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 여성을 성노예로 만든 나치 친위대 '위안소'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12]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40

수용소와 인권은 서로 어긋나는 개념이다. 아우슈비츠 수감자가 친위대 경비대원에게 '인권'을 따진다면 돌아오는 것이 말이 아닌 주먹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현장 사살은 너무 흔하게 벌어졌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은 바에야 "왜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느냐?"고 묻는 상황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인권은 땅바닥에 내팽겨지고 수감자가 한 인간으로서 지닌 목숨의 무게는 휴지보다도 가볍게 다뤄졌다.

성폭력에 희생된 여성들

특히 여성들에게 수용소는 인권의 사각지대였다. 수용소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여성은 성적인 모욕을 겪었다. 친위대 경비대원들을 비롯한 낯선 남자들이 쳐다보는 바로 앞에서 옷을 벗어야 했다. 미국인 작가 주디 버탤리언은 나치 박해를 피해 바르샤바 게토에서 러시아 쪽으로 도망쳐 살아남았던 폴란드 유대인 젤다의 손녀다. 버탤리언의 최근작(The Light of Days, 2020)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아이들과 가족들을 빼앗기고, (소각장 굴뚝에서 퍼지는) 살이 타는 냄새로 인한 당혹감과 혼돈 상태에 빠진 새로운 여성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친위대 경비병들은 음란한 말로 여자들의 몸매를 평하고, 곤봉으로 가슴을 쿡쿡 찌르고, 군용견을 풀어서 겁을 주기도 했다. 그들은 여성의 머리를 빡빡 깎고 몸을 검사했다. 벌거벗은 유대인 여성들이 질에다 귀금속을 숨지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작업도 포함됐다. 일부 여성들은 생식 능력이나 임신과 관련된 '의학' 실험의 대상이 되었다.](주디 버탤리언, <게토의 저항자들: 유대인 여성 레지스탕스 투쟁기>, 책과 함께, 2023, 409쪽)

수용소에서는 위와 같은 성적 모욕뿐 아니라 성폭력(강간)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인권 침해가 벌어졌다. 하지만 많은 경우, 침묵 속에 묻혔다. 피해 당사자들은 전쟁이 끝나는 무렵 수용소에서 풀려나온 뒤 입을 다물었다. 독일 패전 뒤 나온 증언이나 회고담에서 성적 학대를 밝힌 경우는 드물었다. 연구자들이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했을 때도 여성들은 자신이 겪은 고난의 세세한 부분까지 털어놓는 것을 삼갔다(일본군 성노예 '위안부' 할머니들도 처음엔 그랬다. 그날의 악몽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여성들의 마음은 동서양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여성 피해자들이 입을 닫은 까닭은 (악몽도 악몽이려니와) 지난 일을 밝힐 경우 돌아올 불이익(이를테면 결혼이나 주변의 눈길)을 걱정해서였다. 가해자의 이름도 모르고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적지 않은 여성들이 성폭력을 겪은 뒤 바로 살해당하거나 그 뒤 수용소에서의 가혹한 노동과 영양실조, 전염병 등으로 숨졌다. 다행히 살아남아 용기를 내 증언을 해도 사람들은 '설마 그럴 리가!' 하며 믿으려 들지 않았다. 힘들게 털어놓은 증언자는 위로는커녕 또다시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증언을 망설이던 다른 피해자들은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아예 말문을 닫았다.

친위대가 운용한 '위안소(Bordell)'

일본군이 아시아·태평양전쟁을 벌이면서 중국과 동남아에 주둔하는 부대마다 '위안소'를 운영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나치 독일도 여성들을 '성 노동자'로 삼아 공식 매춘업소를 운영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만행에 뒤지지 않는다. 나치 독일에서의 여성 인권에 관심을 쏟아온 연구자 정용숙(춘천교육대, 사회학)은 "사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일본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위안부' 시스템을 운영한 국가였다"고 지적한다. 정교수의 글을 보자.

