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체육회 '생떼'…박태환에 질 수 없다?

[이종훈의 영화 같은 스포츠] 박태환 사태와 <어 퓨 굿맨>

"넌 진실을 감당할 수 없어(You can't handle the truth)!"

이 말은 1992년 개봉한 롭 라이너 감독의 영화 <어 퓨 굿 맨(A Few Good Men)>에 출연한 잭 니컬슨의 대사다. 미국영화연구소(AFI)가 선정한 역대 미국 영화 명대사 리스트 29위로 뽑힌 명대사다.

최근 박태환과 대한체육회의 갈등을 보면서 이 대사가 떠올랐다.

지난 16일 대한체육회는 이사회를 열어 최근 논란이 되는 대한체육회 국가대표 선발규정 제5조 6항 '체육단체 및 금지약물 복용, 약물사용 허용 또는 부추기는 행위로 징계처분을 받고 징계가 만료된 날로부터 3년이 경과하지 아니한 자를 국가대표로 선발할 수 없다'를 바꿀 수 없다고 결정했다. 이로써 금지약물을 복용해 국제수영연맹으로부터 18개월의 선수자격정지 징계를 받은 박태환 선수는 리우 올림픽 출전의 길이 막혔다. 박태환 측은 즉각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대한체육회의 이 규정은 이중처벌"이라며 중재를 신청했다.

CAS가 앞으로 내릴 판결은 과거 판례를 통해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CAS는 지난 2011년부터 판례를 통해서 일관되게 "금지약물을 복용해 징계를 받은 선수에게 또 다른 징계를 주는 이중처벌은 안 된다"는 입장을 명확히 해왔다. 이런 CAS의 결정에 따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도 지난 2011년 10월부터 이중처벌을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향후 나올 CAS의 판결은 박태환 측의 손을 들어주는 방향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대한체육회는 문제의 국가대표 선발규정 제5조 6항을 고수하기로 결정했다. 박태환 측이 이 문제를 CAS로 가져갈 수도 있다는 시그널을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심지어 대한체육회 관계자들은 "CAS의 판결은 강제력이 없다"고까지 말했다. CAS의 판결이 어떻게 나오더라도 상관없다는 식의 강경한 태도다.

대한체육회의 이와 같은 태도는 IOC의 올림픽 헌장을 깡그리 무시하는 동시에, "대한체육회 정관과 올림픽 헌장이 상이한 경우, 즉 서로 다른 경우에는 올림픽 헌장이 우선한다"는 대한체육회 정관 제2조 3항조차도 지키지 않겠다는 자기모순이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이다.

대한체육회는 왜 이렇게까지 강경일변도의 주장을 고집하는 걸까?

▲박태환은 리우올림픽 출전이 어렵다. ⓒ연합뉴스

문제의 국가대표 선발규정 제5조 6항은 대한체육회와 문화체육관광부가 2014년에 소위 '스포츠 4대악 근절'을 이유로 만든 조항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 조항이 만들어지기 이전인 2011년에 이미 CAS는 '금지약물 복용 선수의 이중처벌은 안 된다'는 판례를 내놓았다. IOC를 비롯한 각국 올림픽위원회 역시 이 판례에 따라 관련 규정을 삭제했다. 따라서 대한체육회와 문화체육관광부는 국제 규범과는 맞지 않는 잘못된 규정을 만든 셈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어 퓨 굿 맨>의 "넌 진실을 감당할 수 없어"라는 대사에는 "진실이 뭐건 간에 넌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네가 뭐라고 감히 진실을 알고 싶다고 까불어!"라는 뜻이 담겼다. '나만이 정의'라는 독선에 찬 잭 니컬슨(네이선 제셉 대령 역)은 진실을 찾는 일개 법무장교 혼자서 군의 전통(부조리)을 해결할 수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대한체육회와 문화체육관광부는 2014년 문제의 이 규정을 만들 때, CAS와 IOC가 이중처벌을 금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대한체육회와 문화체육관광부에 자신들이 만든 규정이 올림픽 헌장에 부합하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자신들이 이 규정을 만들었다는 것 뿐이다. 박태환은 대한체육회와 문화체육관광부에 "당신들이 만든 규정은 잘못됐으니, 규정을 바꿔서 나를 리우로 보내 달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대한체육회와 문화체육관광부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박태환의 말은 부탁이 아니다. 그들은 박태환이 자신들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했다고 여겼다. 때문에 대한체육회와 문화체육관광부의 입장에서 이 논란은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절대 밀려서는 안 되는 싸움'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어쩌면 대한체육회와 문화체육관광부는 영화에서 제셉 대령(잭 니컬슨)이 채피 법무관(톰 크루즈)에게 그랬던 것처럼, 박태환에게 '현실'을 제대로 가르쳐 주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넌 진실을 감당할 수 없고, 진실이 뭐건 간에 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 말이다.

사실 CAS가 박태환의 손을 들어주고 "이중처벌은 잘못"이라는 진실을 알려준다고 해도, 박태환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대한체육회 관계자의 말처럼 CAS에는 해당 국가에 판결을 강제할 수 있는 물리적 수단이 없다. 대한체육회와 문화체육관광부는 이런 현실을 너무나 잘 안다. 때문에 대한체육회가 비난 여론에 잠시 귀를 막고 '모르쇠'로 일관하면 박태환 문제는 끝이다. 박태환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영화 <어 퓨 굿 맨>에서 잭 니컬슨이 분한 제셉 대령은 부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관심 사병'인 산티아고 일병의 군기를 잡기 위해 같은 소대원 2명에게 구타를 의미하는 '코드레드'를 지시한다. 이 때문에 산티아고 일병은 사망한다. 이후 법정에서 책임공방이 벌어지자, 제섭 대령은 캐피 법무관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전방에서 근무해봤나? 보병으로 근무해봤나? 우리는 명령에 복종한다. 안 그러면 모두 죽어!"

자신과 죽은 산티아고 일병이 근무하는 곳은 쿠바를 코앞에 둔 최전방 관타나모 해군기지였으므로, '코드 레드'는 산티아고 일병과 부대 전체를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고 강조한다.

최근 대한체육회 조영호 사무총장은 "금지약물복용은 반사회적인 일이다. 약물복용에 대해서는 오히려 징계를 강화해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선수를 위해 좋은 일"이라며 이중처벌 규정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이중처벌이 국제규범에 맞지 않더라도 선수를 위해 좋은 일이라는 대한체육회의 논리가 '코드 레드'가 잘못된 관행이라고 해도 관심 사병과 부대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말하는 제셉 대령의 논리와 닮았다고 생각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제셉 대령의 일갈에서 한편으로는 최전방에서 적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부대원의 더 강한 기강과 규율을 유지하고 싶다는 고뇌가 느껴진다. "특정 선수 한명 때문에 규정을 바꿀 수는 없다. 로컬룰도 존중해야 한다"는 대한체육회의 입장과 처지도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속 제셉 대령이 자신의 고뇌와 신념에도 불구하고 법정구속이라는 처벌을 피할 수 없었듯, 대한체육회 역시 '전 세계 스포츠계와 IOC가 이미 오래 전에 폐기처분한 잘못된 규정을 자국 선수에게 강요한다'는 국제적인 망신을 피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대한체육회의 일그러진 논리...?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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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훈

제가 만난 스포츠 스타들은 셀 수 없이 많은 패배가 자신을 승리자로 만들어 줬다고 말합니다. [이종훈의 더 플레이어]를 통해 수많은 이들을 승리자로 만들어 준 '패배와 실패'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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