 수 있다. 차별이 어떤 것인지 몸과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여성들이 거리에서 폭력에 대항해 외친다. '나는 ○○에 있었습니다.' 필리버스터의 제목이었다. 밤길에 안 나가고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안전할까? 어떻게 하면 살려 주고 어떻게 하면 죽이는 것이 아니다. 살 수 있는 권리에 조건은 없다. 더 차별을 당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나조차 그 사실을 알기에, 거리에 선 용감한 그녀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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