[독일 군대와 친위대는 자국 영토에 있는 강제 노동자를 비롯해 점령지 내 자국 군대, 나아가 강제수용소의 남성 수감자를 위해서도 '위안소'를 직접 운영했다. '위안소'라는 명칭은 일본군의 독자적인 명명으로, 독일에서는 성매매업소의 일반 용어인 '보르델(Bordell)'이라 불렀다. 수용소 내 남성 수인들의 노동력을 좀 더 효과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친위대가 보르델을 직접 운영했다. 여기에 필요한 여성들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와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의 여성 수감자를 차출했다.](정용숙, '나치독일 여성수용소 라벤스브뤼크 기념관을 가다', 일본군 '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 2024년5월⇒https://kyeol.kr/ko/node/556)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일제의 '위안소'에 대해선 많이 들었어도 나치 '보르델'에 대해선 잘 듣지 못했을까. 그 이유로 크게 다음 세 가지 요인이 꼽힌다. △나치가 엄격한 성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건강한' 성풍속과 성도덕을 강조했다는 생각들이 제2차 세계대전 뒤에도 널리 퍼져 있었고 △(아시아의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피해 여성들이 자신의 피해사실을 감추고 공론화하지 않았고 △나치 홀로코스트 연구자들도 나치의 최대 희생자 집단임을 내세우며 '홀로코스트'를 독점하려는 유대인들에 휘둘려 (나치로부터 이중의 피해를 입은) 성폭력 희생 여성 인권에 관심을 쏟지 못했다.

▲1944년 5월(또는 6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닿은 뒤 ‘가용 노동자’로 분류돼 머리를 깎인 여성 신입 수감자들. ⓒ위키미디어

"여자 친위대원이 '성 노동자'를 관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나치 '위안소' 문제를 사람들이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다. '보르델'의 존재는 이미 드러나 있었다. 독일 정치범으로 1939년부터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수감자로 있다가 살아남은 오이겐 코곤(뮌헨대, 정치학)에 대해선 지난 주 글에서 짧게 살펴봤다. 그가 1946년에 출간한 <친위대 국가>(Der SS-Staat, 1946)에는 '수용소 매춘소(Bordell im KZ)'라는 제목 아래 부헨발트 수용소에 '보르델'이 운용됐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코곤에 따르면, △친위대 총사령관 힘러의 명령으로 1943년 여름 부헨발트 수용소를 시작으로 몇몇 수용소에 매춘소가 생겼고 △부헨발트 '위안소'에는 라벤스브뤼크 여자수용소에서 이송된 18~24명의 여성들이 여자 친위대원 2명의 관리 아래 상주했고 △그 여성들에게는 6개월 동안만 '성 노동자'로 일하면 수용소에서 풀어준다는 약속이 주어졌다(정용숙, '나치 국가의 매춘소와 강제성매매-그 실제와 전후 시대의 기억', <여성과 역사> 29, 2018년 12월).

조선의 처녀들이 속아서 성노예 '위안부'가 됐던 것처럼, 나치도 그 여성들을 속였다. 6개월 뒤 석방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나치 '위안소'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밝힌 것은 코곤의 책이 처음이다. 여기에 덧붙여 작센하우젠 수용소와 다하우 수용소에서 '위안소'가 있었다는 생존자들의 증언도 나왔다. 코콘의 책이나 생존자들의 증언보다는 한참 뒤에 이탈리아 화학자로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가 쓴 첫 번째 책(Se questo è un uomo, 1958)에도 나치 '위안소'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안에는) 창문이 늘 닫혀 있는 29번 블록이 있었는데, 그곳은 프라우 엔 블록(여자 블록), 즉 폴란드 출신 여자 수감자들이 일하고 독일인들만 드나들 수 있는 사창가였다.](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2007, 43쪽)

위에 옮긴 글에서 '독일인들만 드나들었다'는 표현이 나오지만, 실상은 꼭 그렇진 않았다. 수용소 안에서 특권을 지닌 작업반장(Kapo)나 막사장 가운데 비(非)독일인들도 '위안소'를 이용했다. 대부분의 경우 일단 나치 수용소에 갇히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가운데 하나인 성욕이 그야말로 깨끗이 사라진다고 한다. 이는 연구자들이나 생존자들이 입을 모아 하는 얘기다.

수용소 남자들은 육체적 충동을 잃어버렸고, 여성 수감자들은 생리가 끊겼다. 풀려나서도 몇 개월이 지나야 생리 가능이 돌아왔다. 극도의 정신적 긴장감, 육체적 피로, 그리고 영양실조로 몸이 여위어가는 상태에서 성적인 관심을 품기는 어려울 듯하다. 따라서 보르델을 드나들었던 이들은 나치 친위대 경비대원들, 수감자들 가운데 특권적인 지위를 누렸고 따라서 성관계를 할 만한 체력이 남아 있던 막사장이나 작업반장들이었다.

