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밟고 또 밟아도, 조선 할머니는 지지 않는다

[프레시안 books] <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

35년의 일제 강점기에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이는 조선 여성이었을 것이다. 사회적 약자였던 조선 여성의 삶은 야만적 제국주의의 침탈에 힘없이 바스러졌다. 우리는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집회를 통해 처참한 실례를 봐 왔다.

일본으로 건너간 이들 역시 고난의 삶을 견뎠다. 그들은 조선인에, 여자였다. 일본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이들은 온갖 차별에 맞서 생을 지탱했으리라. 그저 삶을 감내하던 사이, 이들의 상처는 두껍게 갈라진 채 굳은살이 됐다. 얼핏 만져보면 단단하지만, 결코 여물 수 없는 상처가 됐다.

<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가와타 후미코 지음, 안해룡·김해경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는 굳은 의지로 '조센징'으로서 전후 일본 사회를 견뎌온 재일 조선인 1세 할머니 29명을 인터뷰한 르포르타주다. 이 책은 월간지 <세카이(世界)>에 '할머니의 노래(ハルモニの唄)'라는 제목으로 2012년 6월부터 2013년 5월까지 총 12차례에 걸쳐 연재된 이야기를 묶었다.

이 책을 쓴 이는 '일본의 전쟁책임자료센터' 공동대표 저널리스트 가와타 후미코다. 그는 오키나와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견뎠던 배봉기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 <빨간 기와집>(오근영 옮김, 꿈교출판사 펴냄)을 계기로 일제가 조선인에게 남긴 상처를 보듬고, 이를 기록해 일본 사회에 알리는 일을 평생 해왔다.

▲ <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가와타 후미코 지음, 안해룡·김해경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바다출판사
책을 펼치면 드러나는 할머니들의 젊은 시절은 비참함 그 자체다. 일제 순경은 조선인을 확인하기 위해 이유만으로 한복을 입고 다니는 어린 여자아이에게 먹물을 쏴댄다. 조선인의 사회 진출은 어떤 식으로든 막혀 있고, 이에 좌절한 조선인 남편은 조선인 아내를 핍박한다. 미군의 폭격에 지친 아버지는 딸아이는 버려도 괜찮다고 이야기한다. 야수의 시절은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남은 이의 존엄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인터뷰에 응한 할머니들은 이 역경의 시간, 인고의 시간을 덤덤히 이야기한다. 그리고 기록자는 이들의 이야기를 세밀히 기록한다. 글을 못 읽는 게 부끄러워 아이의 학교에 찾아가지 못해 한이 되었다는 할머니, 10대 때부터 전구 공장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일한 할머니, 민단과 총련 사이에서 방황한 할머니, 위안소에서 자살한 동료의 용기 앞에 부끄러워하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무탈했던 삶은 없다. 모두 각자의 상처를 안고 살아왔다. 광기에 빠진 집단 폭력이 사회의 약자를 어떻게 짓밟았는지를, 그런데도 왜 자신은 굴하지 않고 꿋꿋이 고개 들고 살아왔는지를 할머니들은 증언한다. 일본 사법부가 위안부 피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할머니는 "나는 녹슬지 않"는다며 구수한 가락으로 한풀이 한다.

이 책은 일본의 발뺌이 계속되고, 한국 정부마저 일본의 손을 들어주는 협상을 몰래 시도하고, 위안부 피해의 역사를 소멸하려 하는 시대에 반드시 보존해야 할, 역사 한가운데를 꿋꿋이 살아온 어르신들의 삶의 기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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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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