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세 타령하는 관료만 믿다 자살한 왕, 지금은?

[최성흠의 문화로 읽는 중국 정치] 관상(官商)이 득세하면 나라가 망한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는 숭정제(崇禎帝)이다. 그의 집권기 말년에 자연재해가 연이어 일어나 백성들이 심각한 기근에 허덕였다. 더불어 각지에서 폭동과 반란이 빈번하게 발생했는데 그중 가장 조직적인 반란군이 이자성(李自成)이 이끄는 농민군이었다.

이자성은 민심을 얻어 서안(西安)에 대순(大順)을 세우고 곧이어 명나라의 궁궐인 자금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숭정제는 세 아들은 변장시켜 피신시키고, 공주와 비빈을 자신의 손으로 죽인 후 자금성 뒤에 있는 경산(景山)에 올라 목을 매어 자결했다.

숭정제는 멸망한 여느 나라의 마지막 황제들처럼 무능하거나 방탕한 군왕은 아니었다. 즉위하자마자 권세를 쥐고 흔들었던 환관 위충현(魏忠賢)을 제거하여 환관의 세력을 꺾었으며 검약한 생활을 하며 명의 부흥을 위해 노력한 이였다.

그런데 왜 농민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났을까?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과도한 세금을 거두어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계속되는 자연재해가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숭정제가 이자성을 토벌하려 했을 때 국고는 텅 비어 있었다. 싸우려고 해도 군대를 유지할 돈이 없었던 것이다.

명대에는 자본주의 맹아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상업 활동이 활발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초보적인 가내 수공업이 출현하기도 했으며 다양한 거래 방식이 출현했다. 그런데 명 조정에서는 민간의 경제 활동을 통제하는 정책을 내놓지 않았고, 상업과 관련한 징세 제도를 엄밀하게 하여 세수를 늘리지도 않았다. 당연히 세금은 농민에게만 과도하게 부담되었고, 국고는 불어날 수 없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공상세(工商稅)를 줄이자는 주장을 한 사람들은 동림당(東林黨) 사람들이었다. 명 말의 유명한 당쟁인 동림당 사건의 장본인들이다. 이들은 본래 의(義)를 중시하고 이(利)를 천시하는 유학자였기 때문에 당연히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천시했다. 상업을 천시했다기보다는 상업으로 나라가 이득을 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북쪽 이민족의 침입에 대항하여 필요한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광업에 세금을 부과하려 했을 때 동림당의 핵심 인물인 이삼재(李三才)가 올린 상소를 보면 확실히 드러난다.

"황상께서 금과 은을 북두칠성 높이만큼이나 쌓으려 한다면 백성들은 쭉정이 한 바가지를 겨우 얻을 것이고, 황상께서 자손 천만대를 이을 계책을 세우면 백성들은 하루 살기도 힘들 것 입니다."

이 내용만 보면 무리한 세금을 걷지 말고 오로지 백성의 평안함을 생각하라는 훌륭한 선비의 충정어린 상소임에 틀림없다. "백성과 이익을 다투지 말고, 재부를 백성에게 베풀라(不與民爭利, 藏富於民)"는 격언은 이들에게 금과옥조와 같은 말이었다. 숭정제가 위충현을 제거하고 동림당을 중용했을 때 이미 국고는 바닥날 것이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제일 먼저 시행한 정책이 그들의 이상에 따라 공상세를 폐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세금도 내지 않고 장사를 하면서 큰돈을 번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것도 바로 이들이었다. 동림당 사람들이 다 그런 건 아니었지만 관리들은 대부분 상인들과 결탁하고 있었으며 출신 자체가 상인 가문인 관리들도 있었다. 몇몇 대상인들은 광업과 염업, 임업 등을 독점하며 세금도 내지 않고 거부가 되었다. 그들의 배후에는 언제나 고위 관료가 있었다. 그나마 세금을 거두도록 되어 있는 항목도 뇌물만 주면 얼마든지 탈세를 할 수 있었다.

이를 관상(官商) 결탁 또는 그냥 관상이라고 한다. <중국대역사(China : A Macro History)>를 지은 황런위(黃仁宇)는 상업이 흥성했던 저장(浙江) 진화(金華) 현의 1년 상업세가 은자 7량을 넘은 적이 없다는 것을 보고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백성과 이익을 다투지 말고, 재부를 백성에게 베풀라"는 신념에서 나온 감세 정책은 몇몇 권력자들과 그들이 뒤를 봐주고 있던 상인들에게만 혜택이 돌아갔다.

모자란 세금을 메우기 위해 농민들은 더욱 과중한 부담을 져야했고, 요동에서 군사 작전을 벌이던 장군은 군비가 모자란다고 하소연을 했다가 군비를 사취했다는 책임을 지기도 했다. 동림당의 신념은 실제로 충정에서 나온 말인지도 모른다. 혹은 그런 정책 덕에 자신들이 안락하게 살게 됐으므로 이상이 실현된 것이라고 믿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떤 병폐가 생길지 알면서도 개인의 이익을 위해 눈을 감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들은 "부족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불균등한 것을 걱정하라"(<논어> '계씨' 편)는 공자의 말씀은 깊이 새기지 않은 듯하다. 결국 국고는 바닥이 났고, 반란군이 자금성으로 들어왔을 때 아무도 숭정제의 옆을 지키지 않았다.

시진핑 주석은 2015년 11월 18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APEC 최고 경영자 회의(CEO Summit)에 참석하여 "아시아 태평양의 선도적 능력을 발휘하여 세계 경제의 도전에 대응하자"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여기서 그는 "무릇 치국의 길이란 우선 백성을 부유하게 만드는 것(凡治國之道,必先富民)"이라는 관자(管子)의 글을 인용하며 발전의 성과를 모든 인민에게 돌아가게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인용한 문구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덩샤오핑이 경제 발전을 위해 채택했던 선부론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 중국 정부가 보여준 정책은 모든 인민이 함께 발전하는 것이 아니었다. 경제 정책 자체가 불균형 발전 정책이었고, 성장을 위해서 분배는 뒷전으로 밀려있었다. 그 사이에 천문학적인 부를 소유한 거부들이 등장했다. 시진핑은 "모든 인민"에게 발전의 성과가 돌아가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해오지 않은 공산당과 관료들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어느 날 한 명의 성군이 등장해 부패척결의 기치 아래 몇몇 관상을 처단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관행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그 절대 권력에 기대어 이익을 보려는 관상이 등장할 것이다.

현재 중국 경제는 불안하다. 그래서 공급 측 개혁이라는 말로 기업 구조 조정을 단행할 예정이다. 그러나 어떤 기업을 어떻게 퇴출시키고 지원할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예측을 할 수가 없다. 공정하고 투명한 제도적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2007년부터 대부제(大部制)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행정 체제 개혁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그 개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책의 결정권, 집행권, 감독권의 분리와 협조라는 개념은 기본적인 구상만 있을 뿐이지 구체적인 방법은 제대로 제시된 적이 없다.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재부가 어떤 백성에게 베풀어질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중국 경제가 당면한 문제는 지도자의 자질 때문이 아니라 제도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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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중국 문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대륙연구소, 북방권교류협의회, 한림대학교 학술원 등에서 연구원을 역임했다. 중국의 관료 체제에 관한 연구로 국립대만사범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중국의 정치 문화에 대한 연구로 건국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 권으로 읽는 유교> 등의 번역서와 <중국 인민의 근대성 비판> 등 다수의 연구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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