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정당, 어린이 병원비만큼은 해결하자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진보 정치, 민생 의제에서 역할 키워야

나는 이번 총선에서 정의당의 서울 지역 지역구 후보로 출마했다. 정의당의 후보는 전국적으로, 두 후보가 당선됐고, 나머지는 모두 저조한 득표율로 낙선했다. 특히 작지만 제3당으로서 역할 했던 정의당은 그마저도 국민의 당의 출현으로 제3당 지위를 상실했다.

20대 국회의원 선거는 대체로 회고적 투표로서 기존 정치에 대한 심판 선거로 요약된다. 박근혜 정권의 실정과 새누리당의 오만함에 대한 심판, 그리고 무능무책임한 제1야당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원내에는 3+1 정당 체제가 출현했다. 여소야대와 제3의 원내 교섭단체가 존재하는 새로운 구도의 여의도 정치이다. 진보 정당의 후보로서 실망이 크지만, 동시에 나는 이번 선거에서 대안 정당에 대한 민심의 갈망도 보았다.

진보 정치, 스스로 설 자리 만들어야

이번 선거에서 박근혜 정권을 심판하는 표심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향했고,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심판은 국민의당으로 향했다. 진보 정당은 그 선택지에 들지 못했다. 아직 진보 정치는 대안 정당으로 성장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의당의 출현으로 제3의 목소리를 내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번 선거가 진보 정당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이제 진보 정치가 제도적 틈새에서 설 자리를 마련하는 시기는 지났다. 변화무쌍한 선거에서도 강한 결집력을 발휘할 세력 기반을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앙 정치에서도 지역에서도 스스로 설 자리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근본적으로는 선거 제도가 바뀌어야 하지만, 지역에서부터 진보 정치 고유의 정치적 기반을 만들지 않고서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따라서 진보 정당은 어떤 나라를 만들어 갈 것인지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동일한 지향 집단을 만들어 내는 활동을 벌여야 한다. 그것을 담는 그릇, 진보 정치에 대한 신뢰를 키워야 한다.

그런 측면을 고려할 때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경험이 있다. 2010년 지방 선거에서 무상 급식 운동이 그것이다. 무상 급식은 진보 정치가 오랫동안 끈질기게 벌여온 의제이다. 진보 정치는 무상 급식 운동으로 수많은 주민들을 만나고 새로운 사회의 비전을 공유했다. 그 결과 한국 사회에 보편적 복지라는 공감대와 복지 국가라는 동일한 지향을 만드는 성과를 남겼다.

무상 급식 운동이 그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민생 의제와 결합된 복지 의제였기 때문이다. 가계 소득에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효능감 있는 의제였다. 나는 진보 정치의 설 자리를 만드는 가장 진보 정치다운 의제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제2의 무상 급식 운동이 절실하다.

제2의 무상 급식 의제로서 '어린이 병원비 국가 보장'

선거 운동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얘기는 "정치하는 놈 다 똑 같다", "투표하고 싶지 않다", "먹고살기 힘들다", "장사가 너무 안 된다" 등이었다. 물론 나는 열심히 듣고, 당의 정책을 홍보했다. 비록 선거판은 거대 정당들의 이전투구가 정책과 비전을 대신하지만, 지역의 선거운동 현장에서는 다양한 얘기가 오간다. 여기서 진보 정당에 대한 기대가 상당함을 느낀다. 정의당이 잘 돼야 하는데, 그 후보가 당선되어야 할 텐데 하며 아쉬워하는 이들도 적잖다. 물론 당선 가능성이 투표를 결정하는 우선순위이긴 하지만.

그 중 가장 많은 주민들과 공감대를 이룬 정책 공약이 있었다. 바로 어린이 병원비 국가 보장이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주부나 직장인이 매우 적극적이었고, 의외로 50~60대의 어머니와 할머니들 또한 관심이 많았다. 알고 보니 어린 손자를 돌보고 있거나 결혼 적령기 자제를 둔 어머니들이다. 말끝에 '꼭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신다. 아이들의 건강 보험 혜택만이 아니라 매월 나가는 과도한 민간 보험료를 아낄 수 있어 가계 소득에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고 하니 더욱 그렇다.