레비의 위 책은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책 가운데 전세계적으로 아주 많이 읽혔다. 하지만 1958년 처음 이탈리아어로 출판됐을 때는 저자인 레비나 출판사가 실망했을 정도로 책 판매는 신통치 않았다. 입소문을 타고 영어 번역본이 나오고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홀로코스트 연구자들조차 (지금은 잘 이해가 안 될 만큼) '수용소 성노예'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세 가지 다른 종류의 '위안소'

수용소에다 '위안소'를 만들어 놓고 여성들을 '성노동자'(성노예)로 부렸다는 사실이 연구자들의 관심을 끈 것은 20세기 거의 끝 무렵에 이르러서였다. 1989년 독일 여성 사회학자인 크리스타 파울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갔을 때다. 그곳에서 안내자로 만난 홀로코스트 생존자 헤르만 라이네크로부터 '위안소'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충격을 받은 파울은 관련 자료(수감자들이 남긴 구술자료, 수용소 관련 문서 자료)를 뒤지고, '성 노동' 관련자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했다. 그 결과물이 1994년에 나온 <강제매춘: 나치의 국영 매춘업소(Zwangsprostitution: Staatlich Errichtete Bordelle im Nationalsozialismus, 1994)다.

나치 체제 아래서 매춘은 독일군, 특히 하인리히 힘러(1900-1945)를 우두머리로 한 친위대의 강력한 통제 아래서 이뤄졌다. 강제 매춘은 △군대를 위한 유곽 △외국인과 강제노동자를 위한 유곽 △강제수용소 수감자를 위한 유곽으로 나뉘었다. 파울에 따르면 1940년에서 1942년 사이에 3만 5000명의 여성이 매춘을 강요받았다. 특히 1942년 이후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강제수용소에서 '위안소'가 설치되면서 많은 여성들이 '성 노동자'로서 힘든 삶을 꾸려갔다. 여성들은 6개월 동안 매춘여성으로 일한 뒤 풀려나지 못하고 대부분 병으로 죽거나 학살됐다(정현백, '나치의 강제매춘 정책과 인종주의', 역사비평 2004년 봄호 참조).

1990년대 한국에서도 나치 수용소 강제 매춘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당시 한국의 시대적 배경과도 맞물린다. 1991년 8월14일 김학순 할머니(1924-1997)가 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지금의 정의기억연대) 사무실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한국인으로선 처음으로 공개 증언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군 성노예라는 엄청난 전쟁범죄의 진상을 파헤치고, 일본의 진심어린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바로 그 무렵 나치 수용소 성 착취 문제가 떠오르자, 한국 연구자들이 독일 쪽에도 눈길을 돌린 것은 자연스런 흐름이었다. 이 분야 연구자의 한 사람인 정현백(전 여성가족부장관, 성균관대, 서양사)의 글을 보자.

[1942년 독일 육군은 500개 이상의 유곽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전선의 이동에 따라 유곽은 새로 설치되거나 폐쇄되었다. 1개의 유곽에 보통 10~20명 정도의 매춘 여성을 계산하고, 약 20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 일본군 위안부 숫자에 비교한다면, 강제매춘의 규모는 일본보다 작았던 것으로 추산된다. 일본에서는 나치의 강제매춘 문제에 대한 글이나 서적이 간간히 소개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일본군 성노예 정책의 잔혹성을 축소하려는 저의가 숨어 있다.](정현백, '나치의 강제매춘 정책과 인종주의', 역사비평 2004년 봄호)

크리스타 파울에 이어 다른 연구자들도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관련 논문을 내놓았다. 연구자들은 아우슈비츠뿐 아니라 마우트하우젠, 다하우, 플로쎈뷔르그 등 여러 다른 강제수용소에서도 '위안소'가 국가(보다 정확히는, 수용소를 관리 감독하던 친위대사령부)의 공권력으로 운영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자들의 영역에서 머물렀던 수용소 '성노동' 문제가 보다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21세기에 들어와서다. 2005년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의 '위안소'를 주제로 전시회가 출발점으로 꼽힌다. 유럽 미디어들은 오스트리아 비엔나 대학의 교수 1명과 학생 11명이 준비했던 그 전시회를 잇달아 보도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왜 나는 이런 사실을 잘 몰랐을까?" 하며 관심을 보였다.

