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한국적인 '불평등의 땅' 미국

[프레시안 books] <좋은 경제학 나쁜 경제학>

소득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절반을 차지하고 소득 하위 50%가 차지하는 비중은 14%에 불과한 나라. 자살률이 지구 역사상 최악의 수준으로 치닫는 나라. 불평등이 소득의 차이를 넘어 건강 격차, 세대 간 격차로 번지는 나라. 주류 경제학자들이 부유세는 악덕을 조장하는 '나쁜 세금'이라며 반대하는 나라. 경제 침체기에도 정부 지출을 줄이는 나라. 그리고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정치와 경제 지도자들은 이 모든 격차를 실패한 사람들의 게으름 탓으로 여기는 나라.

어느 나라 이야기일까? 1945년에 태어난 79세 경제학자가 40여년 동안 미국에서 이민자로서 겪고 대학교수로서 연구한 바다. 앵거스 디턴의 <좋은 경제학, 나쁜 경제학>에 '한국'은 단 한번도 거론되지 않는다. 가뜩이나 불평등 수치가 미국을 맹렬하게 추격하는 와중에 밀턴 프리드먼을 추앙하는 대통령이 자유를 예찬하며 미국과 가치를 공유하려 애쓰는 우리의 현실이 잔상으로 뒤따를 뿐.

미국으로 이주한 1983년 이후, 디턴은 갈수록 어두워지는 미국을 겪고 있는 중이다. '아메리칸드림'으로 상징되는 기회의 땅은 '불평등의 땅'으로 변모했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미국 경제와 정치의 오염으로 인해.

미국에서 빈곤과의 전쟁은 빈곤층과의 전쟁이다. 레이건은 정부가 가난한 사람을 도울수록 상황이 더 악화된다고 했고, 트럼프는 빈곤층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 결과, 미국인 530만 명이 세계은행에서 정한 글로벌 빈곤선(1인당 하루 1.90달러) 미만에서 살아간다. 대학 학위가 없는 남성의 현재 실질임금 수준은 50년 전보다 더 낮아졌다. 성장과 번영은 일하는 사람들과 공유되지 못했다.

소득 불평등, 즉 물질적 불평등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사회적 지위의 고저, 남성과 여성, 인종과 민족, 도시와 농촌, 대학 학위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들 사이의 '돈을 넘어선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2020년 빈곤 통계에 의하면 백인 가정의 중위 순자산은 흑인 가구 중위 순자산의 8배에 달한다. 게다가 흑인은 백인보다 살해당할 확률이 5배 높고, 살인범이 될 확률도 5배 높다. 기대수명은 흑인 남성이 백인 남성보다 7년 짧고, 흑인 여성은 백인 여성보다 4.5년 짧다.

디턴은 그의 아내 앤 케이스와 함께 자살, 악물 과다 복용 및 알코올 중독 등으로 인한 사망을 '절망사'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절망을 악용해 중독과 사망을 부추기며 돈을 버는 제약회사 등을 '가장 나쁜 악당'이라고 했다. 미국의 현재 자살률은 최악의 수준으로 중가했으며, 특히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의 자살률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경제가 성장하더라도 피해를 본 사람들이 계속 피해를 보는 악순환은 왜 무한반복일까? 디턴은 나쁜 경제학의 노예이거나 좋은 경제학의 절반만 이해한 설익은 경제학과 그에 사로잡힌 정치인들에게 책임을 묻는다.

밀턴 프리드먼으로 대표되는 시카고학파는 불평등이 걱정되더라도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라는 관점을 워싱턴에 제공했다. 규제와 조세 정책으로 불평등을 치료하려는 정치적 시도가 질병(불평등) 그 자체보다 더 유해하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선 정의를 앞세워 이뤄지는 재분배는 본질적으로 부당하다.

이런 시카고 경제학과 프리드먼의 주장이 갖는 영향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널리 퍼져있다. 열심히 일하고 저축해서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당장의 즐거움에 빠진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을 완화하려는 유혹은 미덕에 불이익을 주고 악덕에 보상하는 것이라는 논리다. 상속세를 '나쁜 세금'이라며 강력히 반대한 프리드먼의 전통은 현재 많은 경제학자들이 악덕을 조장하고 미덕을 저해한다며 부유세에 반대하는 주장과 상통한다.

프리드먼에 따르면 자유시장에 맡겨두면 자유와 평등이 모두 실현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규제되지 않는 시장에서, 특히 자본이 법과 정치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 때 자유에 대한 유토피아적 수사는 불공정한 사회적 디스토피아로 이어졌다. 자본가들이 부유해지면 경제가 성장하고 모두에게 이득이 될 것이라는 우화(낙수효과)도 2008년 금융위기 때 민낯을 드러냈다. 풍요로운 기회의 땅 미국에 불평등 따위는 하잘 것 없단 말은 거짓이다.

불평등한 속살을 감춘 미국의 오늘날은 19세기 후반 도금시대와 유사하다는 게 디턴의 통찰이다. 도금시대는 혁신을 창출했다. 문제는 혁신이 멈출 때 생겼다. 초기에는 혁신으로 가져가는 부가 사회 전반에 가져다주는 혜택에 대한 정당한 보상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제공자에서 강탈자로, 만드는 자에서 빼앗는 자로 변모했다. 새로운 도금시대의 총아인 구글, 페이스북, 테슬라, 애플 등 빅테크 기업들은 19세기 도금시대의 석유, 철도, 철강 업체들과 다른가? 이들은 경쟁업체를 무서운 상대가 되기 전에 인수하고 특허를 매수하거나 로비를 벌여 위협을 없애는 선택을 한다.

최근에 불평등은 정치 포퓰리즘과도 맞닿았다. 경제와 정치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은 포퓰리즘, 심지어 폭력도 정당화 할 수 있다는 것을 2021년 트럼프 추종자들이 벌인 대선 불복 의사당 난동 사건이 보여줬다. 디턴은 미국 자본주의가 자유민주주의와 계속 병립할 수 있느냐를 핵심 질문으로 던진다.

디턴의 사상이 불온해서 미국의 어두운 면을 과장한 것일까? 2015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그의 권위를 의심할 여지는 없겠다(노벨 경제학상의 역사와 역대 수상자들에 대한 일부 냉소적인 소감도 한 챕터로 담았으니 책의 부제 '노벨상 경제학자가 바라본 미국'이 다소 어색하기는 하다).

케인즈에 대한 경외심을, 하이에크에 대한 조롱을 곳곳에서 드러내도 그가 열혈 진보학자로 보이지는 않는다. 경제학자들이 산출하는 통계 수치마저 좌우가 다른 지경을 개탄하고, 세계화가 불평등을 심화시켰다고 주장한 저명한 케인지언의 허술함을 지적하기도 한다.

정치적 양극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경제학자들과 경제학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미친 해악에 대한 자기고백이자 경제학의 중심에 철학의 귀환을 호소하는 원로 경제학자의 성찰은, 어쩌면 한국의 오늘이거나 내일에 관한 이야기다.

▲ <좋은 경제학 나쁜 경제학> 앵거스 디턴(지은이). 안현실 정성철(옮긴이) ⓒ한국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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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구

2001년에 입사한 첫 직장 프레시안에 뼈를 묻는 중입니다. 국회와 청와대를 전전하며 정치팀을 주로 담당했습니다. 잠시 편집국장도 했습니다. 2015년 협동조합팀에서 일했고 현재 국제한반도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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