어느 분은 이런 정책이 진짜 저출산 대책이라며 더 강력히 추진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부모들의 빈부 격차가 아이들의 건강 불평등으로 이어져서는 안 되지 않겠냐고 말씀드리면 정의당의 당원은 어렵지만 이 캠페인에는 꼭 참여하겠다고 연락처를 남기기도 한다.

▲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4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어린이병원 앞에서 '의료 민영화 저지와 무상 의료 실현을 위한 운동 본부' 관계자들이 어린이들의 무상 의료를 촉구하는 '노란 풍선 기자회견'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건강 보험 하나로' 운동 이어가자

나는 2010년 시작된 '건강 보험 하나로' 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보편 복지 담론이 부상하기 이전임에도 이 운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매우 컸다. 차라리 국민건강보험료를 더 내서라도 의료 보장성을 확대하자는 민심이 형성되었다. 그만큼 사람들이 병원비 부담에 힘들어 하고 있었고,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찾고 있었다. 오로지 민간 의료보험 외에 기댈 곳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중에 건강 보험 하나로 운동이 등장한 것이다. 이런 게 바로 민생 정치다. 민심의 열망과 눈높이를 맞춘 주민 운동이다.

안타깝게도 건강 보험 하나로 운동은 여러 이유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 다시 병원비 민생 의제를 일궈가야 한다. 이번 선거 운동 과정에서 내가 확인한 민심은 더 이상 긴 말이 필요 없을 정도다. 어린이 병원 입원비 국가 보장 운동이 바로 제2의 무상 급식 운동이다. 가계 소득을 높이고 건강권을 보장하는 민생 의제이자 복지 의제다.

당연히 이러한 민생 의제가 진보 정치의 설 자리를 만든다. 더군다나 무상 급식 운동처럼 그 당사자가 아이들이다. 무상 급식 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국민 의료 복지의 전환점을 만들 지렛대가 될 것이다. 그 결과는 모든 의료비를 건강 보험 하나로 해결하는 국민건강 보험 대개혁 운동으로 귀결될 것이다. 최근에는 노동 및 시민사회 진영에서도 어린이 병원비 의제에 공감대가 형성돼 사업 추진에 에너지가 더해가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리고, 주요 언론매체도 집중 기획으로 보도하니 더욱 기대가 크다.

진보 정치, 민생 의제에서 자신의 역할을 키워야

총선이 끝나고 한 달이 지났다. 이제 곧 새로운 국회가 개원한다. 경제 민주화와 복지 국가 대한민국의 비전과 실질적인 기반이 조성되는 20대 국회 4년을 기대한다. 국회를 비롯한 정치권이 그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서도 '어린이 병원비 국가 보장'과 같은 민생 의제가 시민사회에서 촉발돼야 한다. 이러한 민생 에너지는 주거 문제에도 있고, 일자리 문제에도 있다. 아래로부터 지역 주민들이 참여하는 풀뿌리 운동이 절실하다.

이 과정에서 진보 정치가 자신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 어린이 병원비 의제를 가지고 아이들의 부모, 예비 부모, 가족들 모두를 이해 당사자로 참여시키는 지역 정치, 주민 정치에 나서야 한다. 민생 의제를 만들어 가는 진보 정치, 진보 정당을 기대한다

(이호성 내가만드는복지 국가 전 운영위원은 구로아이쿱생협 이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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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드는 복지국가>는 시민들이 복지국가 만들기에 직접 나서는, '아래로부터의 복지 주체 형성'을 목표로 2012년에 발족한 시민단체입니다. 건강보험 하나로, 사회복지세 도입, 기초연금 강화, 부양의무제 폐지, 지역 복지공동체 형성, 복지국가 촛불 등 여러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칼럼은 열린 시각에서 다양하고 생산적인 복지 논의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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