▲ 독일로 보내려고 포장해둔 여성 수감자들의 머리털. 1945년 1월말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소련군에게 해방된 뒤에 발견됐다. ⓒU.S. Holocaust Museum

힘러, "위안소 만들어 노동생산성 높여라"

수용소에 '위안소'를 두기로 한 결정권자는 친위대 사령관으로 나치 수용소를 총괄하는 자리에 있던 하인리히 힘러였다. 그는 1941년 수용소 수감자들이 드나드는 매춘업소를 만들 라는 지시를 내려 보냈다. 이와 관련, 박채복(숙명여대, 여성학)의 글을 보자.

[강제수용소 수감자를 한 유곽 설립은 1941년 하인리히 힘러가 마우트하우젠과 구젠 강제수용소를 시찰한 뒤 설치할 것을 명령하면서 구체화되었다. 힘러의 아이디어에 따라 마우트하우젠(1942년 6월)과 구젠(1942년 가을)에 수감자들을 한 유곽이 1942년 완공됐다. 이후 1945년까지 나치 독일은 로쎈뷰르그(1943년 여름), 부헨발트(1943년 7월), 아우슈비츠와 아우슈비치-모노비츠(제3수용소, 1943년 가을), 다하우(1944년 5월), 노이엔감메(1944년 초), 작센하우젠(1944년 여름), 미텔바우-도라(1945년 초) 등 모두 10곳의 강제수용소에 수감자들을 위해 섹스를 제공하는 유곽을 설치하였다.](박채복, '전쟁과 여성 폭력: 독일 강제수용소의 강제 성노동 문제를 중심으로', 아시아여성연구 제55권 1호, 2016)

글 위에서 나치는 세 종류의 '위안소'를 만들었다고 했다. 첫째는 군대, 둘째는 (독일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과 강제노동자, 셋째는 강제수용소 수감자를 위한 '위안소'였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200만 명이 성병에 걸렸고, 전투력 약화를 낳았다. 따라서 군대를 위한 '위안소'는 성병을 막기 위한 것이고,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위안소'는 작업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나치는 왜 다른 곳도 아닌 강제수용소에다 '위안소'를 두었을까.

독자분들도 짐작하시겠지만, 친위대 우두머리 힘러가 노예노동자들에게 섹스를 제공하려는 데엔 경제적 동기가 깔려 있었다. 수용소 수감자들의 노동 생산성을 높여 군수품을 더 많이 만들어내려는 꼼수에서였다. 수용소 입구에 '노동은 자유롭게 하리라'는 팻말을 붙여 놨지만, 노예노동은 낮은 노동생산성으로 이어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힘러는 '성노예'를 떠올렸다.

1942년 3월 23일 친위대 경제·행정 담당자 오스발드 폴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부지런히 일하는 수감자에게 유곽의 출입을 허용하여 성적 위안을 주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박채복, 위 논문에서 재인용) 이에 따라 수용소 한 구석에 '위안소'가 만들어졌다. 일을 잘 하는 수감자가 '보상 쿠폰'을 보너스로 받으면, 그는 그 쿠폰을 내밀고 '위안소'에서 성관계를 맺었다. 군수물자 증산을 위해 여성을 성 착취의 희생양으로 삼으면서 친위대 사령관이 '포주'로 나선 모양새였다.

"손가락으로라도 가리키지 말라"

친위대는 수용소에 '위안소'가 있다는 사실이 바깥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심지어 수용소 안에서도 '위안소'에다 다른 이름을 붙여 직설적인 표현을 삼가도록 입단속을 했다. 정용숙(춘천교육대, 사회학)의 글에서 관련 내용을 보자.

[나치는 매춘소 운영 사실을 당시에 이미 철저히 은폐했다. 군부는 매춘소 관련 문서에 '기밀' 도장을 찍어 관리했다. 수감자들 사이에서도 그곳은 시치미를 뚝 떼고 '특별건물(Sonderbau)'이라는 은밀한 이름으로 불렸다. 매춘소 막사는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수용소 외곽 구석진 곳에 짓고 울타리를 쳤다. 수용소 관리자들은 이 시설물을 언급해서는 안 되고 심지어 손가락으로 가리키지도 말라는 지침을 받았다.](정용숙, '나치 국가의 매춘소와 강제성매매-그 실제와 전후 시대의 기억', <여성과 역사> 29, 2018년 12월)

성 문제에 관한 한 히틀러 정권은 유달리 엄격했다. 1935년 9월15일에 내놓은 악명 높은 '뉘른베르크 법'의 하나인 '독일인 혈통 명예 보호법'에 따르면, 독일인은 유대인과 결혼은 물론 성관계조차 하지 못하도록 못 박았다. 자칫 이를 어겼다간 감옥이나 수용소로 끌려갔다. 나치 수용소 규정에 따르면, 독일군은 수감자, 특히 유대인과의 성관계가 금지됐다. 따라서 '위안소'에도 유대인 여성은 없었고, 폴란드와 독일 여성 수감자들이 많았다. 따라서 유대인 수감자가 어쩌다 '위안소'에 가더라도, 독일인 '위안부'와 관계를 맺을 수는 없었다.

전쟁 중인 상황에서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독일군 장병들에게 유대인과의 성관계를 막는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긴 어려웠다. 독일군 안에서도 장교나 사병이나 서로 눈감아주고 모른 체 했다. 일부 수용소 간부들은 예쁜 유대인 여자들을 사적인 파티에 불러 옷을 갈아입힌 뒤 시중을 들게 했다. 파티가 끝나면 강간을 하고 입을 막으려고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일부 유대인 소녀들은 그런 파티에 불려나가지 않으려고 자신의 얼굴에 밀가루를 문질렀다(다른 얘기지만, 필자의 어머니는 6.25 한국전쟁 때 피란길에 미군 병사들이 보이면 서둘러 얼굴에다 흙을 발랐다고 했다. 나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위안소'는 수용소 폐쇄와 더불어 문을 닫았다. 독일인들도 여성을 성 착취한 장소를 부끄럽게 여겼기에 다른 건물들에 앞서 곧바로 허물어버리고 흔적을 없앴다. 지금까지 '위안소' 건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마우트하우젠과 구젠, 두 곳뿐이다.

보스니아 내전 성폭력이 관심 높인 계기

1991년 소련 해체와 더불어 유고연방이 무너지면서 발칸반도에서 벌어졌던 보스니아내전(1992-1995)은 많은 조직적 성폭행 범죄들로 악명이 높다. 이를테면, 사라예보 외곽의 그르바비차 마을에서 세르비아계가 벌인 조직적 성폭행 등이다(여기서 '조직적'이라 함은 인종청소를 노린 의도적 성폭행을 가리킨다). 3년 8개월 동안 이어졌던 보스니아 내전의 혼란 속에서 성폭행을 당한 보스니아 무슬림 여성은 2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다(내전 사망자는 10만명).

보스니아내전에서의 조직적 성폭력이 논란을 빚으면서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 유럽 미디어에서는 전시 성폭력과 그에 따른 논란(원치 않는 임신과 유산, 도망중인 전범자 색출 등)이 자주 보도되고 있었다. 그런 영향으로 오랫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나치 수용소의 '위안소' 문제도 관심을 끌게 됐다. 독일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에서 2007년에 열린 전시회는 (2005년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의 '위안소'를 주제로 전시회에 이어) 대중의 눈길을 아주 많이 모았다. 그 전시회는 아우슈비츠, 마우트하우젠 수용소를 비롯해 모두 10군데에 설치되었던 수용소 '위안소'의 실태를 담은 자료와 사진들을 보여줘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라벤스브뤼크는 특히 12만 명의 여성 수감자들을 따로 가두어놓았던 여성 전용 수용소로 악명이 높았다. 그렇기에 2007년의 전시회는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 전시회는 국제회의의 성격도 지녔다. 20-21세기 전시 강제 성매매를 주제로 한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연구자와 증언자들이 모여 전쟁과 성폭력 사례를 발표하고 토론했다. 여기서 다룬 주제는 일본군 '위안부', 보스니아 내전 당시의 그르바비차, 나치 수용소 '위안소'였다.

그 무렵 여러 관련 논문과 책들이 잇달아 나왔고, 독일에서는 수용소 '위안소'를 다룬 최초의 박사학위 논문(2009)도 나왔다. 연구자 정용숙은 이를 가리켜 "(나치 위안소와 성 착취의 전쟁범죄 문제가) 나치 역사의 일부로 학문적 시민권을 획득했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평가를 내렸다. 여기서 '학문적 시민권'이란 공적 논의의 주제로 '위안소' 문제가 확실히 자리매김했다는 얘기가 된다.

▲ 베를린 북쪽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의 여성 수감자들. 12만 명에 이르렀던 여성 수감자들 가운데 일부는 나치 ‘위안소’로 끌려가 ‘성 노예’로 일했다. ⓒGerman Federal Archive

역사교육 현장으로 거듭난 여성수용소

여성들만 따로 모아놓은 라벤스브뤼크 수용소는 베를린 북쪽으로 차를 몰고 2시간 거리의 옛동독 지역인 퓌르스텐베르크-하벨 가까이에 있다. 그곳 수용소에는 30개 국가에 이르는 다양한 국적을 지닌 여성 12만 명이 갇혀 강제노동을 강요당했다. 1941년 이후부터는 남성수감자도 2만 명쯤 수용됐으나, 여성이 워낙 많았기에 흔히 '여성 수용소'로 알려졌다. 여성수감자 가운데 절반 넘는 7만 명가량은 레지스탕스를 비롯한 반나치 저항운동으로 붙잡힌 정치범들(또는, 남성 정치범의 아내와 딸들)이었다.

여성 수감자들 가운데는 톰 크루즈의 영화 <작전명 발키리>(2009)로 잘 알려진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1907-1944) 대령의 아내(니나 슈타우펜베르크)도 있었다. 전쟁 승리의 전망이 흐려지자, 일단의 독일군 고위 장교들은 '더 큰 파국을 맞기 앞서 전쟁을 멈춰야 한다'는 생각으로 히틀러를 제거하려 했다. 그에 따라 슈타우펜베르크는 1944년 7월20일 동프로이센(지금은 폴란드 영토인 라슈텐부르크)의 '늑대소굴(Wolfschanze)'이라 불리는 야전 지휘소에서 회의 중이던 히틀러를 폭사시키려 했다.

시한폭탄 가방이 터져 4명이 죽었지만, 히틀러는 작은 부상만 입고 살아남았다. 곧 반히틀러 쿠데타 세력에 대한 검거 선풍과 처형이 뒤따랐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암살 실패 다음날 베를린 육군사령부 마당에서 총살됐고, 아내 니나는 라벤스브뤼크 수용소로, 자녀 4명은 고아원으로 끌려갔다. 임신 중이었던 니나는 수용소에서 딸을 낳았고, 패전 뒤에 풀려나 자식들과 다시 합칠 수 있었다.

정치범 다음으로 많은 수감자는 나치의 반(反)유대 정책에 휘말린 2만 명의 유대인 여성들이었다. 그밖에 집시(로마, 신티)를 비롯한 이른바 '반사회분자' 또는 '사회부적응자'로 분류된 여성들이었다. 그곳 수감생활은 매우 열악했다. 혹독한 강제노동과 굶주림, 질병 등으로 많은 수감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의 여성 수감자들 가운데는 글 앞에서 살펴본 '위안소'로 끌려가 '성노동'을 강요받기도 했다. 이렇듯 여성 인권 침해와 관련한 아픈 과거사를 지녔기에 라벤스브뤼크에 대한 연구자들의 관심은 높다. 2013년 그곳이 '라벤스브뤼크 기념관'으로 다시 문을 연 뒤로는 상설 전시관과 이동전시회를 통해 독일의 전시 폭력이라는 부끄러운 과거사를 솔직히 드러내왔다. 지난날 끔찍했던 박해의 현장이 역사교육 현장으로 거듭난 모습이다.

'성 노동자' 인권 회복과 배상은 미결

오늘 글에서 나치 친위대가 수용소에 '보르델(Bordell)'이라 일컫는 '위안소'를 운용하면서 수감자 여성들을 '성노예'로 부렸음을 살펴봤다. '수용소 위안소'라는 존재 자체도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고, 연구자들도 뒤늦게 관심을 가지게 됐음을 봤다.

독일은 일본에 견주어 나치 전쟁범죄를 비롯한 과거사 청산에서 훨씬 '모범적'이란 소릴 들어왔다. 지난 2000년 독일정부와 기업들이 함께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을 세우고 나치 정권에게 강제 징용됐던 외국인들에 대한 배상을 했다. 하지만 '성 노동자'로 혹사당했던 수용소 여성들의 인권 회복과 배상에 대해선 지금껏 아무런 소식이 없다.

친위대의 '위안소' 착취는 일본군의 성노예 '위안부' 학대와 더불어 우리 인류문명사에서 '더러운 기억'으로 남았다. 독일인들이나 일본인들의 입장에선 가리고 숨기고 싶은 '더러운 역사'다. 이 문제는 언젠가 제대로 풀어야 할 과거사 숙제의 하나다. 다음 주엔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몇몇 수용소에서 전쟁 끝 무렵 수감자들이 일으킨 봉기(나치의 시각에선 '무장 폭동')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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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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